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語西話] 닫을 때는 닫고 열 때는 열고

원철·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2022. 10. 2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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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의 ‘열린송현’이란 하얀 고딕체 글씨가 땅의 역사를 한마디로 말해준다. ‘열린’이란 말에 방점을 찍었으니 반대말은 당연히 ‘닫힌’일 것이다. 송현은 닫아야 할 때는 당연히 닫았지만 닫을 필요가 없는데도 습관처럼 닫아 둔 세월이 무려 25년이다.

해방 후 미국 대사관 직원의 숙소 부지가 되었다. 군사시설에 준하는 보안을 위해 엄청 높은 담장이 필요했다. 어른 키의 두 배를 넘기고도 여유가 있었으니 족히 4m는 되겠다. 일만일천 평을 에워싸야 하니 그 둘레 길이도 만만찮다. 하지만 숙소가 옮겨가면서 1997년 이후 담장은 별다른 용도 없는 보기 싫은 시설물로 전락했다. 도심의 애물단지임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담장에 새로운 임무가 주어진다. 가려야 할 숙소는 없어졌지만 새로 가릴 것이 생긴 까닭이다. 수많은 차량과 사람들, 그리고 관광객이 오가는 길 옆 담장 속에 갇힌 금싸라기 땅은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렇게나 자란 풀과 잡목이 서로 뒤엉키면서 버려진 황무지처럼 어지러웠다. 아이러니하게도 담장은 몇 십 년 동안 안쪽의 무질서를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는 가림막으로 그 역할이 바뀐 것이다.

하긴 솔재 혹은 솔고개라고 불리던 야트막한 언덕 송현은 본래 경복궁의 가림막이었다. 문종실록에는 ‘경복궁의 오른쪽 백호(右白虎·인왕산)는 높고 험준하지만 왼쪽 청룡(左靑龍·낙산)이 낮고 미약하므로 소나무를 심어 산맥을 비보(裨補·보충)하라’고 했다. 송현 역시 경복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인지라 풍수학에선 내청룡(內靑龍·낙산은 외청룡)으로 여겼다. 그런 까닭에 언덕은 물론 자생하던 소나무까지 관청의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송도(개성)에서 한양(서울)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에 송현에는 이미 여러 채의 민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태조(이성계) 임금이 ‘경복궁 왼쪽 언덕의 소나무가 마르므로 그 가까이에 있는 인가를 철거하라(景福宮左岡松枯 命撤近岡人家)’는 지시를 내리면서 조선왕조실록은 송현에 관한 최초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임진란 이후 불타버린 경복궁을 대신하여 창덕궁이 대궐 역할을 하면서 송현은 상대적으로 가림막이란 상징성이 다소 희미해졌다. 따라서 관리 역시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 조건이 바뀌면 모든 것이 변하기 마련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언덕과 소나무는 공공적, 개인적 필요성에 의해 조금씩 깎고 헐어내고 베어내다 보니 이제 언덕도 소나무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 송현이라는 이름만 남았다.

장벽으로 둘러싸여 수십 년 동안 요지부동이던 그 터에 올여름 막바지 무렵 건설 중장비가 요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들풀과 잡목을 베어내고 흙을 돋우는 평탄작업을 마치더니 키 작은 화초와 잔디를 심는 것이 아닌가. 의외의 광경이 너무도 비현실적인지라 두 눈을 의심했다. 뿐만 아니라 담장돌을 한 켜 한 켜 걷어내던 어느 날 산성 같은 장벽이 사라지면서 인근 산과 푸른 잔디 광장이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주변 어디서건 드나들 수 있는 길목까지 여러 개 생기면서 진짜 ‘열린’ 송현이 된 것이다.

개차법(開遮法)이라고 했다. 닫아야 할 때는 닫지만 열어야 할 때는 여는 것을 말한다. 늦긴 했지만 열린 송현으로 인하여 오래도록 볼썽사나움을 참아야 했던 종로 북촌 주민들의 표정까지 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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