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봉화에는 침엽수를 위한 '노아의 방주'가 있다

강한들 기자 2022. 10. 17.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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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함백산 약 1500m 높이에 고사한 분비나무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로 서 있다. 강한들 기자

강원 함백산 해발고도 약 1500m, 그중에서도 암석이 많은 지형. 지난 12일 찾아간 분비나무 서식지는 일주일 전 내린 첫눈이 아직 녹지 않고 남아있을 만큼 서늘했다.

한국 땅에서 분비나무가 자랄 수 있는 곳은 1%가량 밖에 되지 않는다. 그마저 계속 줄어들고 있다. 그러니 완전히 없어지기 전에 그 씨앗이라도 보존해둬야 ‘후일’을 기약할 수 있다.

경향신문은 지난 12~13일 함백산 일대에서 진행된 산림청과 국립백두대간 수목원의 ‘기후변화 적응 멸종 위기 침엽수 모니터링’에 동행했다. 수목원은 기후변화로 멸종위기에 놓인 침엽수의 종자를 채취해 경북 봉화 수목원 내 ‘시드뱅크’와 ‘시드볼트’에 저장한다.

이날은 분비나무의 종자를 따는 날이었다. 수목원 연구진은 끝에 집게가 달린 사람 키 정도의 막대를 이용해 조심스럽게 종자를 손에 넣었다.

이상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기후변화적응팀 연구원이 지난 12일 강원 함백산 일대에서 커다란 돌에 올라가 분비나무 종자를 채취하고 있다. 강한들 기자
사람이 만든 기후변화로 말라 죽는 아고산대 침엽수

함백산 중봉 인근에서는 어렵지 않게 ‘고사’한 분비나무를 볼 수 있었다. 반경 2.5m 안에서 말라 죽어 뿌리가 완전히 들린 채 쓰러져 있는 분비나무 5그루를 한꺼번에 찾기도 했다. 껍질이 벗겨지고, 입 마름이 발생하는 등 스트레스가 누적되고 있는 나무도 보였다.

‘어른’ 분비나무 근처에는 많게는 4~5개의 치수(어린나무)가 있었다. 어린‘나무’라고 하지만 사실은 ‘풀’에 가까웠다. 잎이 4개 정도 나고, 높이가 1㎝에 불과한 1년생 나무부터 높이 약 4㎝ 정도의 3~4년생 나무다. 이들 중 성목으로 자라나는 것은 100그루 중 2~3그루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강원 함백산 1500m 고지 인근 분비나무 옆에서 어린 분비나무. 3~4년 정도 자라도 키가 3~4㎝에 불과했다. 강한들 기자

현장 연구자들은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나무의 비율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고 말한다. 50~70년 된 나무, 20~30년 된 나무, 어린나무가 적절한 비율을 이루며 자라야 하는데, 성목은 고사한 채 많이 발견되고, 20~30년된 나무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변준기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산림생물자원부 보전복원실 기후변화적응팀장은 “정확한 수치로 말하긴 어렵지만, 체감상 과거보다 청소년기 나무가 줄고 있다”며 “더는 침엽수에 지속 가능한 환경이 아닐 수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아고산대 침엽수가 고사하는 데는 기후변화가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2018년 국립공원공단은 고사한 구상나무의 나이테를 분석한 뒤, 2월 기온 상승 및 3월 강수량 부족을 고사 이유로 지목했다.

2020년 한국기후변화학회지에 실린 논문 ‘기후변화에 따른 멸종 위기 침엽수종 분포 변화 예측’을 보면 분비나무가 자랄 수 있는 환경은 현재 국토의 1% 정도뿐이다. 현재 수준으로 온실가스 배출이 계속된다면 2050년쯤에는 기온이 오르고, 유효 강수량이 줄어들며 분비나무가 잠재적으로 분포할 수 있는 면적이 현재의 5분의 1인 국토의 0.2%밖에 남지 않는다고 봤다. 2080년에는 분포할 수 있는 지역이 거의 사라진다. 구상나무, 눈잣나무 등 다른 아고산대 침엽수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강원 함백산에서 지난 12일 고사해있던 분비나무의 모습. 녹색연합 제공
‘방주’에 넣을 씨앗을 위해 전국 고산을 다니는 사람들

연구원들은 함백산 정상 근처에서 등산로를 따라 약 30분, 다시 등산로가 없는, 빼곡한 잔가지 사이로 5분 정도 더 걸어 종자 채취 현장에 도착했다. 등산로 인근에서 채취할 때도 있지만, 그 보다는 길이 없는 산 깊숙이 들어가는 때가 더 많다. 가능한 교란이 적은 곳에서 종자를 얻기 위해서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 기후변화적응팀 연구원들이 분비나무 종자를 채취하기 위해 지난 12일 강원 함백산 좁은 산길을 따라 등산 하고 있다. 강한들 기자
이동형 국립백두대간수목원 기후변화적응팀 연구원이 지난 12일 강원 함백산 일대에서 커다란 돌에 올라가 분비나무 종자를 채취하고 있다. 강한들 기자

분비나무의 종자는 솔방울처럼 생긴 ‘구과’다. 종자를 채취할 때는 나무에 열린 씨앗의 약 20% 정도만 딴다. 씨앗을 너무 많이 수집하면 나무가 씨앗을 퍼트리는 데 지장을 받는다.

