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2022. 10. 15.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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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전주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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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일부 확대), 1799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이건 또 그리스·로마 이야기 어느 장면이야?"

1799년 12월 27일.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안 전시장. 한눈에 볼 수 없을 만큼 큰 그림을 본 사람들이 수군댑니다. "사비니의 여인들이잖아. 로마와 사비니 전쟁을 막으려고 나선…." 누군가가 함께 온 이들에게 말합니다.

"비열한 기회주의자라지만, 실력 하나는 기가 막히는군!"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나옵니다. "맞서 싸우자는 그림을 그려 프랑스 혁명에 불을 지핀 그자의 그림이야? 혁명 정부가 무너지고 옥살이를 1년 정도 했다더니 아예 딴사람이 됐네? 그런데도 또 감동을 안기는 게 악마의 재능이긴 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이도 있습니다. 그림 맞은편에는 이 작품만 한 큰 거울이 걸렸습니다. 사람들은 거울을 통해 그림 속 전쟁터 한가운데 있는 자신을 봅니다. 몇몇은 만감이 교차한 듯 주저앉고 눈물을 쏟아냅니다.

전시는 초대박이 납니다.

그 유명한 화가의 180도 변절 때문인지, 그림의 눈부신 작품성 덕분인지 전시장은 발 디딜 틈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입장료를 내야 이 작품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로는 생소한 일이었습니다. 미술사상 첫 '유료화' 실험이었지만 보란 듯 성공합니다. 이 화가는 돈을 쓸어 담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그렇게, 불굴의 야심가는 조용히 제3의 전성기를 꿈꿉니다.

이 화가의 이름은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입니다.

신고전주의 시대를 연 다비드는 그 덕분에 프랑스 격동의 흐름에서 늘 중심에 섰습니다. 자기 삶 또한 그림보다 더 그림처럼 극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영광과 몰락을 되풀이한 다비드의 생은 그 시절 프랑스의 역사를 집약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전쟁터 한가운데 파고든 여인들, 도대체 왜?
자크 루이 다비드,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1799

흰옷을 입은 금발 여성이 용감하게 전장 한복판에 섭니다.

결연합니다. 쭉 뻗은 두 팔은 거침없습니다. 벌어진 두 다리에선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입니다. 뿜어내는 패기는 무장한 남성들을 압도합니다. 그리스·로마 신화 속 여신 같습니다. 그녀의 새하얀 두 팔이 칼과 창, 방패보다 더 단단하게 느껴집니다. "그만!" 그녀의 고함이 메아리가 돼 전장 전역에 들리는 듯합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일부 확대), 1799
자크 루이 다비드,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일부 확대), 1799

그녀 주변 여성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전쟁을 막습니다.

흰 두건을 쓴 여성은 갓 태어난 아이를 보면서 이성을 찾으라는 양 높이 치켜들고 있습니다. 다른 여성은 칼을 든 전사의 다리에 아이를 안은 채 매달립니다. 검은 머리칼의 여성은 전쟁이 다 무슨 소용이 있냐는 듯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이들 말고도 수많은 여성이 맨몸으로 전쟁터 한가운데를 뚫고 옵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일부 확대), 1799

대치하는 근육질의 두 남성은 움찔합니다.

차마 칼을 휘두르지 못하고, 차마 창을 내던지지 못합니다. 일격을 가하기 직전 자세 그대로 굳었습니다. 그림 오른편의 말을 탄 군인은 칼을 거둡니다. 벗은 투구를 높이 든 채 "전쟁은 끝났다!"라고 외치는 병사들의 모습도 그려졌습니다. 이런 가운데, 아기들은 순진무구하게 서로 뒤엉켜 놉니다.

이 그림, 언뜻 봐도 교훈적입니다.

그림은 깨끗하고 정확합니다. 용기 있는 영웅의 등장과 결정적인 장면, 아름다운 결말의 암시만 담습니다. 목숨이 오가는 전쟁터를 보는데도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불필요한 해석은 애초에 막아뒀습니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강렬함도 없고, 눈이 부실 만큼의 화려함도 없습니다. 루브르 전시장에 걸렸던 이 작품, 다비드'사비니 여인들의 중재'입니다.

‘명징’한 신고전주의, 고대 도시 발굴 ‘날개’를 달다

다비드신고전주의 창시자입니다.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 유행한 신고전주의는 그리스·로마 등 고대 양식의 부활을 목표로 합니다. 특징은 명징함입니다.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주제, 고대 설화 등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소재, 명확한 윤곽과 균형 잡힌 구도 등 깔끔한 표현 기법 등입니다. 무뚝뚝한 양식인 듯하지만 의외로 호소력이 짙습니다. 가끔은 '담담한 눈물'이 '울부짖는 호소'보다 더 큰 울림을 주는 법입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신고전주의는 로코코에 반기를 든 사조입니다.

