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64>연구학원도시 막전막후
“전 실장, 연구학원도시(현 대덕연구개발특구) 건설 계획안 수립에 최선을 다해 주시오. 한국 과학기술의 미래가 걸린 일이오.” 1973년 3월 5일.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은 신임 전상근 과학기술처 종합기획실장(현 삼전복지재단 이사장)에게 이같이 지시했다. 연구학원도시 건설은 과학기술처의 최대 숙원사업이었다. 최 장관의 지시는 짧았지만 이 일은 태산을 옮기는 일만큼 어려운 과제였다. 당시 과학기술처는 연구학원도시 건설을 위해 조직을 개편해서 연구조정실을 폐지하고 종합기획실을 신설했다. 기획실은 1급 별정직 실장 아래 과학기술 심의관과 종합계획관, 인력계획관, 기술개발관, 정보관리관, 자원개발관 등 국장급인 2급 이상만 20여명에 이르는 매머드급 부서였다.
최형섭 장관의 회고. “중화학공업 기술 지원을 위해 전자와 기계 등 5대 전략산업 기술별로 전문화한 연구기관의 설립이 필요했다. 연구학원도시 건설 기본계획을 수립하면서 세계 각국의 대표적인 연구단지 건설 개별 형태와 운영 등을 조사 연구하고, 이를 우리 여건과 비교 검토했다. 연구학원도시 건설 이념은 국가발전을 위한 과학기술의 효율적인 개발과 전 국민 과학화에 두고 시작부터 범국가적 차원에서 추진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따라서 연구학원도시는 우리나라 산업단지에 대한 기술 지원이 쉽도록 나라 중앙에 위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한국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두뇌 역할을 담당하는 지적공동체로서 완벽한 조건을 갖춘 연구학원도시로 건설한다는 원칙을 처음부터 정했다.”(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전상근 실장은 최 장관의 지시에 따라 연구학원도시 건설 세부안 마련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전 실장은 과학기술처가 이덕선 경제과학심의회 서기관에게 의뢰해서 제출받은 '연구교육단지 조성 종합계획' 조사보고서를 면밀하게 재검토했다. 동시에 그동안 연구학원도시 업무를 담당하던 권원기 종합계획관과 함께 건설계획안을 원점에서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전상근 실장의 증언. “연구학원도시 건설은 한국 과학기술 재도약을 위한 미래 꿈이었다. 가장 먼저 연구학원도시 조성 규모를 정하고 그곳에 입주한 연구기관과 도시 형태, 입지 선정 기준 등을 수립키로 했다. 다음으로 투자 규모와 사업 추진 방법 등에 대한 계획 시안을 만들기로 했다. 이렇게 마련한 시안은 관련 부처 장관이 배석한 가운데 대통령에게 보고한 뒤 그 자리에서 대통령 승인과 지시를 받는다는 방침을 정했다. 이 방안은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전상근 실장은 이런 추진 방안을 최형섭 장관에게 보고해서 승인을 받았다. 전 실장은 먼저 도시계획 전문가인 김형만 박사를 만났다. 김 박사는 국내 대표적인 도시계획 전문가로, 호주 시드니대에서 도시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해외과학자 유치에 따라 귀국했다. 국토건설종합계획심의회 상임위원과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KIST) 도시계획연구실장을 지낸 바 있어 최형섭 장관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김 박사는 이후 국민대 교수와 홍익대 도시계획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서울시 도시계획에도 관여했다. 그런 만큼 김 박사는 누구보다 연구학원도시 건설 이념과 기본 구상에 대해 잘 이해했다.
전상근 실장은 김 박사에게 연구학원도시 건설 추진 과정과 계획을 설명했다. “김 박사,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 계셨으니 연구소 생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줄 압니다. 이번에 김 박사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연구학원도시를 한번 자유롭게 구상해 주십시오.”
전상근 실장은 김 박사의 업무 파트너로 권원기 종합계획관과 서정만 과장을 지명하고 실무 작업을 맡겼다. 그로부터 1개월여 후인 1973년 4월 말. 연구학원도시 건설 1차 시안이 나왔다. 김 박사와 권 종합계획관, 서 과장 등이 밤을 새워 가며 지혜를 모아 만든 안이었다. 가장 큰 관심사는 도시가 들어설 후보지였다.
과학기술처는 입주 지역 선정 기준으로 세 가지 원칙을 정했다. △지역은 서울에 있는 대학과 연구기관, 지방 중화학공업단지가 유기적으로 연계할 수 있도록 국토 중심부에 위치할 것 △계획 면적 350만~500만평 부지 조성이 가능한 지역 △교통과 용수, 전기 등 도시 기반 조성 비용이 적게 들고 땅값이 저렴한 지역 등이었다. 이런 기준에 따라 도시 후보지로 서울과 근접한 거리에 있는 충남 대덕(유성, 탄동, 구축면), 경기 화성(판탄면), 충북 청원(강내, 강서, 남이면) 등 세 곳을 정했다. 충남도·경기도·충북도 추천도 받았다.
