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왕비릉 이장을 위해 조말생 묘를 강제로 옮기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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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0월 13일 대한제국을 선포한 광무제 고종은 일주일 뒤 경사를 맞았다. 10월 20일 궁인 엄씨가 러시아공사관에서 잉태했던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이 아들이 영왕 이은이다. 고종은 이틀 뒤 엄씨를 귀인(貴人)으로 봉작했다. 또 나흘이 지난 10월 26일 사간원 정언을 지낸 현동건이 ‘오늘날 급선무는 인재 등용과 군사 양성과 학문 진흥’이라고 상소했다. 고종은 “잘 알았다”고 비답을 내렸다.(1897년 10월 26일 ‘고종실록’) 한 달이 갓 지난 11월 21일, 고종은 2년 전 일본인들에 의해 살해된 왕비 민씨 장례식을 치렀다. 황궁인 경운궁을 떠난 상여는 이날 청량리 홍릉으로 가서 의식이 치러졌다.
그러나 왕비 민씨는 편히 쉬지 못했다. 3년 뒤 남편 고종이 청량리 장지가 명당이 아니라며 이장을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장할 장소가 수시로 바뀌는가 하면 이장할 날짜도 계속 연기되더니 결국 1919년 고종이 죽고 나서야 왕비릉은 경기도 남양주 금곡리로 천장되고 남편 고종도 합장됐다. 그 사이에 금곡리에 있던 무덤 2만여 기는 강제로 전국으로 이장돼 버렸고, 나라는 사라져 버렸다. 이 블랙코미디 이야기다.
엄혹했던, 그리고 어이없던 세월
1894년 청일전쟁에서 참패한 청나라는 급속도로 몰락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청나라를 침몰시킨 일본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로 통치됐던 세상은 바야흐로 정글로 변하고 있었다. 힘센 놈은 스스로를 정의라고 불렀고, 약한 자들은 이를 갈며 고개를 숙이는 그런 세상. 그러했다.
그런데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부터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까지 대한제국 정부가 각종 국장(國葬)에 사용한 국가 예산이 213만6000원이었다. (이윤상, ‘1894~1910년 재정 제도와 운영의 변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논문, 1996, p141) 참고로 1900년도 대한제국 세출예산은 616만2796원이었다.(김대준, ‘고종시대의 국가재정 연구’, 태학사, 2004, p129)
왕비 민씨 국장, 헌종 왕비 국장, 황태자비 국장이 이 8년 사이에 치러졌다. 한 해 예산의 3분의 1을 각종 장례식에 사용했으니, 제국 선포 직후 현동건이 제시한 세 가지 급선무와는 많이 동떨어진 세금 운용 방식이다. 여기에는 1902년 청량리에 묻혔던 왕비 민씨를 이장하기 위해 사용된 45만원이 포함돼 있었다.
“왕비릉 풍수가 나빠 나라가 이 꼴”
민비가 청량리에 묻히고 2년이 못 돼 왕비릉을 옮긴다는 소문이 돌았다. 1899년 봄에는 홍릉을 경기도 광주로 옮긴다는 풍문이 돌았다.(1899년 3월 17일 ‘제국신문’) 그런데 제국 정부는 홍릉 석물을 5만원을 들여 보수하고 동대문에서 홍릉까지 도로를 넓히고 개천도 준설해 청량리 홍릉까지 황제가 왕래하는 데 만전을 기했다.(1899년 4월 12일 ‘제국신문’) 소문은 소문으로 그치는 듯했지만, 제국신문 보도 다음 날 궁내 소식에 정통한 ‘황성신문’은 ‘천릉 후보지는 수원 용주사와 양주 차유고개[車踰峴·차유현]와 광주산성 가운데 용주사가 내정됐다’고 보도했다.(1899년 4월 13일 ‘황성신문’)
그리고 해를 넘긴 1900년 2월 27일 ‘황성신문’은 ‘민영준씨가 능지(陵地)를 보러 갔는데, 양주 금곡으로 결정될 듯’이라고 특종을 터뜨렸다. 훗날 민영휘로 개명한 민영준은 당시 궁중 의례를 담당하는 장례원경이었다. 마침내 6월 21일 궁내부 특진관인 종친 이재순이 공식적으로 왕비릉 이장 문제를 꺼냈다. “모두가 홍릉이 완전무결한 길지가 아니라고 하니, 억만년토록 국가의 기반이 매우 공고해지도록 홍릉을 옮기소서.” 고종은 이리 답했다. “오래전부터 논의가 있었지만 처리하지 못했다. 효성 깊은 동궁이 밤낮으로 애를 태우니, 신중히 결정하리라.”(1900년 음5월 25일(양 6월 21일) ‘승정원일기’) 사흘 뒤 청량리 홍릉을 점검한 관리들이 ‘과연 홍릉은 명당이 못 된다’고 보고했다. 고종은 “시간이 없어서 임시로 쓴 묫자리”라며 “풍수가와 조정 논의가 동일하니, 홍릉을 이장한다”고 선언했다.(1900년 6월 24일 ‘고종실록’) 비극적으로 죽은 왕비 능이 국가 운명을 저해하고 있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금곡리에서 군장리로 바뀐 길지
7월 11일 전국 주요 길지 27군데를 답사한 관리들이 고종에게 후보지 네 군데를 보고했다. 양주에 있는 금곡리와 군장리, 차유고개와 화접동이 그 후보지였다. 8월 24일 이 가운데 금곡리가 최종 천장지로 확정됐다.