우아함을 내걸고 퍼진 로코코는 차츰 사치와 향락에 젖습니다. 퇴폐와 타락을 거듭한 끝에 천박한 화려함이 남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그렇게 같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선을 넘은 겁니다. 사람들은 주렁주렁한 장식만 남은 로코코에 회의감을 갖습니다. 옛것을 그리워합니다. 허례허식 없는 원초적인 아름다움, 유희를 넘어 가르침과 깨달음을 안겨주는 고전을 돌아보게 됩니다. 세상은 이렇게 다시 돌고 돕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브루투스의 아들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릭토르들

이런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때마침 한 소식이 들립니다.

고대 그리스 도시고고학적 발굴이 이뤄졌다는 겁니다. 더 놀라운 소문도 돕니다.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등 그 시절 도시의 예술품이 지금보다 더 낫다는 겁니다. 다들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늦었지만, 내 아이는 선진 문명을 맛봤으면 좋겠다.' 이탈리아는 유학의 성지가 됩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테르모필라이의 레오니다스

그랜드 투어(Grand Tour) 시대가 열립니다.

직접 가서 본 고대 도시는 눈부셨습니다. 모든 예술품이 가슴 뛰는 사연을 품었습니다. 엄격하고 균형 잡힌 양식은 요즘 시대의 칼 군무를 보는 듯한 감동을 안겼습니다. 이제 이탈리아는 지식인이라면 꼭 가봐야 할 장소가 됩니다. 이탈리아 여행을 위한 가이드북이 나옵니다. "이탈리아에 가야 진정한 문화인이 된다!"는 말이 돕니다. 다녀오지 못하면 대화에 끼지도 못합니다. 그렇게 1년 이상 그랜드 투어를 다녀온 이들은 로코코를 더 한심하게 봅니다. 이탈리아 물을 잔뜩 마시고 온 이들 눈에 로코코는 알맹이 없는 사치였습니다.

신고전주의의 교본, 이 그림이 그렇게 되리라곤…
자크 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

그렇다면 다비드는 어떻게 신고전주의 사령탑에 설 수 있었을까요.

다비드의 작품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4)'신고전주의 시대를 연 그림입니다. 프랑스 왕 루이 16세가 다비드에게 의뢰한 작품입니다. 루이 16세는 신고전주의의 바람이 저 멀리서 불어오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는 욕을 먹고 있는 로코코 말고, 신선한 신고전주의를 통해 자신을 선전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다비드는 이미 프랑스 왕립 미술 아카데미 사상 최고의 역사 화가였는데요. 루이 16세는 다비드야말로 신고전주의의 '꿈틀댐'을 민감하게 느끼고 있을 화가라고 본 겁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일부 확대), 1784

다비드는 루이 16세의 기대에 부응합니다.

무장한 근육질의 세 남성이 검을 향해 거침없이 팔을 뻗습니다. 한쪽에선 여인들이 슬퍼합니다. 다비드가 고전 로마사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고 그린 작품입니다. 호라티우스 형제설화는 이렇습니다. 아직 도시국가였던 로마는 같은 도시국가인 알바를 칩니다. 전쟁이 길어집니다. 결국 두 나라는 각각 최고의 전사를 뽑습니다. 이들의 대결 결과로 전쟁을 끝내자고 거래합니다. 로마는 호라티우스 가문의 삼 형제, 알바는 쿠라티우스 가문의 삼 형제에 국가의 운명을 맡깁니다. 결투는 팽팽합니다. 호라티우스 가문의 두 용사가 죽고, 1대 3의 극한 대치가 이어집니다. 호라티우스의 마지막 용사는 신과 같은 기적으로 쿠라티우스 가문의 세 용사를 모두 쓰러뜨립니다. 그는 역전의 영웅이 됩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일부 확대), 1784

그런데요. 사실 두 가문은 사돈 관계였습니다.

국가를 위해 가족이 갈라져 목숨을 건 결투를 한 겁니다. 그림 속 여인들의 모습이 이제 이해됩니다. 한 여성은 쿠라티우스 가문의 사비나, 또 다른 여성은 호라티우스 가문의 딸이자 곧 쿠라티우스 가문으로 시집을 갈 카밀라입니다. 검을 건네주는 세 용사의 아버지는 "로마 왕국의 아들이자 제 아들인 삼 형제가 로마를 대표해 전쟁터로 갑니다. 상대는 천하무적의 쿠라티우스 형제입니다. 하지만,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제 아들들이 이겨서 살아남게 해주세요"라고 기도 중입니다. 다비드는 이 비극을 담담하게 그립니다. 화려한 색채와 장식을 모두 거뒀는데 가슴이 쿵쿵 뜁니다. 다비드는 이 작품을 통해 신고전주의의 덕목을 체계화합니다. 신고전주의의 교과서가 탄생한 겁니다.