권원기 계획관 등은 외국 연구학원도시 건설 배경과 형태, 운영 등에 대한 조사 분석도 했다. 그 결과 이들 도시는 한국과 건설 목적이 달랐다. 일본 쓰쿠바 연구학원도시는 1차 건설 목적이 수도권 인구와 시설 분산에 있었다.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연구학원도시는 미개척지인 시베리아 개발이 건설의 주목적이었다.
한국은 이들과 달리 과학 입국을 향한 과학기술의 효과적인 개발과 전 국민 과학화가 건설 이념이었다. 도시 입지도 국토 중심부에 자리 잡고 앞으로 우리나라 과학기술 두뇌 역할을 담당하는 세계 수준의 '두뇌 도시 건설'을 목표로 했다.
과학기술처는 연구학원도시 기본 구상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첫째 과학공원 도시답게 녹지와 자연 환경을 최대한 보전하고, 건축 및 구조물도 조화롭게 배치하며, 공해와 담장이 없는 도시 조성을 지향한다. 둘째 '테크노밸리'로서 인적 교류, 정보 교환, 협동 연구 체제를 조성하기 위해 연구기관을 계열별(전자. 기계. 화학 등)로 배치하고 '대덕클럽'과 같은 만남의 문화공간을 구상한다. 셋째 과학기술 두뇌 도시답게 직장과 주거 지역을 인접 배치해서 주간 인구와 야간 인구의 심한 편차에서 오는 단지 공백을 방지하고, 생활하면서 연구하는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단지'를 조성한다.
이 같은 연구학원도시 건설에는 당연히 많은 예산이 들어가기 때문에 경제기획원의 협조가 최대 관건이었다. 하지만 재정을 담당한 경제기획원은 이런 대규모 투자 사업에 소극적이었다. 당시는 산업개발 시대였기 때문에 대통령의 지시가 유난히 많았고, 대통령 지시사항이라 해도 우선순위에서 밀리면 예산 지원은 불가능했다.
과학기술처는 추진 전략을 검토했다. 그 결과 엄청난 예산이 들어가는 연구학원도시 건설을 관계부처의 협조를 받아 진행하는 상향식보다는 대통령 지시사업으로 추진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문제는 대통령 대면 보고회 일정을 잡는 일이었다. 그러려면 청와대 담당 수석을 움직여야 했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 수석의 파워는 막강했다.
전상근 당시 실장의 회고. “가장 큰 문제는 대통령 앞에서 브리핑하는 일자를 잡는 일이었다. 당시 정부 각 부처의 중요한 사업을 최종 결정하는 일은 청와대 비서실 각 분야 담당 수석비서관들이 했다. 굳이 경제 부총리나 총리를 거치지 않고 청와대 수석을 통해 대통령에게 보고해서 재가받기만 하면 문턱 높은 경제기획원 예산국에 가서 머리를 조아릴 필요 없이 예산을 확보할 수 있었다. 우리는 대통령 앞에서 사업과 예산에 관해 브리핑할 날짜를 잡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당시 과학기술처를 관장하던 청와대 수석은 정소영 경제1수석 비서관이었다. 정 수석의 보좌관이 김적교 박사였다. 전상근 실장은 안면이 있던 김 박사를 찾아가 '연구학원도시 건설 계획을 설명하고 대통령에게 브리핑할 기회를 마련해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다. 김 박사는 권원기 계획관과 경제기획원에서 함께 근무한 동료로, 막역한 사이였다.
권원기 전 차관의 회고. “나는 김 박사를 만나 연구학원도시 건설계획을 설명하고 조속히 대통령에게 브리핑 일정을 잡아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김 박사는 내 뜻을 이해하고 업무 협의를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면서 정소영 수석을 설득하는 일에도 적극 나섰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청와대에서 대통령 주재로 연구학원도시 건설을 위한 관계부처 회의 일정이 잡혔다. 나는 이 일을 추진하면서 어떤 일을 하건 인간관계가 매우 중요하다는 교훈을 새삼 되새겼다.”(과학한국 그 꿈을 위한 선택)
1973년 5월 중순. 청와대 비서실에서 과학기술처로 전화가 걸려 왔다. 경제수석실 김병원 과학담당비서관이었다. 연구학원도시 건설에 대한 대통령 보고 일자를 확정했다는 반가운 전화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완벽한 계획안 보고였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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