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신인문학상 단편소설 당선작] 성실한 미래-윤지연

김진형 2022. 10. 1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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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홍석범

“질문하지 않습니다. 지적하지 않습니다. 사담을 나누지 않습니다.”  … “여러분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합니까. 식모입니까, 파출부입니까, 도우미입니까. 그렇게 불리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맞습니다. 달라져야 합니다. 전문가가 돼야 합니다. 그러려면 뭐가 필요합니까. 첫 번째는 원칙. 두 번째는 매뉴얼. 세 번째는 바로 디테일입니다.”

■ 설거지를 하던 여자가 물었다. 음식물 쓰레기는 어떻게 할까요? 나는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냥 일반 봉투에 넣어 달라고 말했다. 여자는 별다른 대꾸 없이 싱크대 거름망에 쌓인 음식물을 비닐에 탕탕 털어 버렸다. 한바탕 물줄기가 쏟아지더니, 빈 거름망이 배수구로 달그락,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마우스 버튼을 딸각거리며 여자의 뒷모습을 곁눈질했다. 나름 두 번째 만남인데, 여자와 한 공간에 머무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여자가 처음 우리 집에 찾아온 건 이 주 전이었다. 단발머리에 뿔테 안경을 낀 젊은 여자가 대문 앞에서 대뜸 안녕하시냐고 물었다. 나는 인사 대신 누구세요, 라고 물었다. 그가 현관으로 성큼 걸어 들어오며 말했다.

“청소의 신입니다.”

여자는 현관 앞에 쭈그리고 앉아 큼지막한 캔버스 가방에서 물건들을 꺼내놓았다. 대형 비닐봉지 두 장과 길고 짧은 솔 두 자루, 곰팡이 제거제, 스퀴지, 고무장갑, 트레이닝 바지, 그리고 하늘색 앞치마까지. 또래 여성의 방문은 생각지 못한 것이어서,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내려다봤다.

여자는 화장실에서 후줄근한 트레이닝 바지로 갈아입은 뒤 앞치마를 둘러메고 나왔다. 빳빳하게 각이 잡힌 하늘색 앞치마에는 ‘청소의 신’이라는 흰색 레터링 글씨가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여자는 여차저차 설명 없이 주방으로 들어가 가스레인지 위에 쌓인 조리 기구들을 부지런히 바닥으로 옮겼다. 그런 다음 화구를 걷어내고 상판에 곰팡이 제거제를 칙칙 뿌렸다. 환기를 시키려는지 주방 베란다 문을 드르륵, 하고 열었다. 고무장갑을 따닥, 튕기는 소리도 났다.

거실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켰다. 오픈 채팅창에는 김 주임이 보낸 다섯 개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연달아 메시지를 보낸다는 건 그만큼 요구사항이 많다는 뜻이었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며 채팅창을 확인하려는데, 날카로운 쇳소리가 쨍하고 울렸다. 깜짝 놀라 주방을 쳐다보니 여자가 싱크대 밑 서랍장을 소란하게 뒤지고 있었다. 오래된 프라이팬과 스테인리스 그릇들이 이리저리 부딪히며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정신이 사나워져 여자를 불러 세웠다.

“뭘 찾으시는데요?”

두 볼이 벌겋게 달아오른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설거지통이요.”

“싱크대에 있겠죠.”

“설거짓거리가 꽉 차서 꺼낼 수가 없어요.”

베란다에서 낡은 대야를 꺼내와 여자에게 건넸다. 여자는 꾸벅 인사를 하더니 대야에 물과 클리너를 섞어 화구를 담갔다. 그리곤 싱크대 앞에서 설거짓거리를 뒤적거렸다. 이제 설거지를 하려나 보다 하는데, 갑자기 싱크대 옆 다용도 선반을 분주하게 들추기 시작했다. 여자가 풀썩거릴 때마다 오래된 비닐에서 먼지가 날렸다.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또 뭘 찾으시는데요?”

“음식물 쓰레기봉투요.”

“그냥 일반 쓰레기봉투에 넣으시면 돼요.”

“일반 봉투에요?”

“어차피 가져가서 다 태워요.”

