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속도를 기다려주는 동네가 있다면..노원의 '돌봄 공동체' 실험[투명장벽의 도시④]

김보미 기자 2022. 10. 18.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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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1일 서울 노원구 상계동 상계주공7단지 공터에서 할머니 10여명이 ‘바르게 걷기’를 참가해 아파트 사잇길을 걷고 있다. 화요일과 목요일 오전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고령층이 모여 함께 단지를 걷는다. 운동하고 이웃과 만나 소통하는 날이다. 강윤중 기자
지난 9월1일 서울 노원구 상계동 상계주공7단지 공터에서 할머니 10여명이 ‘바르게 걷기’를 참가해 아파트 사잇길을 걷고 있다. 화요일과 목요일 오전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고령층이 모여 함께 단지를 걷는다. 운동하고 이웃과 만나 소통하는 날이다. 강윤중 기자

“어머, 영주 언니 어서 오세요.” “이런 이쁜 옷은 어디서 사?” “나는 그냥 입는디 옛날부터 어디 가면 코디를 잘하고 나온디야.(웃음)” “운동하는 날짜 안 까먹었네?” “딸이 아침에 전화해서 알려줬어.”

지난 9월1일 초가을 볕이 화창하던 오전 서울 노원구 상계동 상계주공7단지 공터에 할머니 10여명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안부 확인이 끝나자 이 모임을 이끄는 조복님 상계10동 ‘어르신휴센터장’을 따라 몸을 풀었다.

“어깨를 크게 돌려보셔요. 아이고, 잘한다. 배에 힘도 꽉 주고요. 오늘 ‘몸이 안 좋다’ 싶으면 하지 마세요. 자, 이제 출발합니다. 본인 자세가 어떤지 생각하면서 걷는 거예요. 하나, 둘.”

무더웠던 여름철보다 햇볕은 한풀 꺾였어도 걷기 시작하니 금방 땀이 났지만 할머니들은 아파트 사잇길을 따라 40여분을 쉬었다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무리를 따라가지 못한 대여섯은 다른 한쪽에서 ‘건강 리더’의 도움으로 50m 남짓의 길을 아주 느린 속도로 오갔다.

지난 9월1일 서울 노원구 상계동 상계주공7단지 공터에서 할머니 10여명이 ‘바르게 걷기’를 참가해 아파트 사잇길을 걷고 있다. 화요일과 목요일 오전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고령층이 모여 함께 단지를 걷는다. 운동하고 이웃과 만나 소통하는 날이다. 김보미 기자

화요일과 목요일 아침 9시 반. 매주 두 번씩 함께 걷는 이들은 한 아파트 주민이다. 대부분 80대 고령 여성들이다. 어르신휴센터는 노원 주민들이 만든 돌봄 공동체다. 지역에서 20년 넘게 활동한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함께걸음’이 구심점이 돼 뜻이 맞는 이들이 모였다.

40~70대 아직 덜 나이가 든 주민이 ‘건강 리더’를 맡아 소모임을 꾸리면 70~90대 더 나이 든 주민들이 참여한다. ‘바르게 걷기’ ‘요리 교실’ ‘만들기’ ‘보드게임’ ‘한글 교실’ 등 모임은 다양하다. 2019년 서울시의 지원으로 시작해 올해부터는 노원구의 재정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모임의 기획부터 실행, 참여자 모집과 관리까지 모두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진다.

휴센터 사업단장인 강봉심 함께걸음 이사는 “동네에서 늙어 가기 위한 실험”이라고 정의했다.

“식사, 취침할 때는 전문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더라도 나머지 노인의 일상을 마을이 맡아 돌본다면 어떨까요? 가장 편하고 익숙한 내 집에서 행복하게 마지막을 맞을 수 있지 않겠어요?”

지난 9월1일 서울 노원구 상계동 상계주공7단지 공터에서 ‘바르게 걷기’를 참가한 할머니들이 함께 걷고 난 뒤 몸을 풀고 있다. 강윤중 기자
서울 노원구 상계주공7단지 ‘어르신 휴센터’ 프로그램에 참여한 노인들이 단지 내를 걸은 뒤 몸을 풀고 있다. 강윤중 기자

서울도 시민들을 나이순으로 줄 세우면 정중앙에 42.8세가 있다. 서울 중위연령은 1975년 21.4세, 2005년 34.3세로 빠르게 높아져 2035년이면 지천명, 2050년 55.4세가 된다. 서울의 65세 이상 고령층 인구 비중은 현재 17.4%다. 노원 전체의 고령화율은 서울 평균치 수준(17.2%)으로 25개 자치구 중에서는 10위다. 하지만 주공아파트를 중심으로 혼자 사는 노인 가구 비율이 높다. 지역 1인 가구의 30%가 만 65세 이상의 고령층이다.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해지면 요양병원에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공간에서 노후를 보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어르신휴센터는 살던 집에서 이웃과 서로 말벗으로 지내는 노년이 목표라고 했다. 서로를 돌보려면 우선 서로를 알아야 한다.

