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의 과학세상] 편식 강요하는 무늬만 '맞춤형' 교육과정 개편

지난 정부가 어설프게 시작해놓은 교육과정 개편이 파행으로 치닫고 있다. 학생들이 배우고 싶어 하는 교과목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맞춤형’ 교육이 당초 목표였다. 이제 학교가 가르치고 싶은 과목을 획일적으로 가르치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이다. 디지털 전환과 산업‧사회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시도라는 것이 교육부의 핑계였다. 변동성‧불확실성‧복잡성이 극대화되는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핵심 기본역량과 변화 대응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계는 학교 현장의 현실을 핑계로 반발하고 있다. 교사도 부족하고, 시설도 모자란다는 것이다. 정치권의 불만도 만만치 않다. 교육부가 주관한 공청회가 폭력과 욕설이 난무하는 난장판이 돼버렸다. 사회·도덕·보건·역사의 주요 내용에 대한 논란도 뜨겁다.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 ‘광복’과 ‘8‧15 광복’, ‘6‧25 전쟁’과 ‘6‧25 남침’이 격하게 충돌하고 있다.
성(性) 인지와 노동의 가치에 대한 논란도 벌어지고 있다. 진보 정권이 마련해놓은 초안과 보수 정권이 내놓은 수정안의 갈등은 나날이 증폭되고 있다. 과연 12년 만에 다시 돌아온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지명자가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겉으로만 화려한 '맞춤형'
학생의 적성과 진로에 맞는 ‘맞춤형’ 교육이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맞춤형 교육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단순히 학생들에게 교과목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되는 일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부가 임의로 정해놓은 교과목 중에서 극도로 제한된 선택은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무늬만의 선택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자칫하면 과도한 편식을 부추기는 부작용을 증폭시킬 수 있는 위험도 있다.
맞춤형 교육이 교육적으로 바람직한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성장 과정에 있는 학생이 자신의 적성과 진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지나친 것이다.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도 자신의 적성과 진로에 대한 고민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산업‧사회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핵심 기본 역량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학생을 찾아보기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대응하기 위한 능력을 기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학생도 드물다.
맞춤형 교육은 학교가 충분한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다. 교사와 시설이 충분하지 않은 우리나라 학교 현장에서 맞춤형은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다. 물리 전공의 교사를 확보하지 못한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물리’를 선택할 수 없다. 다른 학교의 ‘물리’를 선택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학생들이 다른 학교로 이동할 수도 없고, 교사가 ‘물리’를 선택하는 학생들을 일일이 찾아다닐 수도 없다. 심지어 학급별 운영을 목표로 설계된 학교의 시설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많은 학생들이 좁은 복도를 통해 한꺼번에 이동하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안전 사고의 위험도 걱정해야 한다.
맞춤형 교육이 교육의 공정성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통합교과적 수학 능력을 평가하겠다는 당초의 목표를 상실해버린 엉터리 ‘수능’ 제도에서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다. 서로 다른 선택 과목에 응시한 학생들의 수학 능력을 ‘표준변환점수’로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교육부의 주장은 기만적인 것이다. ‘사과’와 ‘고등어’의 맛은 절대 상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없는 법이다.
더욱 심각해진 ‘과목 쪼개기’