여자가 입술을 반쯤 벌린 채로 슬그머니 돌아섰다. 이제 설거지를 하겠지 싶어 앉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노트북 화면에는 아직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 알림이 깜박이고 있었다. 마우스를 클릭해 채팅창을 띄웠다.

구청 공무원인 김 주임은 아주 외람된 말투로 세 가지를 요구하고 있었다. 하나는 폰트 크기를 늘릴 것. 오프라인 소식지의 수요자는 중고령 노인들이므로 가독성이 최우선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사진과 제목을 리사이징해 여백을 줄일 것. 불필요하게 여백이 많으면 예산 낭비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는 이유였다. 세 번째는 표지 사진을 구청장 독사진으로 변경할 것. 복합 테마파크 건설에 대한 구청장 인터뷰가 메인 기사인데, 왜 엉뚱한 사진을 넣어놨냐는 거였다. 김 주임의 요구는 예상보다 훨씬 무례했다. 그렇게 다 바꿔버리면 중국집 전단지보다 못한 결과물이 나올 게 뻔했다.

밤새 인디자인과 씨름하느라 뻑뻑하게 말라붙은 눈동자가 시렸다. 두 손을 맞비벼 열이 오른 손바닥을 눈가에 갖다 댔다. 얼굴에 따뜻한 기운이 돌자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도로 미지근해진 손바닥을 문지르며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물안개가 핀 것처럼 사방이 흐릿해 보였다. 그때, 저만치에서 하늘색 앞치마가 푸드덕 날갯짓을 하더니 단숨에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끔벅거렸다.

천장을 향해 몸을 길게 뻗은 여자가 싱크대 위 수납장에서 그릇을 끌어 내리고 있었다. 자기 머리만 한 유리그릇을 번쩍 치켜든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일랜드 식탁에는 오래 묵은 그릇들이 두서없이 쌓여 있었다. 싱크대에 쌓인 설거짓거리도 그대로였다. 주방에 들어간 지가 언젠데, 어디 하나 말끔해진 데가 없었다. 어쩌자고 저 여자는 감당도 못 할 일을 벌이고 있는 걸까. 저런 일머리 없는 사람을 보낸 업체는 또 무슨 생각일까. 아무래도 3회권 할인 쿠폰을 사용한 게 문제인 것 같았다. 이유 없는 할인은 없다고, 초짜나 저성과자를 끼워 파는 낚시 상품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휴대폰으로 홈클리닝 앱에 접속해 여자의 프로필을 검색했다. 하늘색 배경 앞에서 어색한 듯 입꼬리를 비틀고 있는 여자의 사진이 떠올랐다. 이름은 한성실. 나이는 서른넷. 정리수납전문가 2급 자격증 보유. 단출한 신상정보 밑에는 ‘한성실입니다’라는 짤막한 프로필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 두 번을 물어도 대답은 같았다. 여자는 음식물 쓰레기봉투 같은 건 사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오늘은 짜증이 치밀었다. 미안한 기색도 없이 천연스러운 얼굴로 똑같은 말만 반복하니 복장이 터졌다. 다 큰 어른이 음식물 쓰레기나 몰래 버리며 사는 것도 한심한데, 그 짓을 내가 대신 해줘야 한다는 게 더 화가 났다. 마음 같아선 한마디하고 싶었지만, 별수 없이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첫날 또래의 여자를 보고 조금 뻘쭘하긴 했지만, 그보단 안도감이 더 컸다. 첫 업무라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었는데, 가장 불안했던 건 집주인의 신상을 모른다는 거였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혼자 사는지 여럿이 사는지, 빈집인지 아닌지조차 알지 못했다. 내게 쥐어진 것이라곤 집 주소와 평수, 추가 서비스 선택 여부, 그리고 무작위 숫자로 배열된 안심 전화번호뿐이었다. 나는 혹시 모를 불운들을 상상하며 걱정을 키웠다. 섬뜩한 장면이 떠오를 때면 살갗에 오슬오슬 소름이 돋았다. 막연한 불안만 사라지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문틈 사이로 여자가 얼굴을 내밀었을 땐 조금 반갑기까지 했다. 큰 걱정거리를 덜었으니 이제 내 일만 잘하면 되겠지 싶었다. 이십 분이나 일찍 집을 나섰더니 시간도 넉넉했다. 방 두 개짜리 소형 아파트라 부담도 적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순조로울 줄만 알았다. 하지만 현관으로 성큼 들어선 순간, 교육 시간에 복창했던 짧고 강렬한 구호가 불현듯 떠올랐다.

