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90년 전 이봉창 의사는 왜 일왕을 죽이려 했을까

2022. 10. 12.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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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히로히토에 수류탄 투척… 10월10일 순국 조국 독립 위해 천하보다 귀한 목숨 던져 거인이 계셨기에 오늘의 대한민국 있는것 나라를 분열로 몰고가는 정치권 반성해야

지난 10월 10일은 이봉창(李奉昌) 의사(義士) 순국 9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1932년 1월 8일 이 의사는 도쿄(東京)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졌고 그해 10월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이 의사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당시의 신문을 통해 다시 한번 이 의사의 성혈(聖血)을 살펴보고자 한다.

1932년 1월 10일자 매일신보에 이 의사 의거에 대한 기사가 실려있다. "폐하가 1월 8일 오전 11시 44분경 앵전정(櫻田町) 경시청 앞에 닿으려 하는 찰라에, 봉배자(奉拜者) 선내(線內)로부터 돌연 수투탄(手投彈) 비슷한 것을 어떤 자가 던졌는데 (중략) 11시 50분경에 무사히 궁성에 환어(還御)하시었다. 그리고 범인은 경시청 형사와 순사, 헌병 상등병, 헌병 군조 등에게 체포되어 경시청에서 방금 취조를 받는 중인데, 그 씨명과 연령은 다음과 같다. 조선 경성 출생, 토공(土工) 이봉창."

이어 '범인 이봉창의 경력'이란 제목의 기사가 나온다. "불경(不敬) 사건의 범인 이봉창의 근본에 대하여 지금까지 판명된 사항은 대략 다음과 같다. 범인은 명치 34년(1901년) 8월 10일 경성부 원정 2정목(현재의 원효로 2가) 번지 미상(未詳)한 곳에서 태어나서 17세 때 원적지인 경성부 금정동(현재의 효창동) 118번지로 옮겼고 1919년 19세 때에는 철도국에 들어가 임시 인부가 되었다가 그 후 역부(役夫)가 되었고 1924년 4월에는 신병(身病)이라는 이유로 사직하고 동년 말경에 일본으로 건너가 이후 음신(音信; 먼 곳에서 전하는 소식)조차 없어 일체의 소식이 불명하였다. 범인의 부모는 일찍 사망했고 형인 이범태(李範泰)는 약 10년 전에 함경북도 청진으로 가서 이후 범인과도 내왕이 없이 지내는 모양이다."

이 의사에 대한 매일신보의 기사를 보면 연일 모두 '대역(大逆) 범인(犯人)'으로 써있다. "대역 범인 이봉창, 엄중한 경계 속에 공판 개정, 방청을 금지하고 비밀리에 심리 진행"(1932년 9월 17일자), "이봉창 공판, 대역 범인은 시종 정숙"(1932년 9월 18일자) 등이다.

이 의사는 9월 30일 사형 판결이 언도되었고 10월 10일 사형이 집행됐다. 그 날 매일신보에는 아주 짧은 사형 집행 기사가 실린다. "대역범인 이봉창은 10일 오전 9시 2분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형 집행 소식은 1932년 10월 13일자 신한민보에 나와 있다. "이봉창 의사 사형 집행은 200여 명의 헌병과 경관의 엄중 경계 속에 집행되었다. 지난 1월 8일에 일황(日皇)에게 폭탄을 던진 한인 이봉창 의사의 사형을 집행하였는데, 그 처형의 방식은 비밀에 붙이고 발표하지 않았다더라. 이봉창 의사여! 죽어서 여귀(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가 되어서라도 원수를 갚을지어다."

이 의사의 사형 집행 후 이 의사 추도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런 추도회는 국내에서는 불가능했다. 미국 교포들의 추도회 하나를 소개한다. '이봉창 의사 추도회'라는 제목의 1932년 11월 3일자 신한민보 기사다. "11월 27일 오후 7시 중가주(中加州) 대한인 공동회에서 이봉창 의사 추도회를 열어 동포 남녀 일동이 회집하여 (중략) 김덕세 여사의 추도하는 독창이 있고 다시 일동은 정신을 모아 이 의사의 애국 충혼(忠魂)에 대한 추도가 있은 후 이 의사의 동양 평화와 민족 해방에 대한 내용 진술이 있은 후, 유족 위로금을 거두리라 결정하고 의연금을 수합한바, 그 자리에서 수합된 액수가 108원이고 계속 수합(收合)하기로 의결하고 폐회하였다더라."

그렇다면 그가 도쿄에서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졌을 때 식민지 조선에선 모두가 환호를 불렀을까. 물론 아니었다. 경성에선 친일파 35명이 조선식 요리점 식도원(食道園)에 모여 일본에 사죄를 표했다. 이들은 도지사 출신의 신석린을 좌장으로 삼아 머리를 맞대고 결의문을 채택했다. 1932년 1월 10일자 매일신보 기사다. "동경 불경 사건의 범인이 조선 사람이었음에 대하여 한상룡(韓相龍), 박영철(朴榮喆), 신석린(申錫麟), 조성근(趙性根), 김명준(金明濬), 민대식(閔大植), 박승직(朴承稷)씨 외 35명의 유지는 9일 정오부터 시내 식도원에 회합하여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고 이어서 봉위문(奉慰文)을 타전하였다."

결의는 다음과 같았다. △총리대신, 탁무대신, 궁내대신과 동상(東上) 중의 총독에게 봉위(奉慰)의 전보를 타전함 △7명의 위원을 선정하여 총독부, 군사령부를 방문해 봉위의 의(意)를 표함 △3일간은 일체 도락적(道樂的) 연회에 출석치 않음 △경성에 있는 신문 잡지에 근신(謹愼)의 의(意)를 표하고 동포에게 근신의 지(旨)를 종용함.

이들은 이러한 결의에 따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봉위전문(奉慰電文)을 즉각 타전했다. "작일(昨日) 돌발한 불경 사건에 대하여는 오직 공구불이(恐懼不已; 두려움을 금하지 못함)이오며, 충성으로써 근신의 의를 표하옵나이다. 경성조선인유지(京城朝鮮人有志)."

한상룡은 중추원 참의이자 조선생명보험 사장이었다. 민대식은 자작 작위를 받은 민영휘의 아들로 갑부 은행업자였다. 박승직은 거상(巨商)으로 두산그룹 창업주다. 박승직은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총탄을 맞아 죽었을 때도 이토를 추모하는 '국민대추도회' 발기인으로 참여한 바 있다.

중국의 사상가 묵가(墨家)는 이렇게 말했다. "천하를 다 준다고 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을 사람이 어디 있는가? 목숨은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이다." 이 의사는 이렇게 천하보다 더 귀한 목숨을 내던졌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였다. 이 의사가 돌아가신지 90년이 흘렀다. 자신의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던진 '거인'이 계셨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다. 그 분은 우리에게 "너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냐"고 준엄하게 묻는다. 얄팍한 정치 셈법으로 나라를 분열과 불신으로 몰고가는 정치권은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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