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이 내 생일에 보드카 20병 보내" 돌아온 베를루스코니 녹취록 파문
멜로니 총리 난감, 우파 연합 혼란
새 정부 출범을 앞둔 이탈리아에서 우파 연합의 핵심축 중 하나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86)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친분을 자랑하는 내용이 담긴 녹취가 공개돼 파장이 일고 있다.
라 레푸블리카, 코리에레 델라 세라, 라스탐파 등 이탈리아 주요 신문들은 19일(현지시간)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친푸틴 발언이 담긴 녹취 내용을 1면에 보도했다. 녹취는 이탈리아 통신사 라프레세가 전날 공개한 것이다.
녹취에서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자신이 이끄는 전진이탈리아(FI) 소속 의원들에게 “내 생일에 푸틴 대통령이 보드카 20병과 매우 다정한 편지를 보냈다”며 “나도 람부르스코(레드 스파클링 와인) 20병과 똑같이 다정한 편지로 화답했다. 난 그의 진정한 친구 5명 중 제일로 꼽혔다”고 말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생일은 9월 28일로 이탈리아 총선 나흘 뒤였다. 그는 “나는 푸틴 대통령과의 관계를 되살렸다”고 말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러시아 각료들은 우리가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자금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란 말을 여러 차례 했다”며 “언론에 유출되면 재앙이 될 거 같아서 (우크라이나 전쟁 및 무기 지원에 관한) 개인적 의견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매우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언론들은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발언으로 곧 새 내각을 출범시킬 우파 연합이 혼란에 빠졌다고 전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이탈리아에서 대표적인 친러시아·친푸틴 인사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총선을 사흘 앞둔 9월 22일 이탈리아 국영방송 라이 인터뷰에서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이우를 함락한 뒤 젤렌스키 정부를 괜찮은 사람들로 교체하고 돌아올 예정이었다”고 말했다.
차기 총리가 유력한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형제들(Fdl) 대표는 유럽연합(EU)와 함께 러시아에 강경한 입장을 유지할 것이라고 밝혀 왔다. 녹취가 공개된 이후 멜로니 총리는 Fdl 하원 원내 총무인 프란체스코 롤로브리지다는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발언과 무관하게 새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진이탈리아 측은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푸틴 대통령과의 몇 년 전 일화를 소개한 것”이라며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한 우리 당과 베를루스코니 대표의 입장은 잘 알려진 대로 유럽과 미국의 입장과 일치한다”고 해명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1990~2000년대 총리직을 3차례 맡았다. 2011년 경제위기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며 세번째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이후 한물간 정치인으로 평가받았지만 이번 총선에서 Fdl과 우파연합을 결성하고 지난달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상원의원에 9년 만에 복귀했다.
그는 정경유착, 부정부패, 방송장악, 미성년자 성매수, 탈세 등 온갖 추문에 휘말렸으며 성매수, 탈세 등에 대해서는 징역 7년을 선고받았으나 사면 등을 적용받아 감형 뒤 사회봉사로 형을 대신했다. 2014년 미성년자 성매수 관련 재판에서 위증 교사한 의혹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번 총선 승리 후 외교장관 등 장관직 5∼6개를 요구했다가 거부당하자 상원의장 선출 투표를 보이콧하고 멜로니 대표를 ‘고압적’이고 ‘잘 지낼 수 없는 사람’이라고 적은 메모를 작성한 사실이 드러나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지난 17일 멜로니 대표를 직접 방문하면서 양측은 표면적으로 관계를 봉합했지만, 이번 녹취록 파문으로 둘의 사이는 더욱 껄끄러워질 것으로 현지 언론들은 전망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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