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스텝 엎친 데 레고랜드 덮쳤다..회사채 '한파'
[편집자주] 강원도 레고랜드발 PF(프로젝트 파이낸싱) 유동화증권 부실 사태 이후 자금 시장이 얼어붙는다. 부동산 PF로 얽힌 건설사, 금융사 등의 손실 우려도 커진다. 재깍재깍 다가오는 유동화 증권의 만기,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금리 등이 숨통을 조인다. 금융당국도 분주해졌다. 각종 대책을 내놓고 추가 카드도 만지작거린다. 다만 시장의 우려를 잠재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치솟은 금리에 가뜩이나 움츠려 있던 회사채 시장이 강원도의 레고랜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사태까지 발생하자 얼어붙었다. 회사채 발행 규모는 급감했고 3분기 A등급 회사채의 절반 이상이 미매각됐다.
20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전날 기준 신용 스프레드는 125bp(1bp=0.01%p)로 벌어졌다. 2009년 8월 13일(129bp) 이후 13년 2개월 만에 최고 수준이다.
신용 스프레드는 3년물 회사채(AA-)와 국고채 간 금리 차이로, 수치가 커질수록 시장 참여자들이 회사채 투자 위험을 높게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량 등급으로 분류되는 AA- 회사채 3년물 금리는 5.574%로 급등했다. 기업들의 단기자금 조달 수단인 CP금리(A1등급, 91일물 기준)도 4.07%까지 올랐다. CP금리는 2009년 1월28일 이후 13년 만에 4%를 다시 넘어섰다.
회사채 발행시장도 위축됐다. 이달 1일부터 전날까지 회사채 발행 규모는 1조2362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회사채 발행 규모(3조3562억원) 대비 63.16% 줄었다.
금투협 관계자는 "올해 3분기 인플레이션 확산으로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최종 기준금리 전망치가 상향 조정되고 통화정책 완화 기대가 약화됐다"며 "금리상승으로 인한 기관의 평가손실 우려 확대와 발행사의 자금조달 비용 부담 증가로 발행시장 위축이 심화됐다"고 분석했다.
미국 연준의 금리인상과 함께 한국은행도 올해 두 번 연속 빅스텝(한 번에 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을 단행했다. 현재 기준금리는 3%다. 기준 금리가 오르자 회사채 발행에 필요한 가산금리가 상승했고 기업의 부담은 커졌다.
안 그래도 울고 싶은 상황에서 지난달 29일 레고랜드 ABCP에 기한이익상실(EOD)이 발생하면서 회사채 투자심리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화진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레고랜드 사태로 단기 시장 차환 리스크가 확대되고, 회사채 발행 시장 전반에 심리가 냉각되고 있다"며 "우량 등급 회사채도 수요를 채우기 어려울 수 있어 발행을 미루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금투협이 공개한 '2022년 3분기 공모회사채 수요예측 실시 현황'에 따르면 올해 3분기 공모 무보증사채 수요예측 규모는 5조500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9% 감소했다.
2018년부터 4년 연속 300%대를 지속했던 경쟁률은 196%로 떨어졌다. 올해 3분기 수요예측 미매각 건수는 16건, 미매각 규모는 9500억원을 기록했다. 미매각률은 14%로, 전년 동기 대비 13%포인트 상승했다. A등급의 경우 미매각률이 58%에 달한다.
메리츠금융지주는 지난달 무기명식 무보증사채 수요예측을 진행했지만, 모집액 3000억원을 채우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SK리츠(AA-) 회사채도 960억원 모집에 겨우 50억원을 확보했다. 한온시스템과 교보증권 등은 회사채 발행을 준비하다 일정을 미뤘다.
증권사에서 회사채 관련 업무를 맡은 관계자는 "발행물뿐 아니라 유통물도 금리가 상당히 상승했다"며 "이 같은 상황에서는 수요예측을 못 채우는 것이 당연하다. 현재 정상적인 수요를 찾기는 쉽지 않다"고 귀띔했다.