9월 1일 홍릉 천장 날짜가 확정됐다. ‘음력 8월 17일 천장을 개시. 윤8월 9일 풀을 베고 흙을 파냄. 8월 22일 관 자리 위에 움막 설치. 9월 19일 7척 깊이로 땅을 파냄. 10월 12일 서쪽 방향부터 관을 꺼내 15일 발인’ 등등. 옛 왕릉과 새 왕릉에 상여를 놓을 방위까지 모두 정해놓았다.(1900년 9월 1일 ‘고종실록’)
그런데 열하루 뒤 금곡리 묘터가 길지가 아니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왕릉으로 꺼려야 하는 두 가지 지형지물이 있다는 것이다. 고종은 “새 묫자리를 고르라”고 명했다.(1900년 9월 12일 ‘고종실록’)
10월 15일 새 묫자리를 고르고 온 관리들이 군장리와 장안리와 팔곡산이 길지라고 보고했다. 사흘 뒤 관리들은 금곡리 옆 군장리가 상길지라고 보고했다. 10월 29일 군장리에 왕릉 예정지임을 알리는 봉표가 세워졌다. 10월 30일 작업을 마친 관리들에게 고종이 물었다. “(태조 이성계 능인) 건원릉보다 높던가?” 관리들이 답했다. “높지는 않으나 존엄한 기상이 있습니다.” 고종이 이렇게 말했다. “이제 길조를 얻었으니 매우매우 기쁘고 행복하구나(今得吉兆萬萬喜幸矣)!”(’홍릉천봉산릉주감의궤·洪陵遷奉山陵主監儀軌')
횡액을 만난 무덤 2만 기
그런데 고종은 원래 예정했던 금곡리도 놓으려 하지 않았다. 새 묫자리 선정 작업이 한창인 9월 21일 고종이 조령을 내렸다. 내용은 이러했다. ‘금곡리 새 능의 경계에 있는 무덤들을 모두 옮겨라.’(1900년 9월 21일 ‘고종실록’)
금곡리 예정지에 있는 무덤은 모두 2만 기가 넘었다.(황현, ‘국역 매천야록’ 3권 1900년 3.금곡 신릉 철도 개설과 신서선묘의 발굴, 국사편찬위) 확정도 안 된 왕릉 이장으로 옛 무덤들이 횡액(橫厄)을 만난 것이다. 무덤 주인들 가운데에는 세종 막내아들 영응대군 부부를 비롯한 왕실 종친들이 셀 수 없었고 세종 때 문신인 조말생과 양주 조씨 문중 묘 110기가 포함돼 있었다. 고종은 이들 후손에게 대토(代土)를 내주고 이장 비용과 제사 비용을 대주라고 명했다.
영응대군 부부묘는 경기도 현 시흥 땅으로 이장됐다. 양주 조씨 조말생 문중은 현 남양주 수석동에 땅을 하사받고 조말생 묘를 옮겼다. 다른 조씨 문중묘들은 전국으로 흩어져 이장됐다.
수석동 조말생 새 묫자리에는 석실서원이 있었다.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했던 김상헌 문중 서원인데,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된 서원이다. 그러니까 아버지 대원군이 비워놓은 땅을 아들 고종이 조말생 묫자리로 내준 것이다. 다음은 실록에 기록된 당시 묘를 이장 당한 왕실 및 공신 명단이다.