“작은 집도 방심 말자. 작은 집이 더 더럽다.”

지구가 멸망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인간의 존엄이 사라진 문명의 쓰레기더미 앞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삼켰다. 살림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것들이 구겨진 걸레처럼 여기저기 뒤엉켜 있었다. 퇴적물처럼 쌓인 쓰레기더미에선 따뜻하게 발효된 젓국 냄새가 났다. 이 참혹한 순간에도 살아남은 누군가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겠지. 근데 나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신도 천지를 창조하기까지 주 6일을 꼬박 일했다는데, 나 같은 신출내기가 무슨 수로 세 시간 반 만에 천지개벽을 일으키나. 이건 신이어도 못한다. 청소의 신이 와도 안 된다.

순간 나는 성실하게 암기해 둔 첫 번째 매뉴얼을 내팽개쳤다. 매뉴얼대로라면 업무 시작과 동시에 화장실 곰팡이부터 불려야 했다. 하지만 이 집의 불결함은 한낱 미생물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두 번 망설이지 않고 주방으로 향했다. 싱크대에는 각종 일회용기가 부패한 음식물과 뒤섞여 대환장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가스레인지에는 까만 기름때가 꾸덕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끈적거리는 조리도구들에선 기름 쩐 내가 났다. 일단은 주방 기름때부터 불려야 했다. 수세미질 몇 번으로 떨어져 나갈 것들이 아니니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했다.

강사는 설거지통에 세제를 풀고 기름때를 푹 불리라고 했다. 하지만 설거지통은 싱크대 가장 밑바닥에 파묻혀 있었다. 그것을 꺼내려 드는 순간, 위태롭게 쌓인 거대한 설거지 더미가 요란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 뻔했다. 한시라도 빨리 대체 용기를 찾아야 했다. 싱크대 밑에 딸린 수납장을 허겁지겁 뒤졌지만 크기가 애매한 그릇들만 어지럽게 쌓여있을 뿐, 그 흔한 플라스틱 대야 하나 보이지 않았다. 숨이 가빠지고 손놀림이 거칠어졌다. 식기들이 부딪히며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당장이라도 여자에게 지름 삼십 센티 정도의 둥글넓적한 그릇이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이왕이면 직접 찾아봐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하지만 질문도, 부탁도, 어느 하나 금기가 아닌 것이 없었다.

“질문하지 않습니다. 지적하지 않습니다. 사담을 나누지 않습니다.”

환기가 되지 않는 좁은 강의실에 앉아 서른 명쯤 되는 사람들과 구호를 외쳤다. 대부분 오륙십 대 여성들이었지만, 그보다 젊은 나이대의 사람도 두서넛 눈에 띄었다. 교육생들은 강의를 받다가 자주 꾸벅꾸벅 졸았다. 나른한 기운이 퍼질 때면 강사가 구호를 선창했다. 그것은 주로 우리에게 금기시된 규범들을 여러 번 되새김질하는 것이었다. 강사는 꼭 해야 할 일만큼이나 절대 해서는 안 될 많은 것들을 설명했는데, 그건 우리가 전문가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러분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합니까. 식모입니까, 파출부입니까, 도우미입니까. 그렇게 불리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맞습니다. 달라져야 합니다. 전문가가 돼야 합니다. 그러려면 뭐가 필요합니까. 첫 번째는 원칙. 두 번째는 매뉴얼. 세 번째는 바로 디테일입니다.”

그는 전문가란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고,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매뉴얼에 충실한 것이며, 매뉴얼은 곧 디테일이자 정답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전문가란 ‘매뉴얼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강사가 ‘전문가’나 ‘매뉴얼’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하는 모습이 좋았다. 그건 어느 뒷골목에 차려놓은 허름한 인력소개소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말과 같았다. 이젠 임금을 떼먹히고도 사이다(사랑을, 이 술잔에 담아, 다 같이 원샷!)를 외치는 가족 같은 회사를 전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바엔 거대한 온라인 플랫폼 속을 유랑하는 프리터로 사는 편이 나았다. 명령은 정교하고, 입금은 정확하며, 선택은 자유로운 노동을 하고 싶었다.

