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적이 오늘은 친구" 식물 꽃가루받이 돕는 해충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2022. 10. 17.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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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샷] 장님노린재가 천남성 꽃가루받이 도와
알프스 토끼풀은 벌과 나방이 교대로 도움 줘
대기 오염이 곤충의 꽃가루받이 방해
오존 증가하면 나방이 꽃 향기 맡지 못해
온 몸에 천남성 꽃가루를 묻힌 장님노린재. 원래 식물의 수액을 빨아먹는 해충이지만 천남성에서는 꽃가루를 옮기는 익충 역할을 한다./오스트리아 빈대학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 해충도 때론 식물의 꽃가루받이를 돕는 익충으로 변신한다.

오스트리아 빈대학 식물학과의 위르크 슈넨베르거 교수와 박사과정의 플로리안 에틀 연구원은 “중앙아메리카 코스타리카에서 장님노린재가 천남성의 꽃가루를 옮기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했다”고 이달 초 국제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밝혔다.

딱정벌레 대신 장님노린재가 수정 도와

장님노린재과(科) 곤충은 농민의 적이다. 콩알만 한 크기의 이 곤충은 사과와 상추 같은 농작물의 수액을 빨아 먹어 매년 전 세계에서 수백만 달러씩 경제적 피해를 준다. 영어로 ‘식물 벌레(plant bug)’ 또는 ‘미리드 버그(mirid bug)’로 불린다. 플로리안 에틀 연구원은 코스타리카 저지대 열대우림에 사는 천남성의 꽃가루받이를 연구하다가 우연히 해충이 익충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천남성은 우리에게 조선시대 사약의 재료로 잘 알려진 식물이다. 잎이 안쪽의 꽃을 보호하기 위해 벌레잡이풀처럼 기다란 통 모양을 이루고 있다. 보통 천남성은 밤에 잎이 열리고 신호물질인 페로몬을 방출해 꽃가루받이를 돕는 딱정벌레를 유인한다.

에틀 연구원은 코스타리카에 사는 천남성인 ‘신고니움 해스티페룸(Syngonium hastiferum)’은 다른 종(種)과 달리 아침에 잎이 열리고 페로몬을 방출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자 딱정벌레 대신 해충인 장님노린재들이 몰려왔다. 연구진은 천남성이 방출하는 페로몬에서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화학물질을 찾아내, 빈대학의 현지 라 감바 연구소의 이름을 따 ‘감바놀(gambanol)’이라고 이름붙였다.

연구진은 종이를 말아 천남성 꽃 모양을 만들고 감바놀을 바르면 역시 장님노린재들이 몰려드는 것을 확인했다. 해스티페룸 천남성 꽃에 그물망을 쳐 장님노린재가 오지 못하게 하자 씨가 맺히지 않았다. 장님노린재가 꽃가루받이를 했다는 의미다. 딱정벌레가 꽃가루를 옮기는 천남성 꽃에도 장님노린재가 찾아오지만 이때는 꽃만 먹어 치웠다.

천남성은 꽃가루받이를 돕는 곤충에 따라 꽃가루의 모양이 바뀐다. 장님노린재(a)가 찾은 꽃의 꽃가루(c)는 접착력은 없지만 돌기가 있어 몸에 달라붙는다. 반면 딱정벌레(b)가 옮기는 꽃가루는 매끈한 몸에 잘 붙도록 접착력이 뛰어나 서로 엉켜 붙어 있다(d)./Current Biology

곤충 따라 꽃가루 모양도 달라

해스티페룸 천남성은 장님노린재를 꽃가루받이로 유인하기 위해 다른 종과 다르게 진화했다. 꽃 향기 성분과 방출 시간을 바꿨을 뿐 아니라, 형태도 바뀌었다. 먼저 다른 종과 달리 수정되지 않고 꽃가루받이를 돕는 딱정벌레에게 보상으로 주는 불임화(不姙花)가 없었다.

