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로이트 글로벌 경제 리뷰] 유럽 인플레이션, 에너지 위기 대응 향방에 달렸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계속 가속화하고 있다. 주범은 에너지 위기다. 지난 9월 유로존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보다 10% 올라 사상 처음으로 두 자릿수 상승률을 기록했고, 전달 대비로는 1.2% 상승했다. 에너지가 단연 물가를 끌어올린 주범이었고 식품 가격도 크게 올랐다. 9월 에너지 가격은 전년 대비 무려 40.8% 치솟았고, 전달 대비로는 3% 상승했다. 식품 가격은 전년보다 11.8%, 전달 대비 1% 각각 올랐다. 변동성이 높은 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 물가는 전년 대비 4.8%, 전달보다 1% 각각 상승했다. 이는 역대 최고 수준이지만 여전히 다른 국가에 비하면 낮은 편이다.
국가별로 독일 CPI는 전년 대비 10.9%, 프랑스 6.2%, 이탈리아 9.5%, 스페인 9.3%, 네덜란드 17.1%, 벨기에는 12% 각각 상승했다. 상승률이 가장 높은 곳은 에스토니아로 24.2%를 기록했다. 에스토니아뿐 아니라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등 발틱 3개국 모두 상승률이 20%를 넘었다. 유로존에서 인플레이션율이 가장 낮은 곳은 프랑스였다.
유럽중앙은행(ECB)은 단기 금리와 (장기 국채 수익률을 끌어올리는) 국채 매각을 주요 정책 수단으로 삼아 긴축 통화 정책을 지속하고 있다. 두 가지 수단 모두 신용 시장 활동을 경색시키기 위함이다. 이를 통해 경제 성장을 둔화시켜 물가 상승 압력을 제거한다는 의도다. 또한 기대인플레이션을 안착시켜 ‘임금-물가 악순환(wage-price spiral)’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ECB는 지난 7월 11년 만에 처음으로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상하는 빅 스텝(big step)을 밟은 데 이어 9월 8일(이하 현지시각) 정책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인상하는 자이언트 스텝(giant step)을 단행했다.
현재 유로존 인플레이션은 천연가스를 둘러싼 러시아와 유럽연합(EU) 간 정치적 줄다리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ECB가 긴축 정책에 나서기는 했지만, 인플레이션의 근본적 원인을 해결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 따라서 ECB의 긴축 통화 정책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데는 크게 효과가 없고 이미 위험에 처한 유로존 경제를 더욱 약화시키기만 할 가능성이 있다.
반면 천연가스 가격이 정점을 찍고 안정화하거나 하락한다면 에너지 위기에 따른 인플레이션 압력은 줄어들고 물가가 하락할 것이다. 특히 통화 정책으로 인해 경제가 약화된 만큼 에너지 위기만 해결된다면 물가는 금방 잡힐 것이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향후 몇 차례 더 금리를 인상할 것”이라고 밝혔다. 투자자들은 ECB가 12월 정책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또다시 인상하는 강수를 둘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편 천연가스 위기는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천연가스 수송관 노르트스트림(Nord Stream) 가스관 일부가 훼손되는 사고가 발생하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지도자들은 러시아의 고의적 사보타주(비밀 파괴 공작)라고 비난했으며 러시아는 어떠한 연루 사실도 없다고 반박하며 오히려 미국과 나토를 배후로 지목했다. 노르트스트림 1·2 발트해 해저 가스관은 9월 26일 두 차례 폭발에 이어 세 군데서 대량의 가스가 누출됐고, 이후 29일 한 군데서 추가 누출이 확인됐다. 배후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유럽에서는 겨울을 앞두고 가스 부족난이 예상되면서 민심이 흉흉해지고 있다. 러시아가 원하는 대로 유럽 공동체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슬로바키아는 가스 가격 급등으로 경제가 붕괴할 것이라며 EU에 수십억유로의 지원을 촉구했다. 이러한 지원 자금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는 EU 내 ‘뜨거운 감자’다. 필립 레인(Philip Lane) ECB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유로존 회원국들이 부자 증세를 통해 전 국민 대상 에너지 보조금을 지원해야 한다며, 정부 부채를 급격히 늘리지 않고 높은 에너지 가격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공정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 가운데 10월 5일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유럽이 비축해 놓은 천연가스로 다가오는 겨울은 무사히 넘긴다고 하더라도 내년에는 더 큰 에너지 위기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파티 비롤 IEA 사무총장은 유럽 천연가스 비축량이 저장 용량의 90%에 육박하는 만큼 정치적·기술적 돌발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올겨울은 큰 고통 없이 넘길 수 있겠지만, 내년 2~3월에는 천연가스 비축분이 저장 용량의 25~30% 수준으로 줄어 진짜 위기가 시작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에 EU 지도부는 천연가스 가격 상한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고, 독일과 영국 등 정부는 대규모 에너지 보조금을 지급할 계획이다. 가장 통 크게 움직이는 곳은 영국으로 국내총생산(GDP)의 6.5%인 1500억파운드(약 242조4000억원)를 에너지 보조금으로 책정했다. 유로존에서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정부가 가장 큰 규모의 에너지 보조금 지출에 나섰다. GDP 대비 비율로는 크로아티아, 그리스, 이탈리아, 라트비아, 스페인이 순서대로 가장 많은 금액을 지출할 계획이다.
이 같은 대규모 에너지 보조금과 더불어 중앙은행의 물가 통제에 힘입어 유럽 인플레이션은 일시 억제될 것으로 보인다. 에너지 보조금은 소비자가 지불하는 가격 상승을 억제해 인플레이션을 일시 억제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용 시장이 경색돼 있고 인플레이션이 높은 시기에 정부 지출을 확대하면 장기적 인플레이션 압력이 추가된다. 이렇게 되면 중앙은행은 더욱 강력한 긴축 정책에 나설 수밖에 없다. 실제로 최근 수 개월간 단기 금리를 인상하고 국채를 매각하며 긴축 행보를 보였던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은 에너지 보조금을 포함한 정부의 대규모 경기 부양책으로 국채 수익률이 지나치게 급등하자 방향을 완전히 바꿔 국채 매입을 재개했고 “필요하다면 무한정 매입에 나설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영국 정부의 느닷없는 경기 부양책에 요동치던 금융 시장은 일단 안정을 되찾으며 국채 수익률이 하락했으나, BOE의 국채 매입 결정이 역효과를 낳아 새로운 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마디로 인플레이션과 에너지 위기가 갈수록 심화하는 가운데 에너지 보조금 등을 통한 정부의 대규모 직접 개입은 양날의 검과도 같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유럽 소비자들이 극심한 쇼크를 받아 전반적으로 구매력이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진 만큼, 유럽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들이 떨어지는 양날의 검을 어떻게 받아들지에 따라 유럽 인플레이션 향방이 크게 좌우될 것이다.
Copyright © 이코노미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