강사는 매뉴얼만 지킨다면 누구도 끔찍한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했다.

“옛날에야 집주인이 가정부를 종 부리듯 했죠. 심부름도 하고, 병수발도 들고, 별의별 자질구레한 일을 다 시켰어요. 질문을 던지는 순간 그렇게 됩니다. 집주인은 지시하는 사람이, 여러분은 지시받는 사람이 돼 버립니다. 사담도 나누지 마십시오. 친분은 곧 업무가 됩니다. 지적도 하지 마십시오. 요즘 사람들 직장 상사 잔소리에도 발끈합니다. 고객은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회사에 질문하세요. 고충 센터 직원들이 답을 해 줄 것입니다.”

교육이 끝난 후, A4용지 여섯 장짜리 업무 매뉴얼을 외우고 또 외웠다. 얼마나 달달 외웠는지, 종이의 질감과 구김진 자리까지 떠오를 정도였다. 하지만 세상일은 수많은 우연과 변수로 굴러가는 것이어서 활자로 기록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이 집 설거지통이 어디에 있는지는 고충 센터도 알지 못하는 것이었기에 매뉴얼은 번번이 무용해졌다. 여자는 종종 무엇을 찾느냐고 물어왔고, 나는 쓰레기봉투 같은 것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넌지시 되물었다. 매뉴얼 바깥의 공백은 늘 그런 식의 질문들로 채워졌다.


■ 성실은 하지만 손이 느린 한성실 씨는 첫날 서비스를 끝내지 못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주방 정리와 화장실 청소, 쓰레기 정리뿐이었다. 세탁은 세탁기가 했고, 탈수가 끝난 빨래는 널다 말고 돌아갔으니 빨래를 했다고 치기도 어려웠다.

한성실 씨는 업무시간을 한참 넘겨서까지 남은 일을 끌어안고 허둥거렸다. 빨래 건조대를 펴고 있는 그에게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말했다. 한성실 씨가 안쓰러웠다기보다는, 그가 없는 평온한 공간을 얼른 되찾고 싶은 마음이 컸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탓에 배도 고팠다. 하지만 눈치라곤 없는 한성실 씨는 애써 태연한 척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일이 안 끝나서요. 신경 쓰지 말고 일 보세요.”

“업무시간은 이미 끝났는데요.”

“기본 서비스는 마무리하는 게 원칙이어서요.”

제대로 하는 일도 없으면서 뭐 잘났다고 원칙을 운운하는지 기분이 언짢아졌다.

“업무시간 안에 서비스를 마무리하는 게 원칙이겠죠. 어차피 원칙 못 지키셨어요.”

“그 점은 죄송하지만, 마음대로 업무를 끝낼 순 없어요.”

“여기는 그쪽 업무공간이기 전에 제집이거든요. 제가 허용한 시간은 세 시간 삼십 분이고요. 그 이상 동의 없이 머무르면 무단 점거예요.”

억울한 건 난데, 여자는 되레 자기가 낭패를 본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앞치마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냈다.

“센터에 한 번 물어볼게요. 그냥 가도 괜찮은지. 오더가 올 때까진 하던 일 마저 하겠습니다.”

고객의 오더는 개미 똥구멍만큼도 받아들이지 않는 한성실 씨는 물티슈를 뽑아 들고 베란다로 나가 빨래 건조대를 고집스럽게 닦아냈다. 세탁기에서 주섬주섬 빨래를 건져 올린 뒤 구겨진 수건부터 탁탁 털어 건조대에 널었다. 이제 막 옷가지를 널려고 하는데 한성실 씨의 휴대폰에서 짧은 벨 소리가 울렸다. 서둘러 휴대폰을 확인한 한성실 씨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고객님은 세 차례 장기서비스를 신청하신 거라, 이주 뒤에 나머지 서비스를 받으셔도 된대요.”

“네.”

“빨래만 다 널고 갈까요?”

“됐습니다.”

