16년간 지속된 메르켈 시대.. 그녀가 남긴 정치적 유산은

김용출 2022. 10. 22.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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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 첫 여성 연방총리로 성공가도
퇴임 직전까지 지지율 70% 넘겨
유년시절부터 네 번의 재임 망라
거대 정치인의 초상 객관적 분석
'침묵·관찰하다 마지막 순간 행동'
이례적 통치원칙 성공 원인 꼽혀

앙겔라 메르켈/우르즐라 바이덴펠트/박종대 옮김/사람의집/2만5000원

2021년 9월, 독일을 유럽은 물론 세계의 중심으로 올려놓은 거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정계은퇴와 함께 퇴임했다. 2005년부터 2021년까지 무려 16년을 재임한 제8대 독일 연방총리이자 첫 여성 연방총리였다.
독일을 세계의 중심으로 세운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를 분석한 책이 나왔다.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정치 초년병을 거쳐, 네 번의 총리 재임 기간까지 아우르며 현대 독일 정치인의 초상을 편견 없이 풀어낸다. 사진은 메르켈 전 총리의 재임 시절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제복 같은 재킷과 검은색 바지, 플랫 슈즈, 은은한 화장, 드라이만 한 헤어스타일이었지만, 그녀는 퇴임 직전 지지율이 무려 70%가 넘었을 정도로 성공한 총리로 꼽힌다. 각종 통계나 숫자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2005년 2조3000억유로 규모의 독일 GDP는 2020년 3조3000억유로를 넘어섰고, 무역 흑자는 2005년 1850억유로에서 2019년 2230억유로로 늘었다. 실업자는 2005년 500만명에서 2019년 230만명으로 떨어졌다. 재임 기간 글로벌 금융위기와 그리스 경제 위기, 시리아 난민 사태 등 국제 현안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 독일을 유럽은 물론 세계의 중심국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가 많다.

현대 독일의 거장 메르켈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메르켈의 어린 시절부터, 정치 초년병을 거쳐, 네 번의 총리 재임 기간까지 아우르며 현대 독일의 거대한 정치인의 초상을 편견 없이 객관적인 관점에서 풀어낸다.

책에 따르면, 메르켈은 1954년 함부르크에서 개신교 신학자 출신 아버지와 교사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곧 동독에 정착했다. 그녀는 동독 사회의 억압적 현실 때문에 정치적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분리해 살아야 했다. 이에 늘 몸에 밴 불신과 조심성 때문에 있는 듯 없는 듯 “소리 없이 사는 법”을 터득했는데, 이는 나중에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됐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1986년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서독을 방문하고, 서독으로 넘어간 지인에게서 고골의 소설책과 함께 ‘열린 세계로 가라’는 헌정사를 받은 뒤부터 ‘자유 독일 청년단’과 거리를 두고 사적 영역에 칩거한 것도 나중에 그녀를 둘러싼 잡음을 줄였다는 지적이다.

그녀는 동독의 여행 자유화 조치 이듬해인 1990년 2월 신생 정당 ‘민주주의 새 출발(DA)’에 가입하면서 정치판에 등장했다. 동독 및 여성 정치인을 요구하던 시대 분위기와 맞물리고 여러 사람의 도움도 받아 승승장구했다. 동독 정부의 부대변인으로 발탁한 통일 독일 부총리 로타어 데메지에르, 동독 정부의 부대변인이던 그녀에게 뤼겐 선거구를 마련해준 교통부 장관 귄터 크라우제, 그녀를 여성부 장관과 환경부 장관에 전격 발탁한 헬무트 콜 총리….

1990년 총선에서 여당 기민련 소속으로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이듬해 콜 총리에 의해 여성부 장관과 환경부 장관을 차례로 역임한 그녀는 1998년 기민련이 총선에 패한 뒤 당 사무총장이 됐고, 이듬해 11월 정당 기부금 스캔들이 터지자 콜 전 총리와 쇼이블레 대표를 코너에 몰아붙이고 당 대표에 올랐다. “만약 메르켈이 정치판에서 ‘마키아벨리즘적으로’ 행동한 적이 있다면 바로 이때였다. 한 방의 총알로 옛 왕과 새 왕을 동시에 제거한 것이다.”

