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철조망 너머, 막달레나 세탁소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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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트리샤 버크 브로건(Patricia Burke Brogan, 1932~ 2022.9.5)은 1947년 '막달레나(Magdalene) 세탁소'의 첫인상을 그렇게 기억했다.
고교를 졸업한 뒤 수녀가 돼서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고 '자비의 수녀회(Sisters of Mercy)'에 입회한 만 21세의 수련 수녀인 그에게 수녀회가 정해준 근무처가 그곳, 아일랜드 골웨이 포스터(Forster) 거리의 막달레나 세탁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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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 받아 간 곳은 널따란 공간이었어요. 귀가 먹먹할 만큼 시끄러운 커다란 기계들이 있었어요. 잠시 뒤 뿌연 김 사이로, 여자들이 보였어요. 젊은 여자들, 나이든 여자들. 그들은 자신들을 가두어 통제하는 이들 중 한 명인 양 나를 바라봤어요. 단테의 지옥에 들어선 것 같았어요."
퍼트리샤 버크 브로건(Patricia Burke Brogan, 1932~ 2022.9.5)은 1947년 ‘막달레나(Magdalene) 세탁소’의 첫인상을 그렇게 기억했다. 고교를 졸업한 뒤 수녀가 돼서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고 ‘자비의 수녀회(Sisters of Mercy)’에 입회한 만 21세의 수련 수녀인 그에게 수녀회가 정해준 근무처가 그곳, 아일랜드 골웨이 포스터(Forster) 거리의 막달레나 세탁소였다.
1824년 성막달레나여성협회가 설립해 1845년 이래 수녀회가 운영하던 그 세탁소는 매춘여성과 미혼모, 불륜 등 당시 성윤리에 어긋난 짓을 저지른 여성들이, 법원과 경찰, 사회복지사, 병원, 의회, 성직자, 더러는 가족에 의해 강제로 수용돼 세탁 노동으로 육신의 죄를 씻고 기도로 마음을 정화하는 곳.
하지만, 설립 취지나 명분과 달리, 실상은 사뭇 달랐다. 학교 수업을 빼먹은 여학생도, 기차에 무임승차한 여성도, 성당 신부나 가장의 판단에 행실이 단정치 못한, 그래서 남자를 유혹해 타락시킬 우려가 있다고 판단된 여성도 수용됐고, 심지어 강간 피해 여성도 대상이었다. 그들은 입소 직후 수녀회가 부여한 새 이름과 식별 번호로 불리며 감옥과 다름 없는 폐쇄된 공간에서, 머리를 깎고 수용복을 입고 침묵의 계율을 준수하며 대화도 삼가야 했다. 가족 방문도 수녀 입회하에 제한적으로만 허용됐고, 편지도 원칙적으로 금지였다. 그들은 아침 5시에 일어나 미사와 식사를 마친 뒤 주 6일 하루 10~12시간씩 세탁과 다림질, 세탁물 포장, 바느질, 자수 등의 강제노동에 임금 없이 동원됐다. 고객은 기업체와 종교시설, 정부부처와 군대, 병원, 학교, 교도소, 의회 등 다양했다. 만일 통제에 저항하거나 규율을 어기면 굶거나 독방에 감금 당했고, 장시간 무릎 꿇기와 삭발 등 처벌 외에 언어 폭력과 구타도 빈번했다. 그들은, 10대 소녀들도 아무런 교육을 받지 못했다. 드물게 벽을 넘거나 세탁물 수거차량에 숨어 탈출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경찰에 의해 다시 끌려왔고, 가혹한 처벌을 받은 뒤 수녀회가 운영하는 다른 지역 세탁소로 옮겨졌다. 한 세탁소 생존자(Mary Norris)는 “감옥보다 못했다. 감옥에선 형량을 아니까 언제 나갈 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아일랜드에는 ‘자비의 수녀회’와 ‘사랑의 성모마리아 수녀회’ ‘자선의 수녀회’ ‘선한 목자 수녀회’ 등 4개 단체가 운영하는 통칭 막달레나 세탁소가 10곳이 있었다. 숙소는 늘 추웠지만 작업장은 스팀과 다리미 열기로 겨울에도 더웠다고 한다. 브로건은 “작업장 벽도 그 여성들처럼 땀을 흘리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브로건은 서원을 포기하고 수녀회를 떠났다. 하급 경찰관이던 아버지 영향으로 유년 시절부터 독서와 글쓰기를 즐겼던 그는 세탁소 체험을 소재로 ‘해바라기들(Sunflowers)’이라는 제목의 단편 소설을 써서 지역 신문(Connacht Tribune) 공모전에서 상을 탔다. 그 소설은 이내 잊혔지만 그는 시와 소설, 희곡 작가의 삶을 살게 됐고, 50대 들어 다시 세탁소의 기억을 되살려 ‘퇴색되다(Eclipsed)’라는 제목의 희곡을 썼다.