결국 이십 분 일찍 일을 시작한 한성실 씨는 오십 분을 더 머물다 돌아갔다. 불룩한 캔버스 가방을 둘러멘 그가 현관 앞에서 이주 뒤에 뵙겠다며 꾸벅 인사했다. 제 몸만 한 쓰레기봉투를 질질 끌고 나가는 뒷모습이 마른행주처럼 앙상궂었다.

그날 저녁, 홈클리닝 업체로부터 두 개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하나는 간곡한 사과로 시작하는 장문의 편지글이었다. 요약하자면,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해 죄송은 하지만 규정상 환불은 불가하며, 대신 청소 매니저를 교체해줄 순 있으니 원할 경우 문자로 회신해 달라는 것이었다. 또 다른 메시지는 오늘 받은 서비스에 별점 리뷰를 남겨달라는 단체 문자였다. 첨부된 링크 주소를 누르니 한성실 씨의 별점 리뷰 화면이 나타났다. 다섯 개의 별은 텅 비어 있었고, 댓글 창도 휑했다. 예상대로 나는 한성실 씨의 첫 번째 고객이자, 미끼상품에 낚인 호구였다. 댓글 입력창을 열었다.

희대의 똥망 서비스였습니다.

교양 없어 보이는 댓글이라 지웠다.

매니저가 역대급 일못입니다.

인신공격 같아서 지웠다.

다시는 이용 안 할 듯합니다.

아직 두 번의 서비스가 남아 있어서 지웠다.

몇 자 되지도 않는 글을 썼다 지웠다 하며 뭉그적거렸다. 악성 리뷰를 받아만 봤지, 써보는 건 처음이라 영 꺼림칙했다. 

▲ 일러스트/홍석범

솔직히 남 걱정할 때가 아니긴 했다. 벌써 업무 시간의 절반이 지나 있었다. 문제는 온갖 짐을 쌓아둔 세 평짜리 창고 방이었다. 여자는 이곳을 서재로 쓰겠다며 각별한 정리 정돈을 부탁했다. 정리 정돈의 수준을 넘어서는 대공사였지만 거부할 명분은 없었다. 어디까지가 정리이고 정돈인지는 정의된 바 없었기 때문이다. 

별점은 어릴 적 선생님이 일기장에 찍어주던 칭찬스탬프가 아니었다. 그것은 최단 경로로 최대 효율을 낼 수 있는 인사고과였다. 회사는 별점이 낮은 디자이너를 메인 페이지에 노출시키지 않았다. 별점 테러라도 당하는 날엔 한동안 반백수 처지를 면치 못했다. 다시 평판을 쌓기 위해선 돈과 시간을 들여야 했다. 디자이너들은 몸값을 깎아 가성비를 높였다. 리뷰깡으로 평점을 세탁하는 이들도 있었다. 플랫폼에는 ‘3분 안에 빠른 상담’, ‘불만족 시 전액 환불’, ‘주말 작업 가능’ 같은 문구가 경쟁적으로 나붙었다. 나는 그곳에서 가격 대비 성능이 가장 뛰어난 오성급 디자이너였다.

휴대폰 화면을 끄고 노트북 작업 창을 띄웠다. 김 주임에게선 아직 연락이 없었다. 오후 내내 수정한 내지 레이아웃을 마지막으로 훑었다. 간격이 고르지 않은 문자가 더러 눈에 들어왔다. 텍스트 상자를 드래그해 자간 값을 조정했다. 더는 낮 동안의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로써 여전히 별점이 영점인 한성실 씨는, 이주 뒤 ‘청소의 신’이라는 글씨가 적힌 앞치마를 둘러메고 다시 우리 집을 찾았다.



■ 여자는 지독한 기후 악당이었다. 집안 어딜 가나 플라스틱 용기가 발에 치였다. 방문 첫날엔 이것들을 솎아내고 씻어내고 정리하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배달 용기로만 백 리터짜리 비닐봉지 두 장이 꽉 찼다. 매뉴얼대로라면 쓰레기는 퇴실하는 길에 갖다 버려야 했지만, 집안 곳곳에 넘쳐나는 쓰레기를 처리하지 않고는 바닥 청소가 불가능했다.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이고 지고 십 삼 층 아파트를 오르내리며 첫날이라 그런가보다 했다. 묵은 청소를 해뒀으니 다음번엔 훨씬 수월해질 거라고 애써 위안하면서.