‘선택권’을 앞세웠던 제7차 교육과정에서 시작된 ‘과목 쪼개기’가 오히려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2022년 개정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일반선택‧진로선택‧융합선택의 구분은 극도로 임의적인 것이다. 크게 줄어든 일반선택에서는 문법‧이산수학‧국사 등의 교과목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진로선택에 들어있는 ‘직무 의사소통’과 ‘직무 수학’은 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다. 융합선택은 백화점 문화강좌에나 어울리는 과목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수학과 문화’, ‘역사로 탐구하는 현대 세계’, ‘금융과 경제생활’, ‘과학의 역사와 문화’ 등이 그렇다. ‘기후 변화와 지속가능한 세계’와 ‘기후 변화와 환경생태’의 중복도 걸러내지 못했다.
‘과학’의 경우에는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하다. 물리학‧화학‧생명과학‧지구과학의 심화과목을 각각 2과목의 진로선택으로 쪼개버렸다. 물리학II는 ‘역학과 에너지’와 ‘전자기와 빛’, 화학II는 ‘물질과 에너지’와 ‘화학반응의 세계’, 생명과학II는 ‘세포와 물질대사’와 ‘생물의 유전’, 지구과학II는 ‘지구시스템과학’과 ‘행성우주과학’으로 나눠 놓았다. 물‧화‧생‧지의 억지 균형에 대한 교육학자들의 집착에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현대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은 교육과정에서 사라져버렸다. 고등학교 물리는 19세기의 고전물리학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양자컴퓨터‧양자통신의 시대를 살아가게 될 학생들이 정작 20세기의 첨단 물리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해버린다는 뜻이다. 현대 화학의 핵심인 화학열역학과 유기화학도 자취를 감춰버렸고, 현대 생물학의 핵심인 진화론은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완전히 퇴출되어 버렸다.
언론을 통해 떠들썩하게 알려졌던 ‘코딩’ 교육에 대한 의지도 실망스럽다. 중학교의 ‘과학/기술‧가정’이 ‘과학/기술‧가정/정보’로 바뀌었다. 정보는 ‘34시간을 기준으로 하되, 학교 및 학생의 필요에 따라 학교 자율 시간을 확보하여 68시간 이상 편성할 수 있다’가 고작이다. 고등학교에서는 일반선택의 ‘정보’, 진로선택의 ‘인공지능 기초’와 ‘데이터 과학’, 융합선택의 ‘소프트웨어와 생활’이 포함되어 있지만 필수 이수단위는 따로 배정되지 않았다.
무책임한 교육부가 자의적‧임의적으로 쪼개놓은 선택과목을 맞춤형 교육을 위한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멀쩡한 생선을 머리‧몸통‧꼬리의 세 토막으로 잘라놓고 어느 것을 먹고 싶은지를 결정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선택’이라고 할 수 없다. 생선의 머리만 맛보고 생선 맛을 배웠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코끼리 다리 만지기 식의 토막 교육으로는 21세기가 요구하는 융합형 인재를 양성할 수 없다. 학생들에게 필요한 진정한 선택권은 ‘쇠고기’를 먹을 것인지, ‘생선’을 먹을 것인지를 결정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꼭 필요한 것은 반드시 가르쳐야

교육은 학생들이 미래를 위한 다양한 영양분을 제공하기 위한 노력이다. 학생들이 쉽고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만 선택적으로 배우도록 해주는 것은 진정한 교육이라고 할 수 없다. 맞춤형 교육이 언제나 좋은 것도 아니다. 일제의 잔재인 ‘문과’와 ‘이과’의 구분 교육이 가장 전형적인 맞춤형 교육이다.
그러나 ‘문과’와 ‘이과’의 구분은 어떠한 근거도 찾을 수 없는 교육행정 편의적 구분일 뿐이다. 임의적인 문‧이과 구분이 학생들의 인권과 학습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횡포라는 사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교육부가 밀어붙이고 있는 ‘문‧이과 통합’은 사실 ‘문‧이과 구분 폐지’에 해당하는 것이다.
아무리 어렵고 재미가 없는 것이라고 학생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반드시 가르칠 수 있는 교육 정책이 필요하다. 학생의 미래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가려주는 것이 학교와 교사의 책임이다. 그런 책임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맞춤형을 핑계로 과도한 편식을 허용하는 반(反)교육적 교육과정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스포츠에 뛰어난 역량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학교의 정상적인 교육을 면제해주는 우리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학습 부담에 대한 우려는 무의미한 것이다. 학생들이 느끼는 부담은 교육과정이 아니라 불합리한 대학입시 제도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성취기준의 수를 줄인다고 학습 부담이 줄어드는 것이 절대 아니다. 성취기준의 수를 줄이면 수능의 객관식 출제가 어려워져서 학생들의 학습 부담은 오히려 더 늘어나게 된다. 교육적으로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문제풀이 연습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맞춤형 교육은 교육과정이 아니라 교수학습 방법의 다양화에서 시작해야 한다. 교육은 근원적으로 불확실한 것일 수밖에 없다. 똑같은 내용을 똑같은 방법으로 가르치더라도 학생들의 이해 수준은 백인백색(百人百色)일 수밖에 없다. 학생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교과목의 선택이 아니라 자신들을 가르쳐주는 교사의 능력과 의지다.
※필자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대한화학회 탄소문화원 원장을 맡고 있다.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교육,에너지,환경, 보건위생 등 사회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2500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duckhwan@soga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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