하지만 주요 극단들은 세탁소를 무대로 수용자와 수녀 등 여성 8명이 등장하는 그의 희곡을 금서처럼 여기며 공연을 마다했다. 아일랜드는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로, 19세기 독립전쟁과 1920년 독립 과정에서도 가톨릭 교회는 영국성공회에 맞서 국가적-민족적 아이덴티티로 자리잡은, 세속 권력 못지않은 막강한 종교권력이었다. 한 극단 연출가는 “당신이 지금 뭔 얘기를 쓴 건지 알긴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갓 창단한, 의미심장한 이름의 한 무명 극단(Punchbag)에 의해 1992년 2월, 골웨이의 한 작은 극장 무대에 처음 올랐다. 당시에도 세탁소는 대다수 시민들에게 높은 담장과 가시철조망을 두른 께름칙한 종교 교화시설이었고, 조금이나마 실상을 아는 이들에게도 침묵으로 외면해야 하는 공간이었다. 그의 연극으로, 그 담장과 침묵의 연대가 허물어진 거였다. 항의하는 군중들이 극장에 몰려들었고, 극단에는 욕설을 담은 편지가 쇄도했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그 소동 덕에 연극은 성황을 이뤘다. 아일랜드 전역에서 버스를 대절해서 공연을 보러 오는 이들도 있었다. 수도인 동부 더블린에서도 공연이 시작됐고, 세탁소 경험자들의 증언과 체험담 인터뷰도 이어졌다. 아일랜드의 마지막 막달레나 세탁소가 문을 닫기도 전이었다.
그렇게 200여 년 지속된 아일랜드판 여성 노예제도의 진실 일부가 세상에 드러났다. 브로건의 연극은 그해 에든버러연극제의 ‘프린지퍼스트어워드(Fringe First Award)와 94년 미국 ‘모스 하트 어워드(Moss Hart Award)’ 등 다수의 상을 수상하며 3개 대륙 61개 버전으로 공연됐다. 초연 공연을 본 직전 골웨이 시장(현 아일랜드 대통령) 마이클 히긴스(Michael D. Higgins)가 무명 작가였던 브로건에게 “지난 삶에서 이룬 게 없었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이 작품 하나로 엄청난 걸 해낸 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일랜드의 ‘여성 굴라크(gulag)’라고도 불리는 막달레나세탁소의 진실을 세상에 알린 퍼트리샤 버크 브로건이 9월 5일 별세했다. 향년 90세.
첫 세탁소는 1765년 ‘타락한 여성들(Fallen women, 매춘 여성)’의 단기교화 수용시설로 수도 더블린에 건립됐다. 빈발하는 기근과 폭동, 가톨릭 지주계급을 중심으로 한 반합병-반식민지 운동으로 소란스럽던 시대였다. 남편이나 아비를 잃은 여성 일부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영국 주둔군 등을 상대로 몸을 팔았고, 더러 가족에 의해 매춘부로 팔려 나온 이들도 있었다. 불륜을 저지른 이들, ‘문란한’ 여성들, 심지어 강간 피해자도 당시 교회 윤리로는 ‘정결을 잃고 더럽혀진’ 타락한 여성들이었다. 수용소는 점점 늘어나 19세기 초반 무렵 가톨릭 수녀회가 직접 관리했고 노동수용소 격인 ‘세탁소’로 전환되면서 점차 ‘상업-영리 기업화’했다. 수용 대상자가 늘어났고 규율은 더 엄격해졌고, 수용 기간도 점차 장기화했다. 이중적-위선적 성윤리의 대명사가 된 ‘빅토리아 시대(1837~1901)’였다. 그렇게 가정과 사회로부터 고립된 여성들은 정서적으로 교회-수녀원과의 지배-복종 관계에 점차 포섭돼갔고, 가족 친지의 적극적인 노력 없이는 사회 재진입, 즉 세탁소 출소가 어려웠다. 그렇게 수용된 여성은 총 3만여 명, 1922년 아일랜드 독립 이래 마지막 세탁소가 폐쇄될 때까지만도 1만여 명에 달했다. 그들 중 다수는 숨을 거둔 뒤에야 세탁소를 벗어나 수녀원 부설 묘지에, 더러는 묘비도 없이 묻혔다.
