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사장을 사장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노동자

한겨레 2022. 10. 12.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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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봉투법']'노란봉투법' 릴레이 기고 3
지난 5월27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민주노총 철도노조 코레일네트웍스지부·철도고객센터지부 등이 파업투쟁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왜냐면] 정명재 |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국철도노동조합 코레일네트웍스지부장

지난주 유최안 대우조선 하청노동자(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가 올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가로·세로·높이 1㎡ 투쟁 시기에도 만나지 못했던 박두선 대우조선해양 사장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고용노동부 국정감사 현장에서 만나게 돼 만감이 교차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민간이든 공공 부문이든 비정규직 노동자가 진짜 사장을 만나 교섭은커녕 대화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와 마찬가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여름 산과 바다로 향했던 여행을 떠올리면서, 코레일 자회사 노동자의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저와 함께 서울 구로구 고척동에서 부산 해운대로 피서를 떠나는 과정을 생각해봅시다. 먼저 철도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열차시간을 확인합니다. 집에서 가까운 구일역에서 전철을 타고 서울역에 도착해 열차표를 사고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싣습니다. 부산역에 도착해서는 주차장에서 렌트한 차를 인계받아 해운대로 이동합니다. 부산 특산품을 산 뒤 케이티엑스(KTX)특송을 이용해 반나절 만에 서울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마주했을 철도고객센터 상담사, 구일역 역무원, 전철 내 질서지킴이, 서울역과 부산역의 승차권 발매 역무원, 역사 주차관리원, 케이티엑스특송 상담사와 배송원들은 코레일 직원들이 아닙니다. 법적으로는 코레일의 자회사 ‘코레일네트웍스’ 소속 노동자들입니다. 코레일을 이용해 여행을 떠나고 물건을 보내는 동안 어느 하나도, 자회사 노동자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들 노동자에게 여행이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입니다. 근속 20년차 노동자와 1년차 노동자가 모두 똑같은 최저임금을 받고 있어 제대로 된 휴가는 엄두조차 내지 못합니다. 특히나 올해 같은 고물가 시대에는 말이죠.

더 큰 문제는 휴가는 꿈도 꾸지 못하게 하는 노동 환경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진짜 사장이 있는 원청 ‘코레일’에 있습니다. 하청 노동자들의 임금과 고용, 처우에 대한 실질적인 권한과 책임이 있는 진짜 사장인 코레일과 정부가 사용자 책임을 회피하면 할수록 자회사 노동자들의 삶은 열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인력 부족의 악순환이 끝없이 반복됩니다. 부족한 인력 때문에 대체근무와 연장근무가 일상화된 상황에서도, 원청은 코로나 시기 철도고객센터 상담원과 여객승차권 발매 역무원 인력 감축을 강요했습니다. 이로 인해 업무 강도는 늘고, 인건비 감축은 하청회사 구조조정으로 이어집니다.

하청업체 경영진과 교섭테이블에 앉아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하청자회사 코레일네트웍스와 교섭할 때면 “기획재정부 지침 때문에 최저임금 이상은 줄 수 없다” “인력 충원은 원청이 결정할 일이다” “원청 허락 없이 위탁계약서를 공개할 수 없다”는 말만 듣게 될 뿐입니다.

하청회사 경영진의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코레일네트웍스 노동자의 노동 조건을 결정할 수 있는 실제 권한은 원청이자 모회사인 코레일과 정부에 있습니다. 진짜 사장은 자회사 이사 6명 중 4명을 전·현직 코레일 관계자들로 채워두고, 자회사 경영 전반에 지배·개입하고 있는 원청 코레일의 사장입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의 중간 착취를 외면하고 있는 ‘정부’입니다.

핵심적인 열차 서비스도 원·하청으로 노동자를 나누고 관리하는 태도는 기차에 끊어진 철도 위를 달리라고 하는 꼴입니다. 코레일과 정부는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할 철도 업무의 특성을 무시하고 역무원, 관제사, 운전원, 승무원 등을 인위적으로 원청과 하청으로 나눠 관리하면서 ‘합법적’ 차별을 일삼고, 결국 시민의 안전까지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의 답은 결국 하나로 모입니다. 원청 코레일과 직접 교섭하고, 노동 조건을 결정할 수 있을 때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코레일네트웍스 노동자들에게 노조법 2조 개정은 진짜 사장을 찾는 법입니다. 실제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을 결정하는 진짜 사장을 눈앞에 두고도 사장이라 부르지 못하는 우리의 처지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노조법 2조 ‘사용자 정의’의 개정은 사장을 사장이라 부를 수 있도록 하는, 하청노동자들이 ‘홍길동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일입니다. 코레일네트웍스 노동자들이 진짜 사장을 찾을 수 있도록, 그래서 유기적으로 잘 연결된 철로를 달리며 고객을 안전하게 수송할 수 있게 하는 일에 함께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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