정정옹주(貞靜翁主) 부부: 태종 일곱째 딸
숙혜옹주(淑惠翁主) 부부: 태종 아홉째 딸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 부부: 세종 막내 적자
의창군(義昌君) 이공: 세종 서출 10남 2녀 중 3왕자
금계정(錦溪正) 이기: 의창군 이공 아들
금성도정(錦城都正) 이위: 의창군 이공 아들
동성군(東城君) 이순: 의창군 이공 아들
사산군(蛇山君) 이호: 의창군 이공 아들
능천군(綾川君) 구수영: 세종 막내 영응대군 이염 사위
호양공(胡襄公) 구치홍: 구수영 아버지
문강공(文剛公): 조말생 세종 때 문신
안양군(安陽君) 이항 부부: 성종 셋째 아들
효순공주(孝順公主) 부부: 중종 딸
신용개(申用漑): 중종 때 문신. 신숙주 손자.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 부부: 선조 장인(의인왕후 아버지)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 부부: 인조 아버지 정원군 장인(추존 인헌왕후 아버지)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 구굉: 인조 외삼촌. 구사맹 아들.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 구인후: 인조 외사촌 형. 구사맹 손자.
능풍부원군(綾豐府院君) 구인기: 인조 외사촌 동생. 구사맹 손자.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 부부: 인조 장인(계비 장렬왕후 아버지)
그러니까 왕비 이장을 위해 개국 때부터 인조 때까지 역대 왕자와 공주, 왕비 아버지와 공신들을 떼로 금곡리에서 몰아냈으니 조선왕조 500년 사상 참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날벼락 맞은 이괄 문중묘
그 과정에서 횡액을 만난 문중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수석동 골짜기에 있던 이괄 문중 묘들이다. 1624년 인조 때 난을 일으켜 처형된 이괄 문중 무덤이 이곳에 있었다. 세간의 주목을 끌까 쉬쉬하고 있던 주민들은 이 묘들을 파묘하고 석물들을 골짜기 아래로 던져버렸다. 큰 비석은 80여년 전 마을 앞에 콘크리트 다리를 만들 때 교각 아래 파묻고 시멘트를 발라버렸다.(남양주문화원, ‘석실서원 지표 및 문헌조사’, 1998, pp.93, 94) 골짜기에는 석물들이 자빠져 있지만 비석 위에 만든 다리 자리에는 큰 교회가 들어서 찾을 길이 없다.
멸망 9년 뒤에야 이장된 홍릉
금곡리 무덤들을 다 철거하고, 군장리로 장지를 확정한 뒤 또 변고가 벌어졌다. 1901년 4월 10일 무덤 공사를 벌이던 군장리 묘터가 온통 바위투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노발대발한 고종은 “묫자리를 정한 지관들을 몽땅 처벌하라”고 명했다.(1901년 4월 12, 13일 ‘고종실록’) 그달 21일 고종은 양주 각지를 살피고 온 관료들 의견을 따라 원래 예정지였던 금곡리를 최종 천장지로 ‘영원히’ 확정했다.
이후 수시로 청량리 홍릉 이장 날짜가 정해지고 천장 작업이 개시됐다. 하지만 ‘날짜가 맞지 않고’ ‘나라가 사라지고’(1905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는’(1907년) 등 사건이 발생하면서 실행은 되지 않았다. 그러다 1919년 고종이 죽고 나서야 금곡리로 청량리 홍릉 천장이 실행에 옮겨졌다. 그래서 고종은 왕비 민씨와 금곡 홍릉에 잠들어 있다.
꺼지지 않은 향불
3년이 지난 1922년 12월 홍릉 능참봉을 자처했던 고영근이 고종 묘호가 새겨져 있지 않은 채 누워 있던 비석에 ‘高宗太皇帝(고종태황제)’를 새겨넣고 비석을 바로세웠다.(1922년 12월 13일 ‘조선일보’) 고영근은 민비를 살해한 우범선을 일본에서 암살한 인물이다. 해방 2년 전인 1943년 6월 30일 일본에 있던 영친왕이 금곡 홍릉을 참배했다. 신분은 순종을 이은 조선 이왕(李王)이었다. 나라는 사라졌는데, 전주 이씨 향불은 꺼지지 않은 것이다.(1943년 7월 1일 ‘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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