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리스 할머니 그윽한 노랫소리 그립네!

한겨레 2022. 10. 19.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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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박성훈의 브루더호프 이야기]부르더호프 공동체 장례식
마릴리스 할머니의 장례식. 부르더호프 공동체 제공

가을 햇살이 눈 부신 아침, 공동체 마당에 브라스밴드의 음악이 울려 퍼집니다. 오늘은 마릴리스 할머니의 장례식날입니다. 마릴리스 할머니는 타고난 천재 음악가로 공동체 구성원들이 자주 부르는 주옥같은 곡을 많이 만드셨는데, 브라스밴드가 할머니가 살아생전 작곡한 노래를 연주하고 있고, 마을 길가에는 마지막으로 할머니에게 인사하기 위해 공동체 모든 식구가 모여 할머니 관이 지난 것을 배웅하고 있습니다. 저도 할머니를 배웅하기 위해 길 한쪽에 서자 초등학교 2학년인 리디아가 제게 예쁜 아기 사진을 보여 줍니다.

“ 제 여동생이 태어났어요. 이름은 메시예요.”

야곱의 천국의 계단으로 마릴리스 할머니는 올라가시고 예쁜 아기 메시는 천사와 함께 이 땅으로 내려왔네요.

마릴리스 할머니. 부르더호프 공동체 제공

마릴리스 할머니는 음악가 가족에게서 태어나셔서 6살 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우셨고,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셨습니다. 남편과 함께 1960년대 브루더호프에 합류하시면서 수많은 노래를 작곡하시고 형제들과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쳤습니다. 할머니의 노래는 칸타타뿐만 아니라 깊은 울림을 주는 찬양과 자연을 찬미하는 노래, 아이들을 위한 재미있는 노래 등 모든 영역을 망라합니다. 그뿐 아니라 악기를 가르치시기도 하셨는데, 딸에게 첼로를 가르칠 때는 함께 책을 사서 공부하면서 첼로 켜는 법을 가르치시고, 오케스트라에 트롬본이나 다른 악기들이 필요하면 독학해서 교재를 만드시고 형제들을 가르치셨습니다. 할머니가 작곡하신 곡들은 마음 깊이 감명을 주는 곡들이 많아 제 아내가 공동체 노래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면 할머니의 곡을 제일 먼저 번역하곤 합니다.

마릴리스 할머니. 부르더호프 공동체 제공
마릴리스 할머니. 부르더호프 공동체 제공

할머니께서는 연세가 구순이 넘으셨어도 피아노를 멋지게 치시고, 작곡을 계속해 2년 전에는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작곡해 직접 공동체 오케스트라를 멋지게 지휘하셨습니다.

제 아내는 몇 년간 오후에 할머니를 돌보았는데 우리 공동체에서는 장애인이나 노인이 있는 집에는 가족들만 그분들을 돌보게 하지 않습니다. 가족들만 돌본다면 가족들은 곧 지치고 말 것입니다. 심지어는 핏줄이 아닌 다른 가족이 돌보는 사례도 종종 있고, 전담으로 돌보는 가족 외에도 오전이나 오후 다른 형제자매들이 돌보아 서로의 짐을 나누게 합니다. 사실 이러한 분들을 돌보는 것은 우리들의 특권이며 이분들은 우리들의 영혼을 돌보는 것입니다.

마릴리스 할머니는 손자 부부와 두명의 싱글 자매가 할머니를 전담으로 돌보고 오전이나 오후 일하는 시간에는 다른 자매들이 돌봅니다. 밤에는 몇몇 젊은 자매들이 돌아가며 할머니 곁에서 자며 돌봐 왔습니다.

마릴리스 할머니의 장례 행렬. 부르더호프 공동체 제공

할머니는 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충만한 삶을 사셨습니다. 할머니께서는 90살이 지났어도 얼마나 열정이 넘치시는지 매일 공장에 나와 할머니를 위해 준비된 일들을 깔끔하게 해내셨습니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 다 되어도 일이 다 끝나지 않았으면 마저 끝내고, 몸이 편찮으시지 않은 이상 공장에 조금이라도 늦게 가는 걸 싫어하셨습니다. 가끔 손님들이 공동체를 방문해 우리 공장을 견학할 때가 있는데, 손님들이 처음에 놀라는 일은 마릴리스 할머니가 공장 한쪽에서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입니다.

“할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구십이 넘었다우.” 마릴리스 할머니는 아주 자랑스럽게 말씀하십니다.

“어머나 세상에…. 연세도 많으신데 힘들지 않으세요?”

“힘 들다니, 하루하루가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우. 이렇게 일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야.”

부르더호프 공동체 제공
부르더호프 공동체 제공

할머니의 집 창가에는 예쁜 아프리칸 바이올렛 화분이 많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여러 종류의 아프리칸 바이올렛 잎을 잘라 화분에 심고는 몇 달간 정성스럽게 길러 마침내 꽃이 피면 생일 맞은 자매들에게 선물하곤 하셨습니다. 일하는 중간 쉬는 시간에도 틈틈이 뜨개질을 하셔서 공동체에서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의 신발을 손수 짜서 선물로 주셨는데, 그동안 할머니에게서 신발을 받은 아기들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부르더호프 공동체 제공

제 아내는 한동안 할머니에게서 영어책 읽는 레슨을 받았는데 할머니는 <초원의 집>을 지은 로라 잉걸스의 책들을 도서관에서 빌려 오셔서 제 아내의 발음을 고쳐 주셨습니다. 할머니는 이 시간을 너무나 즐거워하셨고 어쩌다 한 번 레슨에 아내가 빠질 것 같으면 매우 아쉬워하셨습니다. 제 아내도 한국에 있을 때 티브이(TV)로만 보던 드라마 ‘초원의 집’을 할머니 덕분에 책으로 만나 원작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저녁에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유빈이에게 읽어주니 유빈이도 좋아하며 ‘초원의 집’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던 날 오후까지도 할머니를 돌보는 자매에게 카드게임을 가르쳐 주셨는데 저녁이 되자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할머니 주위에는 이안 할아버지와 할머니 가족들이 둘러 앉아 계속 찬양을 불렀습니다. 할머니께서는 그동안 할머니를 돌봐 왔던 자매의 손을 꽉 잡고는 이 땅에서의 마지막 쉼을 쉬셨습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뵈러 할머니 집에 갔습니다. 할머니는 얼마전 96세 생신을 맞이해 새로 받은 드레스를 입은 채 침대에 평안한 얼굴로 누워 계셨습니다. 보통 이곳에서는 자매님들이 돌아가시면 손에 예쁜 꽃이 쥐어져 있는데 할머니 손에는 조카로 시작해 에이스 하트 등 500게임에서 최고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카드가 쥐어져 있어 할머니에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모든 조문객들에게 웃음을 주셨습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자 할머니의 증손자 브래튼이 속삭입니다.

“이제 할머니는 바하를 만날 수 있나요?”

몇 년전 할머니께서 미팅 때 형제들에게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여러분과 새로운 하루를 함께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들에게 다가가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도움과 사랑을 보일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모릅니다. 나는 삶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집으로 부르시는 날이면 언제든지 기쁘게 갈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감사하며 이러한 마음이 절대 나를 떠나지 않길 바랍니다.”

글 박성훈 형제(부르더호프 공동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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