그림을 받아서 든 루이 16세는 방긋 웃습니다.

국가를 위해 무심하게 목숨을 거는 그림 속 용사들을 보고 시민의 애국심이 활활 타오를 것으로 봅니다. 나라를 위한 길이라면 가족마저 뒤로하는 이들을 보고 뜨거운 피가 들끓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루이 16세의 시기는 왕실 권위가 추락하던 시대였습니다. 왕과 귀족의 사치가 곪아 터진 겁니다. 이 그림은 1785년 프랑스 파리 살롱에서 베일을 벗습니다. 사람들은 로코코에서 볼 수 없던 묵직함에 사로잡힙니다. 로코코의 종말이었습니다. 신고전주의 특유의 호소력은 루이 16세의 기대처럼 보는 이의 가슴에 불을 지핍니다. 그러나 그 열기는 왕의 생각과는 다르게 번지는데….

제1의 전성기 : 루이 16세의 남자
자크 루이 다비드, 파리스와 헬레네

신고전주의의 아버지, 시대 흐름을 읽은 당대 최고의 화가. 하지만 혁명의 배신자, 비열한 기회주의자.

확실한 건 다비드는 두뇌 회전이 빨랐습니다. 최고의 영예, 최악의 시련을 모두 겪었지만 결국에는 자기 자리를 찾아냅니다. 왕정 시절 루이 16세의 남자, 왕정을 내몬 프랑스 혁명의 주역 로베스피에르의 친구, 혁명의 이상을 뒤엎은 나폴레옹의 궁정 화가 등 항상 중심에 섭니다. 신고전주의 특유의 호소력이 선전 도구 역할을 톡톡하게 한 덕입니다. 다비드의 그림은 그 시절 프랑스 연대기로 봐도 될 수준입니다.

다비드는 1748년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잘나가는 금속상이었고, 어머니는 유명 건축가 집안 출신에 부족함 없이 자란 숙녀였습니다. 다비드의 아버지는 다비드가 고작 아홉 살 때 결투를 하다가 죽습니다. 다비드는 아버지의 허무한 최후에 충격을 받습니다. 다비드가 훗날 왕(루이 16세)에서 혁명 정부(로베스피에르), 다시 황제(나폴레옹)로 아버지 격 권위자를 찾아다닌 일은 그 시절 상실감을 떨치지 못한 탓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프랑수아 부셰, 마담 퐁피두르

다비드는 어릴 적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입니다.

로코코 미술의 권위자인 프랑수아 부셰가 그런 다비드를 눈여겨봅니다. 부셰는 늙은 자신 대신 조제프 마리 비엔에게 다비드를 소개합니다. 부셰보다 더 개혁론자였던 비엔은 다비드에게 로코코 밖 세상을 엿보게 합니다. 부셰의 혜안, 비엔의 대담함이 다비드에게 신고전주의 씨앗을 안긴 겁니다. 1765년부터 비엔 밑에 있던 다비드는 1770~1772년 3차례 미술 아카데미 최고상(로마상)에 도전합니다. 매번 고배를 마십니다. 상실감에 젖은 다비드는 이쯤 방문을 막은 채 극단적 선택도 시도했습니다.

조제프 마리 비엔, 잠자는 닻
자크 루이 다비드, 헥토르의 시신 앞에서 슬픔에 잠긴 안드로마케

다비드는 1774년 드디어 로마상을 받고(그 해 공교롭게 비엔이 아카데미 원장이었음) 이탈리아로 유학을 하러 갑니다.

5년간 공부 끝에 돌아온 다비드는 아카데미 입회작으로 고대 트로이 전쟁을 배경의 그림(헥토르의 시신 앞에서 슬픔에 잠긴 안드로마케)을 낼 만큼 고전에 심취합니다. 바로크 선구자인 카라바조, 안니발레 카라치에 푹 빠져 둘의 요동치는 개성도 연구합니다. 이 또한 고전 너머의 신고전주의를 다지는 초석이 됩니다. 다비드는 1780년 아카데미 정회원이 됩니다. 직후 루이 16세의 눈에 들어 궁전으로 갑니다. 출세한 겁니다.