최근에는 종자 수가 부족해, 채취가 어려울 때도 있다. 변 팀장은 “종자가 매년 달리는 게 정상인데, 근래에는 거의 격년 주기로 종자가 달린다”며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고 말했다.

채취한 종자는 썩지 않도록, 통기가 가능한 종자망에 담아 수목원으로 가져간다. 나무별로 일련번호를 부여해 씨앗을 언제, 어디서, 누가 채취했는지도 기록해 둔다. 수목원은 지역별로 같은 나무종 안에서도 유전자가 어떻게 다른지 분석한다. 이런 기초자료가 있으면 추후 어떤 산에 침엽수를 다시 심어야 할 때, 원래 살던 나무와 유전자가 비슷한 나무를 찾아 심을 수 있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 기후변화적응팀은 함백산뿐 아니라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등 전국 곳곳에서 멸종위기에 놓여있는 침엽수의 종자를 채취하고 있다. 구상나무, 분비나무, 가문비나무, 눈측백, 주목, 눈잣나무, 눈향나무로 총 7종이 멸종위기다.

종자망에 담긴 분비나무의 종자와 잎. 강한들 기자
고르고 또 골라, 시드뱅크·시드볼트로

확보한 종자는 습도 15%가 유지되는 건조실에서 종에 따라 1~4주간 정도씩 말린다. 장기 보관을 위해서는 건조가 필수다. 말랐을 때 생명을 잃는 종자라면 장기 저장은 어렵다.

건조가 끝나면 정선(종자 중 파쇄됐거나, 미숙하거나 오염된 종자를 걸러내는 과정)이 시작된다. 충실한 종자를 걸러내기 위해서는 수작업이 필수다. 우선 솔방울처럼 생긴 열매에서 털어낸 종자를 흰 종이에 올려두고 키질하듯 까부른다. 크기가 다른 체를 사용해 여러 번 거르고 나서 맨 아래에 남는 게 종자다.

야생식물종자연구실의 연구원들은 종자 중에서 충실한 녀석을 골라내는 데 ‘달인’이다. 연구원들은 폭이 0.6㎝, 너비가 0.3㎝ 정도 되는 작은 씨앗을 하나하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며 걸러낸다. 100여 개의 씨앗 중 ‘통통한’ 씨앗만을 걸러내는 데는 채 3분이 걸리지 않았다. 이종숙 백두대간수목원 야생식물종자연구실 주임은 “해마다 기온, 강수량 조건에 따라 종자 결실률이 다르다”며 “안 좋을 때는 약 20~30%, 좋을 때는 50~70% 정도로 차이가 크다”고 말했다.

이종숙 백두대간수목원 야생식물종자연구실 연구원이 지난 13일 분비나무 씨앗을 하나하나 보며 충실한 씨앗을 골라내고 있다. 강한들 기자
박초희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산림생물자원부 야생식물종자연구실 연구원이 지난 13일 분비나무 종자를 종자 엑스레이 안에 넣고 있다. 강한들 기자

두 눈과 손가락의 감각만으로 확인할 수 없는 씨앗 내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종자 엑스레이’ 촬영을 진행한다. 엑스레이로 찍었을 때 씨앗 내부가 하얀색으로 꽉 차 있으면 ‘충실하다’, 조금이라도 비어있는 부분이 보이면 충실하지 못한 씨앗이다. 한 나무당 25개의 씨앗을 4번, 총 100개의 씨앗을 검사해 충실률이 50%를 넘겨야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충실률 검사까지 통과한 씨앗은 발아 실험을 진행한다. 물을 오랫동안 머금을 수 있는 형태의 젤 위에 씨앗을 올려두고, 조건에 따른 발아율을 알아보는 것이다. 분비나무의 경우 하루 12시간은 빛을 비추며 25도 온도를, 나머지 12시간은 어둠 속에서 15도 온도를 유지하는 배양기에서 발아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나채선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산림생물자원부 야생식물종자연구실장은 “국내 야생식물 약 2000종 중 발아 조건이 알려진 식물은 거의 없고, 분비나무도 알려지지 않았다”며 “UN의 지침에 따라서 온대 지방에서 항온 20도에서 시작한 실험이 두 단계를 지나 지금의 온도 조건으로 실험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화학 검사’로 종자의 생사를 확인해야, 비로소 종자는 저장될 수 있다. 발아 실험을 통해 종자가 싹을 틔우지 못하더라도, 그 씨앗이 죽은 것은 아니다. 식물은 자신이 원하는 생장 조건이 갖춰지기까지 휴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아실험 중인 한 종자. 강한들 기자
“종자 저장·서식지 외 보전은 생물 다양성 지킬 가장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실천”