향후 전망도 밝지 않다. 미국 연준의 자이언트 스텝, 한국은행의 빅스텝 가능성이 시장의 부담을 키운다. 유동성이 부족하고, 부동산 경기도 안 좋은 상황에서 부동산PF(프로젝트파이낸싱) 관련 채권에 대한 시장의 신뢰 회복도 쉽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회사채 전망은 정부에 달렸다"며 "채안펀드 등을 비롯한 다양한 정책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당국이 채권시장안정펀드(채안펀드) 여유 재원 1조6000억원을 먼저 풀겠다고 밝혔다. 최대 20조원 규모의 채안펀드 추가 자금 집행도 준비 중이다. 한국증권금융을 통한 유동성 지원, 은행의 유동성 기준 완화 등도 언급했다. 채권 시장 비명에 당국이 꺼내 안정책들인데 시장은 시큰둥하다. 여전히 직접적이고 더 많은 자금 투입을 원한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20일 '시장 안정을 위한 특별 지시사항'을 통해 "채안펀드 여유 재원을 통해 신속히 매입을 재개하고 추가 캐피탈콜(추가 수요가 있으면 투자금을 집행하는 방식) 실시도 즉각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강원도 PF(프로젝트파이낸싱)-ABCP(자산유동화기업어음) 관련 이슈 이후 확산하는 시장 불안 요인을 잠재우기 위해 내놓은 메시지다. 김 위원장은 "최근 상황이 전반적인 금융시장 불안으로 확산하지 않도록 필요한 시장 대응 노력을 강화해달라"고 주문했다.
금융당국이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싸늘히 식어버린 시장의 투심을 되살리는 것이다. 2020년 총 20조원 규모로 구상된 채안펀드는 1차 캐피탈콜로 3조원이 조성된 이후 여유 재원 1조6000억원이 남았다. 먼저 이 재원을 활용한 이후 추가 조성을 준비한다.
금융위와 금융감독원은 현재 매일 전 증권사의 일자별, 프로젝트별 유동성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향후 상황에 따라 한국증권금융을 통한 유동성 지원도 검토 중이다.
또 은행 요청에 따라 LCR(유동성커버리지비율) 정상화 조치를 6개월 유예하는 등 정상화 속도를 조절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현재 LCR 규제 비율 정상화 계획으론 올해 말까지 92.5%를 맞추도록 돼 있었는데 이를 6개월 유예한다. 내년 6월 말까지만 맞추면 된다.
LCR은 향후 1개월간 순현금유출액에 대한 고유동성자산 비율 규제로 일시에 은행에서 뭉칫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규제다. 애초 당국이 코로나19로 85%로 낮췄던 LCR을 내년 7월 100%로 정상화기로 했었는데 이를 6개월 더 유예한 것이다.
은행들이 LCR 비율을 맞추기 위해선 고유동성 자산을 확보해야 했고, 이 매입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최근 은행채 발행을 늘렸다. 이 때문에 저신용 기업 자금 조달이 어려워진데다 채권금리가 높아졌단 지적이 이어졌다.
당국은 또 부동산 PF 시장과 관련해 시장 불안이 확산하지 않도록 필요시 금융지원 프로그램도 조속히 마련해 발표하기로 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단기자금 시장이 사실상 작동을 멈춘 상태"라며 "유동성 불안이 커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면서 위기감이 높아졌다. 우선 그것부터 풀어가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 당국이 위기를 감지하고 청사진을 내놓는 데 그쳤다는 평가가 많다. 원론적인 대응책 수준이란 것이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때 금융당국은 20조원 규모 채안펀드 조성 이외 한국은행의 무제한 RP(환매조건부채권) 매입·비은행 금융기관 대출, 증권금융 유동성 공급 등을 진행했다.
당국이 고민하는 지점은 이같은 실질적인 위기 대응책을 언제 쓸지 타이밍이다. 또 다른 금융당국 관계자는 "위기 때 보통 일차적으로 증권사, 안되면 채안펀드, 한국증권금융, 한국은행 순으로 등판하는데 이걸 적기에 쓰는 타이밍의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당국에서 먼저 들어가면 교란이 될 수 있다는 판단도 있어 매일 상황을 체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미 시장에선 한국은행의 SPV(기업유동성지원기구) 등판이 필요하단 의견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SPV가 한국은행과 산업은행의 출자-대출을 통한 유동성을 마련하기 때문에 보다 근본적인 유동성 공급책 역할을 할 수 있단 기대다.
또 당국이 회사채·CP(기업어음) 매입뿐 아니라 금융사 CP와 ABCP 매입도 전향적으로 검토해달란 목소리다. 홍성기 나이스신용평가 SF평가1실장은 "채안펀드로 회사채·어음을 지원하면 금융기관 유동성에 간접적으로 도움이 될 순 있지만, 지금 사정을 보면 자금이 곧바로 투입돼 (시장이) 돌아갈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직접적인 대책을 서두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건설사가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금리 급등 등에 부동산 시장은 침체하고 자금 시장은 얼어붙었다. 부동산 PF(프로젝트 파이낸싱) 만기를 막지 못해 부도 위기에 처하는 건설사가 하나둘씩 나온다. 업계에서는 '이제 시작'이라는 우려가 커진다.