하지만 이주 뒤, 일회용기가 거대하게 발육해있는 믿지 못할 광경을 마주했다. 무슨 배달 음식을 그렇게 시켜 먹는지, 그 좁은 집에서 포장 용기가 끊임없이 나왔다. 다 먹지도 못할 대용량 식료품들이 주방 한쪽에서 몸집을 키웠다. 현관 앞에는 택배 포장재가 낮은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분리수거에 소요되는 시간은 매뉴얼에도 나와 있지 않은 것이라 나는 매번 시간에 쫓겼다.

고추기름이 말라붙은 플라스틱 그릇을 씻고 있는데 아까부터 주방을 어슬렁거리던 여자가 말을 걸었다.

“그 정도는 그냥 버려도 돼요.”

도대체 정도를 모르는 여자였다.

“이 정도면 씻어서 내놓는 게 맞죠.”

“어차피 수거 업체에서 다 씻어요.”

“그래서 일하는 사람들 손톱이 썩는대요.”

“남 걱정하실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여자가 쌜쭉하니 돌아서서 식료품 선반을 뒤적거렸다. 나는 철 수세미로 남은 기름 자국을 벅벅 긁어냈다. 무겁고 찜찜한 공기가 오래 겉돌았다. 여러모로 밉지 않은 구석이 없는 여자였다.

솔직히 남 걱정할 때가 아니긴 했다. 벌써 업무 시간의 절반이 지나 있었다. 문제는 온갖 짐을 쌓아둔 세 평짜리 창고 방이었다. 여자는 이곳을 서재로 쓰겠다며 각별한 정리 정돈을 부탁했다. 정리 정돈의 수준을 넘어서는 대공사였지만 거부할 명분은 없었다. 어디까지가 정리이고 정돈인지는 정의된 바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를 통째로 써도 모자란 노역이어서 최대한 시간을 쪼개 청소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방문 때 어지간한 짐들은 베란다 구석으로 옮겨놓았다. 하지만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 키만 한 철골 구조물은 어쩌질 못하고 있었다. 원통 파이프에 철사를 촘촘히 감아올린 조형물이었는데, 몸통에 비해 팔다리가 유난히 길고 가늘어 사람의 형상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부채꼴 모양의 머리에는 길이가 제각각인 철사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어 부채 머리 괴물 같기도 했다. 워낙 부피가 커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고, 어쩐지 괴기스러워서 인테리어 소품으로도 적당하지 않았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세워두려면 모퉁이 공간을 잘 활용해야 했다.

방문에서 시선이 가장 늦게 닿는 곳은 오단짜리 책장이 있는 왼쪽 모서리였다. 정면에 있는 책상을 오른쪽 벽에 붙이고, 그 옆에 책장을 두면 얼추 공간이 나올 것 같았다. 책장을 무턱대고 옮길 수는 없어서 꽂혀있는 책부터 빼내기 시작했다. 주로 ‘광고디자인 경향’, ‘일러스트 테크닉’ 같은 제목의 전문 서적들이었다. 책등에 ‘조형디자인학과 08학번 김미래’라고 써 붙여 놓은 전공 책도 보였다. 책장 꼭대기엔 이런저런 공모전에서 받아온 상패들도 제법 진열돼 있었다. 골방에 틀어박혀 배달 음식으로만 연명하는 방구석 은둔족인 줄 알았는데, 제법 사람다운 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책장 맨 아래 칸에는 여자가 제작했을 법한 각종 포스터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그것들을 고무줄로 한데 묶으려는데, 환한 연둣빛 포스터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푸른 새싹이 돋아난 텀블러 위에 ‘지구를 지키는 작은 실천, 플라스틱 줄이기’라는 표어가 적혀 있었다. 문득 배달 용기에 파묻혀 내로남불 포스터를 만들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후 악당이 만든 환경 보호 포스터라니,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동그랗게 만 포스터 다발을 들고 일어서려는데, 조형물 엉덩이에 굵은 실밥 몇 가닥이 비죽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가락으로 집어 떼 내려 했지만, 철선에 엉킨 듯 꼼짝하지 않았다. 실밥을 오그려 쥐고 좀 더 세게 잡아당겼다. 팅, 하고 철삿줄이 튕기는 소리가 났다. 실밥이 늘어진 걸 보니 올이 조금 풀린 것도 같았다. 이번엔 주먹을 단단히 움켜쥐고 힘껏 잡아당겼다. 그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빨갛고 노란 불빛이 천정으로 솟구쳤다. 허공으로 흩어진 색색의 불꽃들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물건들이 부딪히고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귀를 틀어막았다. 어둠 속에서 서늘한 귀울음이 번졌다.