브로건의 연극이 상연되고 1년 뒤인 1993년, 더블린 북부 드럼콘드라의 ‘자선의 수녀회’가 개발업자에게 매각한 세탁소 부지에서 155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사망증명서와 매장 기록이 없는 유해도 46구에 달했다. 세탁소의 진실이 그렇게 연극이 아닌 현실로, 법의학적 증거를 통해 확인된 셈이었다.
여러 인권단체들이 교회와 정부를 상대로 진상 규명과 유해 신원 확인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해 말 ‘막달레나추모위원회(MMC)’가 출범했고, 세탁소 생존자들도 2009년 ‘막달레나 생존자 연대(MST)’를 결성, 자신들의 겪은 처우와 사연 등을 적극적으로 알리며 정부와 교회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했다. 다수의 방송 다큐멘터리가 제작됐고, 시인(Maighread Medbh)은 분노와 애도의 시를 썼고, 가수(Joni Michell)는 노래를 지어 불렀고, 사진작가(Diane Fenster)는 전시회를 열었다.
스코틀랜드 출신 배우 겸 감독 피터 멀런(Peter Mullan, 1959~)은 2002년 생존자 증언 등을 토대로 한 영화 ‘막달레나 시스터즈(The Magdalene Sisters)’를 개봉, 그해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교황청의 한 추기경은 “교회의 진실을 왜곡한 영화”라고 주장했고, 가톨릭 매체들도 “조잡한 반가톨릭 선동영화”라고 비판했다.
영화 후폭풍과 '막달레나들을 위한 정의(JFM, Justice for Magdalenes)' 등 단체의 캠페인 와중에도 아일랜드 정부는 세탁소 사태를 가톨릭 교회-수녀회의 사적인 문제일 뿐 정부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선을 긋고 개입을 거부했다. JFM은 2010년 아일랜드인권위원회에 세탁소 인권 실태에 대한 공식 조사 요청서를 제출했고, 이듬해 4월 유엔고문방지위원회(UNCAT)에도 진정서를 냈다. JFM 임원인 인권변호사 (당시 하버드대 로스쿨 연구원) 메이브 오루크(Maeve O’Rouke)는 6월 유엔 청문회에서 “(독립 이후) 70여 년 간 자행된 여성과 소녀들에 대한 고문과 학대, 비인간이고 모멸적인 처우의 즉각적인 진상 규명조차 외면”하는 아일랜드 정부를 성토하며, 유엔의 개입을 촉구했다.
아일랜드 정부는 2011년 6월에야 상원의원 마틴 매컬리스(Martin McAleese)를 의장으로 한 부처 합동 진상조사 위원회를 설립했다. ‘매컬리스 위원회’는 2013년 2월, 막달레나 세탁소 운영에 국가가 광범위하게 개입한 사실을 인정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건국 이후 수감자 10,012명 중 26%(2,124명)가 법원 판결 등에 의해 수감됐고, 세탁소 운영에 대한 노동법과 인권 법률에 근거한 아무런 감독조치가 없었다는 게 골자였다. 수감자 중 15%는 5년 이상 세탁소에 수감돼 하루 12시간 가량 강제노동한 사실도 인정했다. 보고서 발표 직후 당시 총리 엔다 케니(Enda Kenny)는 하원에 출석, 800~1,000여명(당시 기준)에 이르는 세탁소 생존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국가 사죄와 배상을 약속했다.