제2의 전성기 : 혁명의 동지, 지도자의 친구
자크 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일부 확대), 1784

그런 다비드는 루이 16세의 부탁을 받아 1784년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내놓고, 파란을 이끕니다.

루이 16세는 시민이 이 그림에서 '왕에 대한 충성심'을 느끼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시민은 이 그림을 통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다졌습니다. 루이 16세와 귀족들을 위한 프랑스 말고, 우리를 위한 프랑스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불꽃이 일렁거립니다. 이 그림은 1789년에 터진 프랑스 혁명의 상징이 됩니다. 혁명 정부가 세워질 때 지도자들이 이 그림 속 삼 형제와 같은 자세로 맹세할 정도였습니다. 다비드는 후일 "혁명의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지만 이미 파란의 불꽃은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그런데요. 프랑스 혁명이 터지고 다비드의 행동은 의외입니다.

다비드는 왕정에서 받은 혜택을 다 내던지고 혁명 정부 편에 섭니다. 심지어 온건파인 지롱드도 아닌 급진파인 자코뱅에 몸담습니다. 자신의 후원자였던 루이 16세와 왕비 사형에도 찬성합니다. 다비드가 자코뱅 지도자인 로베스피에르와 친했던 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180도 '전향'한 이유는 지금도 논쟁 거리입니다. 다비드는 혁명 정부 시절에도 잘나갑니다. 혁명 정부 의장까지 오릅니다. 다비드가 팔을 걷고 나선 덕에 혁명의 시대 때도 문화재는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왕을 위해 그림을 그린 다비드가 이제 혁명 정부를 선전하기 위해 붓을 듭니다.

'마라의 죽음'이 대표작입니다. 마라는 다비드의 혁명 동지입니다. 마라는 고질병인 건선(乾癬) 탓에 욕조에서 일하기로 유명했습니다. 1793년 7월, 자코뱅에 불만을 품은 한 여성이 그런 마라를 암살합니다. 그림 속 마라는 성인 내지 현인 같습니다. 하이라이트는 그의 손에 들린 편지입니다. '저는 매우 가난하고 비참해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라는 글이 쓰였습니다. 다비드는 이 그림을 통해 마라를 위인으로 만듭니다. 숭고한 죽음을 맞은 '시민의 종'으로 추켜세웁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일부 확대)

하지만 혁명 정부가 휘두른 공포 정치는 역풍을 부릅니다.

민심의 칼끝은 이제 혁명 정부를 향합니다. 1794년, 로베스피에르 체제가 무너집니다. 자코뱅의 지도자가 하나둘 처형됩니다. 다비드는 사형 선고를 면한 채 1년가량 징역살이를 합니다. 그런 다비드는 감옥에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쓰고, 끊임없이 중얼거립니다. 그림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다음 작품을 구상하고 있는 듯, 아직 내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양….

왕정도, 혁명정부도 겪은 그의 외침 “이제 그만!”

다시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봅니다.

로마 건국 설화의 한 장면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암늑대의 젖을 먹고 큰 로마 초대 왕 로물루스는 로마의 제국화를 꿈꿉니다. 인구 증가가 절실했습니다. 사람이 많아야 생산력도, 군사력도 늘기 때문입니다. 여성 수가 부족하자 로물루스는 이웃 부족인 사비니를 노립니다. 잔치를 열어 사비니 여인들을 싹 다 부른 뒤 납치합니다. 뒤통수를 맞은 사비니의 남성들은 속수무책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일부 확대·타티우스의 모습), 1799
자크 루이 다비드,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일부 확대·로물루스의 모습), 1799

로마와 사비니는 3년 뒤 전장에서 만납니다.

사비니의 남성들은 '피의 잔치'였던 그날 이후 수의만 입은 채 이를 바득바득 갈았습니다. 그림 중앙을 보면 서로 칼과 창을 겨눈 채 마주 선 두 전사가 있는데요. 왼쪽사비니 대장 타티우스, 오른쪽로마 왕 로물루스입니다. 로물루스의 방패에는 'ROMA'라는 글과 함께 암늑대의 젖을 문 로물루스와 쌍둥이 형제 레무스의 모습이 박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의 주인공은 두 사람이 아닙니다. 이들 사이에 선 사비니의 여성 헤르실리아입니다.

