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가을엔 편지를 쓰겠어요

2022. 10. 21.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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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매번 긴 편지를 보내왔다
치매가 걸린 뒤에는 받지 못했다
손편지를 쓸 일이 거의 없는 세상
오늘 엄마께 긴 편지를 써야겠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 한 구절을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 그래서 이 편지는 /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김남조의 ‘편지’ 부분) 이 시를 읽으면 편지를 쓰는 순간의 간절함이 잘 느껴진다. 부치지 않아도 쓰는 이의 마음이 미리 당도하는 것이 사랑이다.

어머니의 편지는 각별했다. 사무용 괘지를 일곱 장이나 이어 붙여서 세로로 써 내려간 편지였다. 두툼한 봉투를 뜯으면 한참 동안 펼쳐지는 긴 편지를 거실 바닥에 풀어내면서 읽었다. 이 긴 편지가 어떻게 봉투에 다 들어갔을까 싶게 차곡차곡 접어 넣은 편지는 꼭 익일 특급으로 부쳐졌다. 그것이 딸에게 빨리 닿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이었을까.
천수호 시인
내 딸아, 이렇게 시작하는 어머니의 편지는 마침표가 맨 마지막 문장에 단 하나만 찍혔다. 숨이 막히도록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듯이 그것이 이 세상의 마지막 편지인 듯이 술술 풀어낸 어머니의 당부들. 그렇지만 나는 자주 배달되어 오는 어머니의 편지를 꼼꼼히 읽지 않았다. 늘 비슷비슷한 말들의 연속이었기에 주르륵 읽고는 책꽂이에 꽂아두곤 했다.

이제 그 지루한 편지를 다시 받고 싶다. 치매의 어머니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어머니의 숨결을 느끼며 아주 또박또박 또 천천히 읽어내려갈 것이다. “알겠느냐, 딸아 // 이제 나 멀리 가 있으마 / 눈에 넣어도 안 아플 / 내 딸아, 서두르지 말고 / 천천히 뜨겁게 살다 오너라”(문정희의 ‘어머니의 편지’ 중에서)

스마트폰으로 쉽게 소통하게 되면서 우리는 손편지를 쓸 일이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 한번쯤은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빨간 우체통을 눈여겨본 것도 오래되었고 긴 편지를 쓸 만큼 애절한 대상이 퍼뜩 떠오르지도 않지만, 편지로 소통하던 시절의 그 은근한 서정이 새삼 그립다.

정지용 시인은 작은 달개비꽃을 으깨 푸른 꽃잎 잉크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꽃잎 잉크로 쓴 희미한 편지라니! 산 기슭을 서성이며 달개비꽃잎을 몇 번이고 만지작거렸다. 얼마나 따 모아야 어머니께 편지 한 통을 쓸 수 있을까. 어머니는 그 편지를 제대로 읽기나 하실까.

19세기 프랑스의 여성 소설가 조르주 상드는 서한 문학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상드는 평생 4만여 통의 편지를 썼고 이 중 절반이 채 안 되는 분량이 남아 있다. 그녀의 서간집 총 26권에 실린 편지는 2000여 명에게 쓴 1만8000통이다. 시인 뮈세, 음악가 쇼팽, 조각가 망소 등과의 사랑으로도 유명한 상드는 그 당시에 2000명이 넘는 사람들과 편지로 교류했다. 그녀와 편지를 나눈 이들은 하이네, 발자크, 보들레르, 쇼팽, 뮈세, 플로베르, 들라크루아, 마르크스 등 그 당시 유명한 유럽의 지성인들이다.

상드의 편지 중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남편에게 쓴 편지다.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솔직하게 고백하는 편지인데, 그 분량이 200자 원고지로 190장이나 된다. 우리의 정서로는 참 이해가 쉽지 않지만 이런 일을 편지로 설득하려는 상드의 시도가 놀랍다. 편지로써 차분하게 자신의 심정을 설명할 줄 아는 상드의 이런 능력이 그 당시 사교계를 뒤흔들지 않았을까.

나도 한 친구에게 매일 엽서를 보낸 적이 있다. 그것이 얼마간 지속되었는지도 희미한 8년 전의 일이다. 친구는 암투병 중이었고 병세가 악화되어 바깥 출입이 어려울 때였다. 친구는 집에서 치료하기를 원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일 엽서를 보내 잠시 고통을 잊게 해주는 것뿐이었다. 평생 답장을 받아보지 못한 엽서였지만 그것은 친구를 잃어가는 나 자신이 버티는 힘이 되었다. 어쩌면 친구가 그 엽서를 읽는 순간 나는 이미 답장을 받은 건지도 모른다. 친구가 엽서를 받았겠다고 짐작한 시간쯤에는 내 마음이 유난히 울렁거렸으니까.

모처럼 편지지를 펼친다. 어머니께 긴 편지를 써야겠다. 어머니가 내게 사랑의 숨결을 모아 긴 편지를 써 내려갔듯 예전의 어린 내가 어머니께 한껏 재롱을 부려야겠다. 지금 이 순간을 까맣게 잊고 사는 치매의 어머니께 오래전의 행복이 선물처럼 당도하리라.

천수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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