◆A건설·B건설·C건설 부도위기설 잇따라
20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서울 소재 중견사인 A 종합건설사가 만기가 도래하는 500억원을 막지 못해 조만간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온다. 시행업계 관계자는 "자금조달 길이 다 막혀서 여기저기서 20억, 30억원 단위로 조달하고 있는데 쉽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A 건설사뿐이 아니다. 업계에서는 부도 가능성이 커 경계해야 하는 B 건설사, C 건설사의 이름 등이 공유된다. 부동산 신탁업계 한 관계자는 "회의 시간에 부도 가능성이 높은 건설업체 이름이 언급되는데 건설사가 새롭게 추가되고 있다"면서 "해당 업체는 부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사업을 같이 하지 말라는 일종의 주의보"라고 설명했다.
특히 지방 중소형사의 상황이 어렵다. 대한건설협회에 따르면 올해 들어 7월까지 부도업체는 총 4개 사다. 이중 부산이 3개, 경남지역이 1개로 모두 지방회사다. 최근에는 부동산 PF를 주도했던 저축은행이 지방 사업장과 비주거 부동산 상품에 대한 대출을 사실상 중단하면서 여윳돈이 부족한 중소중견사의 타격이 크다.
대형 건설사들도 자금 순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롯데건설은 18일 2000억원 유상증자, 20일에는 5000억원 단기 차입을 각각 공시했다. 회사 측은 경기 침체에 대비해 미리 운영자금을 확보한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자금줄 끊기고, 미분양 누적…빨간불 커졌다
최근 금리인상 여파로 분양 시장이 위축돼 지방 사업장에서 악성 미분양(준공 후 미분양) 물량이 누적되는 것도 위험 요인이다.
연내 충남 천안시에서 분양을 준비 중인 한 중견 건설사 관계자는 "내부 검토 결과 현시점에선 초기 분양률이 10%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며 "당장은 문제가 없겠지만 2~3년 뒤 준공 시점까지 미분양이 해소되지 않으면 자금 압박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최근 일부 건설사들은 조합, 시행사 등 사업 주체와 시공 계약을 맺을 때 '분양률 40%'를 공사비 완납 조건으로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미분양 장기화로 공사비를 받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다. 전국적으로 청약 열기가 고조돼 지방 중소도시에 짓는 신축 아파트도 평균 수십 대 1의 경쟁률을 나타냈던 지난해와는 완전히 달라진 기류다.
단기에 금리가 치솟아 사업성이 떨어지면서 아예 착공이 어려워졌다는 위기감도 팽배한다. 한 중소건설사 관계자는 "최근 토지 매입을 위한 브릿지론과 사업 진행을 위한 PF(프로젝트파이낸싱) 금리가 10%대로 치솟았고 이마저도 대출 실행이 안 돼 당분간 사업을 미루자는 의견도 나온다"고 했다.
◆위기의식 느낀 협회, 대처 방안 용역·정책 건의도
상황이 심각해지자 건설 유관 단체들은 대책을 호소하고 있다. 대한주택건설협회는 지난달 '주택경기 침체 해소 방안'이라는 보고서를 국토교통부에 제출했다.
협회 관계자는 "외환위기 때 실시했던 건설사 유동성 지원 방안을 선제적으로 시행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며 "환매조건부 주택을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등 공공기관에서 우선 매입한 뒤 시장이 안정된 2~3년 뒤 업체가 재매입하거나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미분양주택을 매입 임대주택으로 우선 매입하는 방안을 시행하면 건설사 자금난 해소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한건설협회는 최근 건설산업연구원에 '금융위기에 따라 건설산업이 대처해야 할 방안'을 주제로 용역을 맡겼다. 결과는 이달 말에 나올 예정이다.
올해 8월 기준 전국 미분양 주택은 3만2722가구로 전월 대비 4.6% 증가했다. 인천은 같은 기간 124.6%(678호) 급증했다. 대전(31.2%), 부산(19.7%), 대구(10.3%)도 한 달 새 두 자릿수 증가율을 보였다. 하지만 정부는 최근 미분양 주택 규모가 과거와 달리 많지 않기 때문에 추가 지원 대책은 신중히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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