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배출 4위 프랑스에선 정답 없는 문제 연구"

이영애 기자 2022. 10. 1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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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노벨물리학상 수상 아스페 교수 지도 받은 허창훈 SK스페셜티 리더
노벨상 수상자 발표를 기다리는 취재진들. 노벨위원회 제공

"프랑스 연구자들은 '정답이 없는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이에요. 프랑스의 교육과정은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데 큰 가치를 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사과정은 그 '끝판왕'으로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알랭 아스페 프랑스 에콜폴리테크니크 교수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2009년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는 허창훈 SK스페셜티 시뮬레이션 리더는 프랑스의 교육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국내에서는 흔하지 않은, 아스페 교수의 지도를 받은 그를 11일 서울 종각에서 만났다.

그는 2010년 에콜폴리테크니크에서 물리 석사학위를 받고 2015년 네덜란드 라드바우드대에서 비선형광학과 나노자성학을 접목한 이론 연구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SK스페셜티에서 시뮬레이션 리더로 재직하며 양자 기술을 이용해 첨단 소재를 개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허 박사는 "학부 때 고등과학원 양자정보과학 겨울학교나 아시아 양자정보학회에 참석하면서 이 분야에서 가장 큰 일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프랑스 오르세 광학연구소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미국에 있는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나 캘리포니아공대(칼텍)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 정답이 없는 문제를 고민하는 프랑스 연구자들

올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알랭 아스페 프랑스 에콜폴리테크니크 교수의 제자였던 허창훈 SK스페셜티 시뮬레이션 리더를 11일 서울 종로에서 만났다. 이영애 기자 yalee@donga.com

확신을 가지고 유학길에 올랐지만 프랑스의 연구실 분위기는 한국과 확연히 달랐다. 그는 프랑스 연구자들을 "정답이 없는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이라고 묘사했다.

"아침마다 커피를 함께 마시며 토론하고 7시만 되면 다들 퇴근할 정도로 자유로워요. 교수라도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함께 즐기는 분위기죠.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위주로 공부했던 한국 유학생들이 가장 적응을 어려워하는 부분입니다."

어떤 연구 강요도, 압박도 없을 정도로 자유롭지만 그 결과물의 책임 또한 자기 몫이다. 순수하게 연구에 가치를 둔 연구자들에게는 천국 같은 곳이지만 주체적이지 못한 연구자들은 허송세월을 보낼 수 있다는 게 허 박사의 설명이다. 그는 "석사과정을 졸업하지 못하는 친구들도 수두룩하다"며 "박사후연구원으로 오는 유학생 중 미리 아이디어가 준비돼 있지 않으면 2~3년이 지나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기 쉽다"고 말했다.

한편 확고한 마음을 가지고 떠난 유학길에 언어적 문제도 큰 장벽으로 다가왔다. 그는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되기 위해 프랑스어도 함께 공부했지만 막상 수업이 닥치니 알아듣기가 어려웠다"며 "모든 수업을 녹음해서 다시 들으며 공부했는데 그 파일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분명히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없는 수확이 있었다. 당시 물리학계 중심에 서 있는 연구자들에게 배우며 프랑스 연구 분위기를 익힌 것이 가장 큰 성과다. 그는 "시간을 다시 돌이켜도 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며 "글로벌 인재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을 했다"며 회상했다.

유럽에서 수학하며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들을 다수 만나본 것도 그에게는 큰 자산이 됐다. 그가 공부했던 네덜란드 라드바우대에는 2010년 수상한 가임·노보셀로프 교수가 있었고 독일 윌리히연구소에도 2007년 수상자인 페테르 그륀베르크 교수가 있었다. 허 박사는 "워낙 노벨상 수상자들을 많이 만난 경험이 있어 알랭 아스페 교수가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도 큰 감흥은 없었다"며 "되려 그가 이제야 수상을 하다니 시기적으로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세부전공보다 사고능력이 중요한 프랑스 취업시장

2011년 졸업식에서 허창훈 박사(왼쪽)가 프랑수아 하케 프랑스 에콜폴리테크니크 바이오광학그룹 교수와 촬영한 사진. 허 박사는 2009~2010년 하케 교수에게 비선형광학 관련 연구 지도를 받았다. 허창훈 제공

프랑스는 한국과 달리 공학보다 물리학 등 기초과학이 인기가 많다. 허 박사는 그 비결로 좋은 처우를 꼽았다. 그는 "박사과정에 입학할 때부터 보통 정규직 취업한 것과 동일한 수준의 대우를 받는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점은 졸업 이후 완전히 상관없는 분야에 취업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허 박사는 "박사과정을 지내면서 이 지원자가 가지게 된 사고능력 등 가능성을 본다"며 "입자물리를 전공했는지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는지 세부 연구 분야를 따지지 않는 편"이라고 말했다.

이공계를 전공한 연구원이 교수나 연구원 이외에도 다양한 진로가 마련돼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허 박사는 "에콜폴리테크니크의 경우 과학 기술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만든 그랑제콜(프랑스의 엘리트 고등교육기관)"이라며 "4년간 2개의 석사학위를 받아 고위공무원이나 기술리더 등 사회 지도층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에서도 기초과학 연구자에 대한 처우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허 박사는 "서울대, 하버드 등 명문대 물리학과에서 소위 '날렸던' 한국 친구들이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경우가 여럿 있다"며 "교수가 되거나 정부출연연구기관에 취직해도 월급이 월등히 많거나 처우가 좋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학문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아도 원하는 만큼의 대우를 받기 어렵다는 말이다.

○ 꼭 노벨상으로만 한국 과학 수준 평가할 필요 없어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상위원회가 4일 2022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를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알랭 아스페 프랑스 파리 사클레대 교수 겸 에콜폴리테크 교수, 존 클라우저 미국 존 클라우저 협회 창립자, 안톤 차일링거 오스트리아 빈대 교수. AP/연합뉴스 제공

"유럽의 잣대인 노벨상 만이 과학수준을 평가하는 지표일 필요는 없어요."

기초과학을 비롯한 과학기술 분야에 수십년간 적지 않은 예산을 투입해 왔지만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한명도 배출하지 못한다는 지적에 대해 허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웃나라인 일본과 중국의 노벨 과학상 수상 소식이 들려올 때 자조섞인 반응도 있었지만 올해 10월 3일부터 발표된 노벨 과학상 수상자 발표에 대한 관심은 이전만 못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허 박사는 "수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프랑스 같은 나라가 기초과학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당연하다"며 "엔지니어링 등 공학 분야의 경우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말했다. 굳이 노벨상이라는 유럽의 잣대를 국내 과학 수준을 평가하는 유일한 지표로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그는 한국의 과학이 가진 장점을 적극 살릴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허 박사는 "한국전쟁 이후 급격히 발전한 한국의 과학이 몇백 년의 역사를 가진 유럽의 연구실과 결코 같을 수 없다"며 "대신 한국은 빠르게 성과를 내기 위해 응용과학에 집중했고 그 결과 반도체 등 부문에서 세계 1위의 성과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계 1위의 지위는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게 허 박사의 생각이다. 그는 "첨단 연구도 계속해서 달려들지 않으면 1위 자리를 지키기 어렵다"며 "미국·중국·인도 등에 앞서기 위해 기술혁명을 이어나가는 일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소견을 밝혔다.

[이영애 기자 ya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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