당대표로 기민련을 이끌던 그녀는 2005년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슈뢰더의 재집권을 저지하고 마침내 총리가 됐다. 그녀는 집권 이후 서비스 민영화나 건강보험 단일보험료 같은 기민련 개혁안을 재빨리 포기하고 현실적 노선을 모색했고, 글로벌 금융위기나 그리스발 유로존 문제, 시리아 난민 사태 등 여러 위기 속에서도 특유의 기다림과 인내를 발휘하다가 마지막 순간에야 행동해 위기를 돌파했다.
우르즐라 바이덴펠트/박종대 옮김/사람의집/2만5000원
저자는 우선 그녀가 국민이 아닌 의회가 총리를 선출하는 체제였기에 4연속 총리가 될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즉, 직접선거로 선출하는 나라였다면, 수사적 재능이나 원대한 계획이 없는 그녀가 국가수반에 뽑히지 못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저자는 이어 기다리고 침묵하고 관찰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그녀의 통치 원칙이었다고 분석한다. 특유의 기다림, 인내력, 냉정한 판단력이야말로 성공의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가장 성공적인 무기는 바로 지루함이었다고 꼽는다. 연정이나 의회와 합의된 사항을 하나하나 처리하는 실무적 태도, 충격이나 이벤트도 없이 그저 루틴에 따라 소리 없이 일을 처리하는 자세….

카리스마가 없고 사무적이며 원대한 비전도 없는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콜이나 슈뢰더보다는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 스타일이라고 평가했다. 사민당 출신인 슈미트 전 총리는 정치에서 원대한 비전을 세우는 사람은 “병원에 가봐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콜은 통일 총리였고, 슈뢰더는 ‘어젠다 2010’ 총리였다. 반면에 메르켈은 슈미트처럼 ‘의무감과 예측 가능성, 실행 가능성’의 특징으로 이뤄진 ‘과정’의 총리다.” 즉, 자신을 내세워 영웅으로 만들려 하지 않아서 오히려 성공했다는 것이다. “정당 민주주의에는 영웅이 없다. 이 원칙을 단순히 인정하는 선을 넘어 뼛속 깊이 내재화한 것이 메르켈 성공의 핵심이다.”

특히 국제 관계나 글로벌한 문제에서도 복잡한 이해관계를 중재하고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주석,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 자신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다른 정치인과 다른 모습이었다. “그들에게 메르켈은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 맞설 대항마로 비쳤다. 그녀는 독자들에게 공조와 협력으로 맞서고, 싸움닭들에게는 중재와 협상 카드를 내밀고, 협박에는 유화적인 태도로 대응하고, 프랑스의 다혈질적인 비전에는 조용한 기다림으로 반격하고, 양자택일밖에 모르는 사람에게는 타협점을 제공하고, 트럼프 같은 사람과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 싶으면 자신의 여성 장관들을 대화 자리에 초대했다.”

물론 비판도 적지 않다. 신념이나 원칙 없이 오직 총리가 되는 것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았다는 지적이다. “메르켈은 관리만 할 뿐 통치를 하지 않는다. 전술은 알지만 전략은 모른다. 확고하게 지지하는 것은 없고 상상력 없이 실용적으로만 통치한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라고 하는 것들도 상황이 달라지면 얼마든지 철회한다.” 아울러 에너지 전환 정책을 일관되게 완수하지 못한 것이나, 연금 및 의료 분야에서 미래지향적 노력을 방치한 것도 실수로 지적됐다.

책은 메르켈리즘에 대한 기본적 분석 툴을 제공한다. 다만, 대체로 주제별로 풀어가고 분석과 평가가 중심을 이루면서 메르켈을 처음 공부하는 이들에겐 다소 어려울 수도 있어 보인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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