엄선된 종자는 시드뱅크, 시드볼트에 저장된다. ‘시드뱅크’는 향후 실험 등을 위해 장기 보존하며 꺼내어 써야 하는 종자를 보존하는 공간이다. ‘시드볼트’는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 전쟁 등 재앙이 발생해도 식물의 멸종을 막기 위해 보관해두는 종자 저장 시설이다. 종자 출입을 위해서도 연 4회만 문을 열 정도로 삼엄하게 경계하는 국가보안시설이다.

지난 13일 찾은 시드뱅크에서는 영하 20도의 온도가 유지되고 있었다. 지난해 채취한 멸종위기 침엽수의 종자도 밀봉된 상태로 저장돼 있었다. ‘절대 열지 않겠다는 의미’의 블랙박스에는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다른 나라들이 시드볼트에 저장해달라고 의뢰한 종자들이 담겨 이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은 “아고산대 침엽수의 고사가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이뤄지는데, 서식지에서 나무를 살리는 것은 쉽지 않다”며 “향후 다른 침엽수도 더 고사할 수 있는데 종자를 저장하고, 서식지 바깥에서 보전하는 것은 기후위기 시대 생물 다양성을 지킬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실천”이라고 말했다.

박초희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산림생물자원부 야생식물종자연구실 연구원이 지난 13일 시드뱅크에 저장된 멸종위기 침엽수종의 씨앗을 들고 있다. 강한들 기자
시드뱅크에 저장된 멸종위기 침엽수 분비나무의 씨앗. 강한들 기자
나무 ‘인큐베이터’ 거쳐, 자생지 바깥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현지외보전원(대체서식지)’도 조성해 운영하고 있다. 아고산대 침엽수 자생지도 이제 더 살기 좋은 환경이 아니니, 자생지 바깥에서 더 좋은 장소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수목원 내 현지외보전원은 두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2.4㏊ 규모의 보전원은 온전히 보전을 위한 공간이고, 0.8㏊ 보전원은 전시와 보전을 동시에 하며 사람들에게 기후변화와 아고산대 침엽수의 위기에 대해 알리는 역할을 한다.
현지외보전원은 심한 가뭄이 오는 등 재난 수준의 환경 변화가 생기지 않는 이상 ‘자연의 힘’으로 나무를 키워내는 것이 목표다. 본래 서식지와 비슷한 환경을 꾸려놓았다. 지난 13일 찾은 백두대간수목원 내 현지외보전원에서 자라고 있는 분비나무 곁에는 돌덩이가 놓여 있었다. 자생지에서 분비나무가 돌이 많은 지역에 뿌리내리고 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생열귀나무 등 높은 지대에서 사는 식물들을 주변에 심어두기도 했다.
보전원에 심을 나무도 직접 기르고 있다. 연구 온실에는 한라산 구상나무 500본, 주목 80본을 키우고 있었다.
숲에서 나무 사이로 비치는 정도의 빛만을 비춰주기 위해 묘목 위에는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그늘막을 덮었다. 1~2층으로 나뉜 선반 1층에는 1년 남짓 자란 1㎝ 내외의 치수가, 2층에는 5~6년쯤 자란 나무가 있었다. 연구진은 원래 빛을 비추는 게 묘목의 생장에 더 좋을 것으로 생각하고 빛이 잘 드는 곳에 묘목을 뒀었다. 하지만 자연에서 구상나무, 주목 등 어린 침엽수는 보통 큰 나무의 아래에서 자란다. 양종철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산림생물자원부 보전복원실장은 “처음에는 성장 시기가 다른 두 나무가 같이 섞여 있었으나 수년간 운영하며 어린나무일수록 빛이 적어야 더 잘 큰다는 것을 안 이후 층을 나누어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산림생물자원부 보전복원실 연구원은 “공룡이 활동할 만큼 먼 과거에 번성했던 은행나무가 축소의 시기를 거쳐 지금 실질적인 자생지는 중국에 두 곳뿐인데 우리 주변에서 가로수로 많이 볼 수 있게 된 것도 일종의 ‘현지 외 보전’”이라며 “언젠가 구상나무와 같은 침엽수도 한반도 자생지가 한라산 어딘가에만 남을 수 있는데, 은행나무처럼 ‘현지 외 보전’을 통해 보전해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무 인큐베이터’인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내 연구 온실에서 자라고 있는 제주 구상나무. 강한들 기자
국립백두대간수목원 현지외보전원에서 자라고 있는 분비나무. 분비나무 주변에 돌을 깔아둬 자생지와 비슷한 환경을 갖춰뒀다. 강한들 기자

강한들 기자 handl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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