하지만 정부의 개입 여부 등에 한정된 위원회 조사는 세탁소의 진실에 닿기엔 한계가 명확했다. 진실 규명에 필요한 수녀회 문서 등 자료도 극히 부실했다. 위원회는 피해자 증언과 달리 세탁소 내 성폭력 사례에 대한 증거는 없다고 밝혔고, 세탁소가 영리 목적으로 운영됐다고 판단할 만한 근거 역시 부족하다고 결론지었다. 국가 공식사과와 생존자 보상 목표를 이룬 JFM은 그해 5월 독자적인 진상 규명과 연구를 위한 ‘막달레나의 정의를 위한 연구(JFMR)’ 단체로 전환했다.
하지만 교회와 수녀회는 공식 사과도 논평도 하지 않았다. 4개 수녀회는 2014년 공동 입장문을 통해 ‘금전적 배상’도 거부했다. 현지 매체는 그 무렵 4개 수녀회가 부동산 개발 붐에 편승한 자산(부동산) 매각으로 약 4억 1,500만 달러의 소득을 올렸다고 전했다.
총리의 공식사죄 직후 두 명의 수녀가 익명을 전제로 ‘RTE’ 라디오 인터뷰에 응했다. 그들은 “무슨 사과?(…) 국가와 사회로부터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굶주리던 여성들에게 무료로 봉사한 데 대해 사과하라는 말이냐”고 반문했다. 또 “그 시대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온통 수녀회에 덮씌우고(…) 모든 사회적 죄악을 우리가 저지른 것”으로 매도하는 세태에 분노했다. 한 수녀는 “학대 사례가 다수 있었다고 보도된 건 나도 알고 있고 예외적인 상황에서 그런 일이 빚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수용자 못지않게 수녀들도 고되게 일했다. 다들 그랬다. 노동은 언제나 지루하고 단조롭고 고된 법”이라고 말했다. 수녀들의 인터뷰 주장은 다수의 공감을 얻진 못했다. 생존자 연대측은 “충격적이고, 끔찍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난다”고 반박했고, 생존자 중 한 명은 “수녀들은 생존자들이 치유 받기를 원치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자타공인 유럽서 가장 완고하고 보수적인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가 1995년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을 개정, 이혼을 가능하게 했고(찬성 50.28%), 2015년 동성결혼을 법제화(찬성 62.07%)했다. 2019년에는 아일랜드 국민투표 역사상 가장 높은 찬성률(82.1%)로 ‘이혼 전 4년 별거’ 규정을 2년으로 완화했다. 어쩌면 저 변화의 배경에, 가톨릭 교회에 대한 국민적 실망감과 배신감이 작용했을지 모른다.
브로건은 시인 소설가 화가로 살며, 세탁소를 모티브로 한 2편의 희곡을 더 발표했고, 2014년 회고록(‘Memoir with Grykes and Turloughs’)을 출간했다. 대통령 히긴스는 그의 회고록 서문에 “그는 희곡 한 편으로 아일랜드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고 썼다.
평생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브로건은 2013년 인터뷰에서 “나는 세탁소에서 물리적인 폭행을 본 적은 없었”고 “절박한 상황의 수용자들끼리 몸싸움을 벌이는 일이 있었다는 사실은 안다”고, “사람들이 나를 반교회적 인물로 여기는 건 불편하다”고 말했다. 그는 “모두가 수녀들을 비난하지만, 그 상황에 전혀 개입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 편승한)은 국가도 비난 받아 마땅하다”고 말했다. “모든 게 사실 수치의 문제였다. 수치의 낙인 때문에 모든 걸 덮어야 했고, 아무도 말하지 못했다.” 수치와 침묵은 이제 교회의 몫이 됐다.
2022년 5월 여성의 날에 골웨이 시의회는 브로건에게 ‘골웨이 자유상’을 수여했다. 그는 남편 에디(Eddie, 작고)와 자녀없이 해로했다.
그가 골웨이의 한 요양원에서 숨진 다음 날,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Claire Keegan, 1968~)이 “막달레나 세탁소로 인해 고통 받은 여성들과 아이들”에게 헌정한 소설 ‘이토록 작은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로 올해 부커상의 최종 후보작 6편에 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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