헤르실리아는 타티우스의 딸이자, 이제는 로물루스의 아내였습니다. 헤르실리아는 이 전쟁에서 승자가 없을 것을 압니다. 피의 잔치는 돌이킬 수 없는 일입니다. 이대로 가면 혈육이 죽든, 남편이 죽든, 아니면 둘 다 죽을 수 있는 위기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머니예요. 우리 아이들은 당신의 아들, 손자입니다. (…) 우리가 싸움의 원인이지요. 우리 때문에 우리 남편과 아버지가 다치거나 죽어 넘어졌어요. 우리는 과부 혹은 고아가 되기보다, 차라리 우리가 먼저 죽어버리겠어요." 헤르실리아와 그녀를 따른 여성들이 고함칩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전쟁터가 조용해집니다. 전사들은 조용히 무기를 내려놓습니다. 그렇게, 전쟁은 마무리됩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1799

다비드는 감옥에서 나온 뒤 홀린 사람처럼 이 그림을 그립니다.

다비드는 1799년, 나폴레옹의 독재를 인정하는 통령정부 헌법이 선포되고 사흘 후 이 작품을 공개합니다. "다 됐고, 그만 싸우자!"고 말하는 겁니다. 다비드의 그림 속 건물은 바스티유 감옥과 비슷합니다. 그 시절로부터 10년 전인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시발점은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이었습니다. 왕정도 답이 없었지만, 그렇게 해 이뤄진 혁명도 끝내 피로 물들었습니다. 다비드는 모든 체제, 모든 계층의 화해를 종용한 겁니다. 역사의 할큄 속 상처 입은 시민들은 그림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일각에선 다비드가 나폴레옹에게 줄을 대려고 그를 헤르실리아에게 빗대 그렸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비드가 이 그림을 통해 왕정과 혁명 정부에 가담한 과거를 세탁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마지막 전성기 : 나폴레옹의 '제1 화가', 그러나

다비드는 부활합니다.

다비드는 이제 나폴레옹의 '제1 화가'가 됩니다. 시대는 또 그를 택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체제 안정화를 위해 신고전주의의 담담한 호소력이 필요했습니다. 다비드는 그런 면에서 대체 불가능한 화가였습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생베르나르 고개의 나폴레옹)

다비드는 이제 나폴레옹 초상화를 계속 그립니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1801)'은 한 번쯤은 봤을 작품입니다. 강렬한 눈빛과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얼굴, 화려한 복장과 늠름한 자태, 전쟁터를 마구 휘저을 것 같은 백마…. 다비드는 나폴레옹에게 압도적인 위엄을 심어줬습니다. "알프스 행군은 말도 안 되게 힘든 일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침착하고 용감하게 말을 타 부대를 지휘하는 내 모습을 그려보시오"라는 나폴레옹의 말을 완벽하게 따른 결과입니다. 나폴레옹보다 먼저 알프스를 넘은 두 전설, 한니발과 샤를마뉴의 이름을 새겨준 건 서비스입니다. 실제로는 빨간 망토도, 백마도 없었다고 하지요. 나폴레옹은 이 그림에 만족해 복사본을 여러 장 만든 뒤 점령지마다 걸었다고 합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하지만 왕정, 혁명정부에 이어 누린 다비드의 '제3의 전성기'도 영원하지 못했습니다.

다비드의 영광은 1816년, 나폴레옹의 퇴위와 함께 사라집니다. 다비드는 모든 걸 내려놓고 벨기에로 망명합니다. 다시 꾸려진 프랑스 왕정으로부터 "돌아와 주시오!"라는 요청을 받지만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한때 누구보다 피가 들끓었던 다비드는, 그렇게 스스로 불씨를 꺼뜨려 갑니다. 다비드는 1825년 77세의 나이로 벨기에 브뤼셀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도 다비드가 격동의 모든 순간 거물로 있으며 프랑스의 예술품을 보존한 덕에, 프랑스 파리는 곧 문화예술 중심지로 꽃필 수 있었습니다.

다비드가 죽은 후 그의 작품도 급속도로 잊힙니다.

사람들은 이를 기회주의자의 말로라고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 속 숭고한 아름다움은 바닥을 뚫고 나옵니다. 지난 2008년에는 그의 작은 초상화 한 점이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700만달러(당시 약 80억원)에 팔렸습니다. 이제는 다비드에 관심 없는 사람조차 그의 작품 한두 점은 알고 있습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초상화

왜 그러셨습니까. 다비드의 변화무쌍한 그림을 보고 묻습니다.

다비드의 속마음을 짐작해 답해봅니다. 내가 줏대 없이 진영을 넘나든 까닭은 이상과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시대 또한 나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오. 풍운아의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읽는 순서〉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 신고전주의 선구자

8)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9)“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10)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1)“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2)‘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3)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4)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5)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빈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6)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7)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심화편 (2022. 9. 3.)

18)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19)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야수주의·입체주의 심화 편 (2022. 9. 10.)

20)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1)“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2)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행위예술 대모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읽는 순서〉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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