또 몸이 매끈한 딱정벌레가 찾는 꽃은 꽃가루가 접착력이 강했지만, 장님노린재가 찾는 종은 꽃가루가 접착력이 없는 대신 돌기가 있는 가루 형태여서 곤충의 털에 잘 달라붙었다.

미국 애리조나대의 레기스 페리에르 교수는 지난 13일 사이언스에 “꽃가루를 옮기는 곤충이 딱정벌레에서 장님노린재로 바뀐 것은 꽃향기의 성분과 방출 시간, 꽃가루 형태까지 바꿔야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진화적 변화”라고 밝혔다.

빈대학 연구진은 “진화 과정에서 해충도 때론 꽃가루받이를 돕는 이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며 “장님노린재가 다른 식물에서도 꽃가루받이를 돕는 사례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장님노린재과는 1만5000여종이 있다.

나방이 붉은토끼풀에 앉은 모습. 나방이 밤에 토끼풀의 꽃가루받이를 돕는다는 사실이 처음 확인됐다./Jeff Kerby

알프스 토끼풀 수정 돕는 나방

나방도 일반인에게 해충으로 알려졌지만, 밤에 피는 꽃에겐 꽃가루받이를 돕는 이로운 존재이다. 예를 들어 밤에 피는 달맞이꽃이나 담배 꽃은 박각시나방이 꽃가루를 옮긴다. 최근 꽃가루받이를 돕는 새로운 나방도 나타났다.

덴마크 오르후스대의 제이미 앨리슨 박사 연구진은 지난 7월 국제 학술지 ‘바이올로지 레터’에 “알프스산맥에 사는 붉은토끼풀이 밤에 큰노랑뒷날개나방(Noctua pronuba)의 도움을 받아 꽃가루받이를 하는 것을 처음 확인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붉은토끼풀은 전적으로 벌에 꽃가루받이를 의존한다고 생각했다.

연구진은 여름에 스위스 알프스산맥의 붉은토끼풀 자생지에 동작 감응 카메라 15대를 설치했다. 나중에 찍힌 사진을 확인해보니 토끼풀을 찾은 곤충은 예상대로 대부분 뒤영벌(61%)이었지만 나방도 34%를 차지했다. 낮에는 벌이, 밤에는 나방이 꽃가루를 옮긴 셈이다.

연구진은 토끼풀은 꿀을 제공하고 가축의 사료로도 인기가 높다는 점에서 이번 결과가 농업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밤에 나방이 찾은 토끼풀은 씨앗을 더 많이 맺었다. 해충으로만 생각하던 나방이 목축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미다.

박각시나방이 담배꽃에 대롱 모양의 입을 뻗어 꿀을 발고 있다. 과학자들은 대기오염이 심해지면 꽃향기가 변하고 나방이 더는 찾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문제는 인간이다. 살충제 남용과 생태계 파괴로 꽃가루를 옮길 꿀벌이 급감해 사회적 문제가 됐다. 밤에 피는 꽃들도 비상이다. 대기오염으로 밤에 꽃들이 방출하는 향기가 나방에게 닿지 않는 것이다.

독일 막스플랑크 화학생태학연구소의 마르쿠스 크나덴 박사 연구진은 지난 2020년 국제 학술지 ‘화학 생태학 저널’에 “오존 오염이 심한 곳에서는 꽃과 꽃가루받이 곤충 사이의 화학적 통신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인위적으로 바람을 불어주는 풍동(風洞) 장치에서 나방이 원래 꽃 향기와 오존으로 변형된 향기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실험했다. 이전 꽃 향기가 나오면 나방이 그쪽으로 날아가 빨대 같은 주둥이를 뻗었다. 하지만 오존에 의해 산화된 꽃 향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참고자료

Current Biology, DOI: https://doi.org/10.1016/j.cub.2022.09.013

Biology Letters, DOI: https://doi.org/10.1098/rsbl.2022.0187

Journal of Chemical Ecology, DOI: https://doi.org/10.1007/s10886-020-01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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