소모임 ‘바르게 걷기’는 굳은 몸을 움직이는 시간이면서 오랜 세월 얼굴만 알고 지낸 이웃과 말을 트고 관계를 만드는 계기가 됐다. 2년여를 함께 걸으니 혼자 사는 이가 나오지 않으면 집으로 찾아가고,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면 보살피러 간다. 함께 걷다 갑자기 길을 못 찾는 어르신을 가족에게 알려 인지장애 검사를 받게 한 일도 있다. 강 이사는 “우울 지수가 너무 높아도 인지장애, 치매 진단을 받을 수 있어 혼자 사는 어르신은 항상 살핀다”고 전했다.

지난 9월1일 서울 노원구 중계동 중계주공2단지 할아버지 5명이 ‘꽃할배 요리교실’에서 동그랑땡과 애호박전을 부치고 있다. 매주 목요일 같은 아파트에 사는 고령층이 모여 음식을 만들고 나눠 먹는다. 강윤중 기자
추석을 앞두고 ‘꽃할배 요리교실’에서 참여한 고령층 주민들이 동그랑땡을 직접 빚어 부쳤다. 할아버지들이 만든 인생 첫 명절 음식이다. 강윤중 기자

할머니들이 동네를 걷고 있던 시각 중계동 중계주공2단지 아파트의 한 1층 집에선 할아버지 5명이 호박전, 동그랑땡을 부치고 있었다. 목요일마다 열리는 ‘꽃할배 요리 교실’의 여섯 번째 시간은 추석을 앞두고 할아버지들이 생애 첫 명절 음식을 만들었다.

“불이 너무 약해.” “아이고, 탄다니까.” “지글지글 소리가 나야지. 속은 익어야 하잖소.”

요리교실의 최고령 형님 나병열씨(93)가 옥신각신하며 전을 부치는 서상목(81)·서희석씨(83)를 흐뭇하게 바라본다. 두 번째 모임까지도 서로 말 한마디 섞지 않던 두 사람이 이제 한껏 친해진 모습이기 때문이다.

다 부친 전을 함께 맛본 뒤 각자 가져온 도시락통에 나눠 쌌다. 제대로 식사를 차려 본 경험이 없는 고령 남성들의 생존을 위해 마련된 이 모임은 기력이 없으면 밥을 끓여 한 끼를 때우고 마는 어르신들의 영양을 관리하는 목적도 있다.

요리를 마무리하고 모임 진행을 돕는 건강 리더들이 집을 치우자 김송자 선생님(87)이 이끄는 한글 교실 시간이 시작됐다. 국어 교사였던 김 선생님에게 한 동네 주민인 이귀득(81)·신배순(80)·김춘례씨(64)가 글을 배운다. 걸을 땐 보행 보조기가 필요한 김 선생님은 글을 가르칠 때만큼은 날아다닌다.

“누가 미음을 그렇게 쓰라고 했습니까. 획순을 지켜야 존경받아요.” “어떻게든 서울만 가면 되는 거 아니에요?” “글씨 쓰는 데서는 아니야.”

김 선생님의 단호한 꾸지람에 신씨가 얼른 글씨를 고쳐 쓴다. 젊은 리더뿐 아니라 김 선생님처럼 재능을 살려서 모임을 직접 운영하는 어르신들도 있다. 한글을 읽을 줄은 알아도 쓰지는 못했던 할머니 학생들이 요즘 가장 기쁜 것은 유튜브에서 영상 검색이 가능해진 것이다.

서울 노원구 중계동의 한 아파트에서 김송자 선생님이 이끄는 한글 교실 시간이 됐다. 국어 교사였던 김 선생님에게 한동네 주민들이 글을 배운다. 걸을 땐 보행 보조기가 필요한 김 선생님은 글을 가르칠 때만큼은 날아다닌다. 김보미 기자
할머니들의 한글 교실은 지난 수업에서 배운 것을 받아쓰기로 복습하며 시작된다. 김보미 기자

“검색창에 ‘반찬’이라고 써 보세요.” “진짜 다 나오네? 집에 가서 코다리찜 찾아서 따라 해 볼 거야.”

휴센터가 운영 중인 노원의 여러 동네에서 어르신들은 여러 모임에 참여하며 제법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사회 복지망의 보호를 받는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 계층이 아니어도 노후는 불안한 시간이다. 경제력과 활동력이 현격히 떨어져 사회의 구석으로 밀려난 듯한 좌절도 느낀다.

이동이 어려운 고령층의 활동 범위 안에서 동네 사람, 자원을 활용한 휴센터의 소모임 돌봄은 느리지만 어르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찾아 도전하는 하루를 보낼 수 있게 한다. 정부나 지자체의 시스템뿐 아니라 지역 공동체와 커뮤니티가 고령화의 대안으로 떠오르는 이유다.

강봉심 이사는 “주민이 주민을 돌보는 것이 마을의 일자리를 만드는 역할도 할 수 있어 구청에 정책 제안을 하려 한다”며 “주민들이 활동하는 어르신들을 보며 ‘노인이 되더라도 이웃의 도움을 받으며 요양원이 아닌 동네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면 공동체를 복원하는 동력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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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명장벽의 도시④]고령층에게 ‘디지털 장벽’이 두꺼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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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명장벽의 도시④]건강한 성인이 표준인 도시엔 ‘노인을 위한 공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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