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의 길

한겨레 2022. 10. 12. 18:4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세상읽기]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달 28일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국민의힘 당헌 효력정지 가처분신청 사건 심문을 마친 뒤 청사를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세상읽기] 손아람 | 작가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낸 비대위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이 법원에서 기각됐다. 국민의힘 윤리위는 당원권 정지 1년 추가 징계를 결정했다. 일련의 사태 속에서 시선을 끄는 장면이 있었다. 입장이 다른 당사자들이 경쟁적으로 끄집어낸 ‘자유’의 논변이다.

시작은 이준석 전 대표였다. 그는 지난달 중순 “양두구육 표현을 썼다고 징계절차를 개시한다”며 유엔 인권보호관 출신인 이양희 윤리위원장 앞에 유엔 인권규범 제19조 “모든 사람은 의견과 표현의 자유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구절을 던져놓았다. 공교롭게도 윤석열 대통령이 불과 며칠 뒤 유엔본부를 방문했다. 기조연설의 화두 역시 자유였다. ‘자유’란 단어를 수십번씩 강조한 연설의 절정은 바로 이 대목이다. “한 국가 내에서 어느 개인의 자유가 위협받을 때, 공동체 구성원들이 연대해서 그 위협을 제거하고 자유를 지켜야 한다.”

이준석 전 대표를 염두에 두고 준비한 연설일 리는 없겠지만, 연단에 선 윤 대통령이 잠시라도 이 전 대표를 떠올리긴 했을까? 대통령이 말한 ‘위협받는 개인의 자유’에는 이 전 대표의 자유도 포함되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공동체 구성원들이 연대해서 제거해야 할 자유에의 위협’이 바로 이 전 대표일까?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대통령 연설에 즉시 반응을 보였다. “유엔에서 대통령은 자유를 팔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윤 대통령의 자유정신을 짓밟는 만행이 벌어지고 있다.”

자유에 관한 홍준표 대구시장의 의견은 여기서 갈라선다. 그에 따르면 “표현의 자유가 있듯이 징계의 자유도 있다.” 표현의 자유도 내재적 한계를 넘어서면 보호받을 수 없으며, 자유에 반한 자유를 억압할 자유 역시 자유의 일부라는 것이다.

더 나아갔다면 윤 대통령 지지자들은 아마 ‘양두구육’의 자유를 주장했을 것이고, 이 전 대표 지지자들은 ‘내부 총질’의 자유를 내세워 맞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시답잖은 말장난 같은 각각의 발언은 사실 자유의 역사만큼 오래된 아이러니를 효과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자유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자유인가? 자유와 자유가 충돌할 때 누가 더 자유인가? 아니면 그 상황 자체가 자유인가?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를 정의하는 대신 자유에 반하는 것을 먼저 정의하는 쪽을 선호한다. 신자유주의 이론의 대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즐겨 쓰는 수사론이기도 하다. 그에 따르면 ①완전무결한 윤리규범은 정의하거나 합의될 수 없다. ②당위에 따라 사회적 결정을 지배하려는 시도는 존재하지도 않는 윤리를 강요한다. ③이런 시도는 그 과정에서 반드시 전체주의로 귀결된다. 따라서 하이에크는 사회주의를 ‘노예의 길’로 불렀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이 역시 순환논증에 머물 뿐이다. 하이에크에게 반자유는 자유를 부정하는 모든 것이며 자유는 반자유가 아닌 어떤 것이다. 이것은 자유라는 개념에 내포된 태생적 역설과도 같다. 완전무결한 윤리규범을 정의할 수 없다면 자유 그 자체도 완전무결하게 정의할 수 없기에 필연적인 다툼이 벌어진다. 누군가 말한다. “당신의 주장은 자유에 반한다!” 상대는 “지금 내 자유를 억압하는가?”라고 되묻는다. 다시 반박이 돌아온다. “그럼 당신에게만 나를 억압할 자유가 있고 나에게는 당신을 억압할 자유가 없다는 건가?”

끝없이 꼬리를 무는 자유의 다툼도 언젠가 결론에 도달해 승부가 가려진다. 모두 자유롭게 논변하고 모두 자유롭게 격돌한 끝에, 패자는 그 대가로 자유를 박탈당한다. 누군가는 징계를 당하고 누군가는 당직을 잃는다. 그런데 그는 어떤 공동체가 자유롭지 못해서 패한 게 아니다. 너무 자유로워서 패했다. 완전무결한 윤리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분위기가 팽배하기에 진 것이다.

그런 곳에서는 완전무결한 윤리규범 대신 완전무결한 자연의 법칙이 쉽게 정의된다. ‘절대적인 자유 아래서는 약자가 늘 먹힌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확인한 진짜 ‘노예의 길’은 하이에크의 관념적 상상과는 달리 이런 모습에 가까웠다. 그 길의 재현이 자유주의 노선의 한국 총본산이자, 한때 당명에까지 ‘자유’를 달았으며, 지금 국회에서 노동자의 파업할 자유를 기업이 자유롭게 탄압할 권리를 주장하는 어떤 정당에서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