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1의 목소리] 배토와 잔디관리 '캐디 공짜노동' 언제까지 해야 하나요

한겨레 2022. 10. 12.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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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배토 작업과 스페어 캐디 근무에는 관행적으로 아무런 대가가 지급되지 않았는데, 내가 일하는 화성을 비롯해 천안, 김해 상록골프장 캐디들이 노조를 통해 무급노동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임금 지급을 요구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게티이미지뱅크

김리현 | 전국여성노동조합 상록CC 분회 조합원

새벽 3시30분.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진다. 한여름에는 5시부터 첫팀 라운드가 시작되는데, 습관이 돼 여름이 지나도 일찍 잠에서 깬다.

출근해서는 라운드 내내 홀마다 특징을 설명하고, 고객 안전을 살핀다. 한팀 고객 4명 모두에게 공을 칠 때 방향과 거리, 공의 위치를 알려주고 클럽을 닦아 전달한다. 그린 밖으로 나간 볼을 찾고, 볼을 닦는다. 공이 가는 방향인 그린라이를 읽어주고, 스코어를 적는다. 여름날 땡볕 아래서, 쏟아지는 빗속에서, 짙은 안개 낀 새벽에도, 한겨울 영하의 눈밭에서도 항상 같은 일을 한다. 그렇게 5시간 동안 18홀을 돌고 나면 고객 한명당 3만2500원씩, 수고비(캐디피) 13만원을 받는다.

20년 전 캐디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직업을 숨기고 싶었다. 캐디를 보호하는 시스템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새벽 첫팀으로 밤새 술을 마신 만취 고객을 만났다. 골프장에서는 공을 치다가 함부로 앞으로 나서거나 금지구역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 이를 어긴 만취 고객을 제지했더니, 욕설이 돌아왔다. ‘지금 저한테 욕하셨냐?’고 되받아 물으면서 고객과 마찰이 생겼고, 회사는 새벽 첫팀부터 마지막팀 경기가 있는 오후 7~8시까지 일은 주지 않으면서 대기하도록 하는 ‘벌당’ 10일 처분을 내렸다. 그렇게 첫 골프장을 그만뒀다.

그래도 확 트인 자연에서 계절이 변하는 것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캐디 일이 좋다. 대부분 고객은 보통의 선한 사람들이고, 매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는 게 즐겁다.

몇년 전부터 특수고용직인 우리 캐디들도 산재보험과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있게 됐다. 지금 일하는 골프장에는 캐디노동조합이 있다. 캐디노조는 회사와 원만히 잘 지내왔다. 2년에 한번씩 바뀌는 사장님들은 노조를 존중해주고 캐디 노동에도 공감해줬다. 캐디 일을 시작한 이래 가장 행복하고 안정감 있게 일해온 날들이었다. 하지만 지난 6월 단체협상이 시작되면서, 말로만 듣던 노조 탄압이 시작된 것 같다.

골퍼가 샷을 하면 잔디가 파이고, 그 파인 부분을 메꾸는 배토 작업을 해야 하는데 이 일이 캐디 몫이다. 고객이 많아 바로 배토 작업을 하기 어려운 요즘은 라운드가 끝난 뒤 회사가 지정한 홀에서 배토 작업을 한다. 또 두세달에 한번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사고를 대비해 ‘스페어 캐디’로 골프장에서 대기해야 한다. 배토 작업과 스페어 캐디 근무에는 관행적으로 아무런 대가가 지급되지 않았는데, 내가 일하는 화성을 비롯해 천안, 김해 상록골프장 캐디들이 노조를 통해 무급노동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임금 지급을 요구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회사는 노동조합이 없는 다른 지역 골프장의 캐디피는 인상했지만, 노동조합이 있는 골프장에서는 단체협상에 구상권 청구 조항을 넣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고 나섰다. 골프장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고에서 캐디의 과실 책임을 따져 캐디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회사는 캐디피를 인상하겠으니 구상권 조항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노동조건이 나빠지는 걸 일방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기에, 나와 내 동료들은 지금 합법적으로 쟁의권을 얻어 회사와 싸우고 있다.

우리 조합원들은 추석 연휴 때 파업을 했고 지금도 부분파업으로 회사와 싸워나가고 있다. 우리가 무료로 해온 배토와 잔디 관리도 거부하고 있다. 캐디는 퇴직금도 성과금도 보너스도 없다. 오직 라운딩 뒤 받는 캐디피가 수입의 전부다. 그마저 해가 짧고 날씨가 추워지는 겨울에는 수입이 크게 줄어든다.

회사는 비조합원들에게 노조 때문에 캐디피도 오르지 않는다면서 노조를 공격한다. 배토, 잔디관리 무급노동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구상권 청구가 포함된 단협안에 먼저 도장을 찍어야만 캐디피를 올리겠다고 한다. 우리 회사는 공무원연금공단의 관리감독을 받는다. 회사가 돌변했는지, 공단이 돌변했는지는 알 수 없다.

회사는 우리들의 파업을 두고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캐디들은 오래 못 간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서민들이 지탱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상록골프장 캐디들에게는 쏟아지는 빗속에서 투쟁을 외치는 조합원이든, 생계를 위해 일을 하는 비조합원이든 절박함이 있다. 약자의 눈물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삶에 대한 절박함이 있다. 마땅히 존경받고, 존중받고 싶은 간절함이 있다.

(회사 쪽은 12일 단협에서 구상권 청구 조항 삽입을 철회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4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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