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점령군+친일파가 만든 대한민국? 위험천만한 野대표의 역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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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일 합동 훈련에 대해 “극단적 친일 행위”라며 뜻밖의 비판을 했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11일 이런 발언을 했습니다. “시대착오적인 종북몰이와 색깔론 공세를 펴고 있다. 해방 후 친일파가 했던 행태와 다를 바가 없다.” 상당히 묘한 여운이 남는 말입니다. ‘종북(從北)을 지적하면 친일파’라고? 그렇다면 반공의 기치를 들었던 대한민국의 설립자들이 친일파라는 말인가요?
자, ‘친일’이란 말이 나왔으니 여기서 돌이켜봐야 할 이재명 대표의 발언이 있습니다. 그는 지난해 7월 1일 대선 출마를 선언한 뒤 고향인 경북 안동을 찾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친일 세력과 미(美) 점령군의 합작으로 깨끗하게 출발하지 못했던 나라입니다.”
이것은 이재명이란 인물의 한국현대사를 보는 시각을 잘 드러내 주는 말입니다. 대한민국의 수립 주체를 ①미 점령군 ②친일 세력이라는 두 요소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먼저 상식에서 벗어난 이념적인 발언을 한 뒤→그것에 대해 비판을 받으면→'철지난 색깔론 공세’ 운운한다는 도식(圖式) 역시 결코 이번에 처음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보다 조금 앞서 김원웅 전 광복회장은 고교생 대상 강연에서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이라는 취지의 설명을 해서 물의를 빚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재명의 발언은 김원웅을 이어받은 것’이라는 비판이 일어나며 여론이 악화되자 이재명 대표(당시 경기지사)는 뒤늦게 “미군과 소련군 모두 점령군”이라고 말했습니다.
어쨌거나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과 함께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은 ‘점령군’이 맞기는 맞는 것 아닐까요? 그러나 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한국정치회장과 국회입법조사처장을 지낸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미군을 ‘점령군’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점령군이라는 것은 A라는 한 국가의 군대가 B라는 다른 국가를 물리적으로 지배하고 있을 때 B의 입장에서 A의 군대를 지칭하는 용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1945년 일본이 항복하던 당시 상황에서 한반도에는 국제적으로 승인된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한반도는 일본이 주권을 행사하는 식민지였고 일본군에 맞선 무장 투쟁 세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반도 주둔 일본군 병력은 34만7000여 명이었고, 이 중에서 남한에 23만명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항복을 받고 무장을 해제하기 위해선 반드시 연합군이 한반도를 물리적으로 ‘점령’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군이 ‘점령군’이라는 말은 일본군의 입장에서 볼 때만 가능한 용어입니다. 미군과 소련군의 ‘점령’ 대상은 무장한 일본군이지 한반도에 사는 조선인(한국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미·소 군대 모두 조선인의 입장에선 ‘해방군’에 가까운 군대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재명 대표의 ‘점령군’ 인식은 오히려 ‘일본의 입장에서 미군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만 가능한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학자의 견해는 어떨까요.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을 지낸 중견 정치외교사학자인 김명섭 연세대 교수는 ‘점령군’ 발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시의 ‘점령’이란 미·소 모두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일본 재산을 몰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가 맞은 해방이 연합국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는 분명한 사실을 자꾸 잊기 때문에 혼동이 생기는 것이다. 일본에서 부르는 ‘천황’을 우리가 그렇게 부르지 않는 것처럼 ‘점령군’도 우리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써서는 안되는 용어다.”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하지 못했다’는 이 대표의 발언에 대해서도 김 교수는 할 말이 많았습니다. “깨끗한 정치 현실이라는 게 과연 어디에 있는가! 주어진 현실을 얼마나 개선시킬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정치인의 역할이다. 만약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깨끗한’ 상황을 현실에서 실현하겠다고 한다면 대단히 위험한 정치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미 점령군이 친일 세력과 합작해 대한민국을 이뤘다’는 생각에는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요. 대한민국 초대 내각의 구성원을 보면 임시정부의 법무·재무총장을 지낸 이시영 부통령, 광복군 참모장 출신 이범석 총리 겸 국방장관 등 독립운동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내각에선 친일 인사들이 제외됐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식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새 국가 건설에 참여할 수 있는 길 또한 열어 줬습니다. 이 같은 상황을 두고 ‘대한민국 수립의 주도 세력이 친일파였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가 아니라 ‘미국의 골칫거리’였습니다. 이승만은 줄곧 미 군정과 긴장 관계에 있었고, 좌우합작으로 정부를 수립하는 선에서 발을 빼려고 했던 미 군정의 속셈을 꿰뚫고 반대했습니다. 한반도에서 발을 빼고 싶어하는 미국을 6·25 전쟁 이후 한미상호조약으로 붙들어맨 주역도 이승만이었습니다. 만약 이승만이 미국을 추종했더라면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심지연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친일 세력이 미국과 결탁해 벌인 일이 아니라 대다수 국민이 참여한 5·10 선거를 통해 이뤄진 것이다. 유연하게 보완해 나갈 수 있는 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했기 때문에 지금 남북한 체제가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김명섭 교수의 말을 들어보죠. “출발점에선 북한이 훨씬 잘살았다. 몰수한 일본 재산 52억 달러 중 남한에 23억 달러, 북한에 29억 달러가 돌아갔다. 개인의 자유와 창조성을 억압하고 집단적 노동력을 응집하는 체제는, 단기적으로는 빨리 발전하는 것 같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그 점은 소련도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남한은 한때 독재체제가 존재했다고 해도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한 헌법의 가치를 존중했고, 민주주의를 실현해 나갈 유연성이 있었다.”
그런데 왜 도대체 유력 정치인이 이런 수준의 발언을 하는 것인지 물어봤습니다.
김명섭 교수: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불공정과 불이익의 원인에 대해 ‘역사적인 뿌리가 잘못됐기 때문’이라고 얘기해 준다면 상당한 응집력과 동원력을 발휘하게 된다. 하지만 이념을 통한 지지 세력 결집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심지연 교수: “한쪽으로 치우친 역사 해석을 내놓은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색깔론으로 폄훼하는 것은 지나치다. 철지난 이념 사관을 먼저 제기한 쪽이 누군가. ‘색깔론’은 그것을 말하는 순간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민주화 운동가를 ‘용공(容共)’으로 몰았던 일을 연상시키며 자신이 ‘부당하게 핍박받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효과가 있다.”
이 학자들이 이런 말을 한 것은 2021년 7월의 일인데, 2022년 10월 현재도 여전히 유효한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을 지닌 사람이 다른 나라도 아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려 한다는 것도 아직 그대로겠지요. 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요? 바로 정확히 제가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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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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