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세안 파동 일으킨 영국처럼 이탈리아도 불안하다

김지섭 기자 2022. 10. 20.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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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BIZ] 유럽 재정 취약국가들 위기감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지난 14일 감세안 파동에 대해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열어 “(예산안 일부가) 시장 예상보다 더 멀리, 더 빨리 나갔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실수를 인정했다. 영국 정부는 지난달 발표한 450억파운드(약 72조원) 규모의 감세안을 전면 폐기하기로 했다. /로이터·뉴스1

최근 영국의 감세안이 거센 역풍(逆風)을 일으키면서, 재정 건전성이 취약한 다른 유럽 국가들도 덩달아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영국 국채와 파운드화가 폭락한 결정적 이유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국가 부채 때문이었다는 점이 부각되면서다. 에너지 위기와 경기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돈 쓸 곳이 늘어난 유럽 각국은 시장의 눈치를 보느라 운신의 폭이 크게 줄어들 처지에 몰렸다.

◇빚더미에서 비롯된 英 감세안 파동

영국 감세안 파동을 부른 직접적인 원인은 리즈 트러스 신임 내각이 지난달 발표한 ‘성장 계획 2022′이다.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이후 둔화된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고,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사태로 움츠러든 민간 소비를 활성한다는 취지로 마련됐다. 1972년 이후 50년 만에 최대인 450억파운드(약 72조원) 규모의 감세안과 가구당 400파운드(약 64만원)에 달하는 에너지 보조금 지급 등이 포함된 초대형 재정 패키지였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발작에 가까운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발표 직후 영국 파운드화 대비 미 달러화 환율은 1.03달러까지 떨어져(달러화 가치 상승, 파운드화 가치 하락) 역대 최저를 기록했고, 영국 2년물 국채 금리는 연 4.6%를 돌파(채권가격 하락)하며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최고치까지 상승했다. 영국 통화와 채권에 대한 집단 투매(投賣)가 일어난 결과다. 이에 영국 정부는 서둘러 감세 축소 계획을 발표하고, 영란은행(BOE)은 채권 금리 안정화를 위한 장기국채 대량 매수를 선언하면서 급한 불을 껐다.

영국이 파운드화라는 준(準)기축통화를 보유한 G7(주요 7국) 일원인데도 시장의 불신에 직면한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영국의 막대한 부채를 첫손에 꼽는다. 영국은 지난 1분기 GDP(국내총생산) 대비 중앙정부 부채 비율이 154.1%에 달해 유럽 내에서 그리스(215%)에 이어 둘째로 높다. 또 에너지 가격 급등에 따른 소비 둔화를 막기 위해 보조금을 가장 많이 쓴 나라이기도 하다. 벨기에 싱크탱크 브뤼헬에 따르면 지난 1년간(2021년 9월~2022년 9월) 영국 정부의 에너지 보조금 조성 규모는 1784억유로(약 248조원)로 GDP의 6.5%나 된다. 규모나 GDP 대비 비율 면에서 모두 유럽 내 압도적 1위다. 2위인 독일은 영국보다 에너지 보조금 규모가 훨씬 적고(1002억유로), GDP 대비 비율은 2.8%로 영국의 절반에도 한참 못 미친다. 시티그룹이 영국의 대규모 감세안에 대해 “막대한 부채를 떠안은 영국이 재원 조달 계획이 뚜렷하지 않은 도박을 벌이고 있다”고 혹평한 이유다.

◇우려 커진 재정 건전성 취약국들

영국 사태를 계기로 재정 건전성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자 부채 비율이 높은 유럽 국가들을 바라보는 채권자들의 시선은 한결 까칠해졌다. 유럽 전역이 인플레이션과 에너지 위기, 금리 인상이라는 삼중고에 시달리는 터라 각국 정부는 재정 확대를 통해 소비 및 투자 침체를 막아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섣불리 나섰다가는 영국처럼 호된 된서리를 맞을 판국이다.

요주의 대상은 2011년 남유럽 재정 위기를 불러왔던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 ‘PIGS’ 국가들을 비롯해 프랑스, 키프로스 등이다. 이들 국가는 GDP 대비 중앙정부 부채 비율이 영국과 마찬가지로 100%를 넘는다. 부채 증가 속도도 매우 빠르다. 영국은 팬데믹 사태 이전인 2019년 4분기부터 올해 1분기 사이 GDP 대비 부채 비율이 17.8%포인트 늘었는데, 스페인(19.1%포인트)과 이탈리아(18.4%포인트)는 부채 증가 속도가 이보다 더 빠르다. 부채 비율이 두 자릿수 증가한 프랑스(12.8%포인트)와 그리스(15.9%포인트)도 별로 나은 처지는 아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탈리아에 대한 불안감이 크다. 이탈리아는 GDP 대비 부채 비율이 148%에 달하고,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38%)도 높아서 재정 지출을 통한 에너지 비용 보전에 적극 나서고 있다. 지난 1년간 이탈리아 정부가 조성한 에너지 보조금 규모는 GDP의 3.3%인 592억유로(약 82조5000억원)로 영국·독일에 이어 셋째로 많다.

정치적 행보도 영국 신임 내각과 유사하다. 지난달 조기 총선을 통해 출범한 조르자 멜로니 내각은 높은 국가 부채 비율에도 자영업자 감세, 에너지 비용 보전 확대, 최저 연금수령액 인상 등 대대적인 재정 투입을 약속했다. 메리츠증권 이승훈 연구원은 “이탈리아 신임 내각의 정책이 영국과 마찬가지로 재정 건전성을 크게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되면 유로존의 정치·금융 리스크 지표로 간주되는 이탈리아-독일 10년물 국채 금리 차가 확대되고, 유로존 분열 우려가 재부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부채 비율 낮다고 안심할 수 없는 韓

이런 나라들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GDP 대비 부채 비율이 한참 낮고, 에너지 위기에 따른 보조금 지출을 걱정할 필요도 아직은 없다. 하지만 이번 영국 감세안 사태를 반면교사 삼을 대목이 적지 않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팬데믹 이후 부채가 늘어나는 속도가 매우 빠른 데다 무역수지 적자가 심화하고 원화 가치가 폭락하는 등 위기 신호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부채 비율은 팬데믹 이후 2년간(2020~2021년) 9.3%포인트(37.6%→46.9%) 늘었는데, 이는 팬데믹 이전 2년(1.6%포인트)과 비교해 6배나 빠른 속도다. 기준금리를 올리며 경기침체에 대응해야 하는 딜레마 역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이 처한 현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국가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을 생각하지 않고 무리한 경제 정책을 펴거나 재정·통화정책 간 엇박자를 냈다간 순식간에 영국 같은 곤욕을 치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영국 감세안 사태는 고물가와 저성장 사이에서 최적의 정책 조합을 찾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과제일 수 있다는 점을 전 세계에 일깨워준 상징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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