■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유리 깨지는 소리도 났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작은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등 뒤에서 노트북 거치대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한성실 씨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가만히 다가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제야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안경알이 눈물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괜찮으세요?”

한성실 씨가 바닥에 흩어진 몽실한 스티로폼 공과, 고불거리는 릴테이프 같은 것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정수리에서 무지개색 꽃잎이 팔랑거렸다. 한성실 씨가 책장에 머리를 박고 쓰러져 있는 조형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서 폭탄 같은 게 터졌어요.”

한성실 씨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겁에 질린 그를 안심시키고자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폭죽이에요. 축제 같은 거 할 때 쓰는 폭죽이요.”

조형물은 오래전, 한 어린이 갤러리의 개관식 행사용으로 제작한 것이었다. 엉덩이에 달린 줄을 잡아당기면 머리 꼭대기에서 축포가 터지는 일종의 팝업아트였다. 행사를 주관한 선배는 술자리에서 번번이 이것을 안주 삼아 히죽거렸다.

“똥구멍 털을 잡아당기니까 머리통이 팍 터지면서 구불구불한 뇌수랑 피 같은 게 막 튀었다니까. 나 진짜 자다가도 경기했잖아. 끔찍한데 웃겨서. 아직도 폭죽만 보면 웃겨 죽어. 이것도 트라우마냐?”

내가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면 그는 도리어 정색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야, 지금 너 용 됐다고 칭찬하는 거야. 옛날에 한우 모형 만들던 거 생각 안 나? 그때 소불알을 콩알처럼 붙여놔서 엄청 욕먹었잖아. 그게 우랑이라고 되게 고급 부윈데, 먹어는 봤냐? 소고기 중에 제일 맛있는 부위가 혀랑 불알이라고. 어쨌든 넌 인마, 이쪽이랑 잘 안 맞았어. 근데 지금 봐라. 잘 풀렸잖아. 외주를 막 쓸어 모은다고 소문 다 났어. 무슨 플랫폼 랭킹에도 올랐다던데. 사람이 자기 적성 찾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냐? 벌 수 있을 때 벌어. 괜히 다른 데 기웃거리지 말고.”

조형물에는 두 발의 폭죽을 재어놨었다. 한 발은 행사용, 또 한 발은 비상용으로. 나는 종종 그의 넓죽한 주둥이를 향해 남은 폭죽 한 발을 터뜨리는 상상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한 번 용기를 내보는 건데.

“부서진 게 많네요. 죄송해요.”

한성실 씨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정수리에 있던 종이 꽃잎이 떨어져 나와 노란 장판 위에서 팔랑거렸다. 바닥에는 사방으로 흩어진 유리 파편이 하얀 서리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베란다로 나가 먼지 쌓인 짐들 틈에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꺼내왔다. 까치발로 조심히 바닥을 디디며 서걱거리는 유리 조각을 쓸어 담았다. 한성실 씨가 앉은걸음으로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주워 모았다. 신문지가 없어 굴러다니는 종이 포스터로 유리 조각을 감쌌다. 한성실 씨가 어디선가 테이프를 찾아와 구겨진 포스터를 칭칭 싸맸다. 조형물의 양 팔을 한 쪽씩 붙잡고 일으켜 세운 다음, 벽 가장자리에 바짝 밀어 놓았다. 책상에 부딪힐 때 망가졌는지 오른팔이 죽은 나뭇가지처럼 비틀려 있었다.

“사진 좀 찍을게요.”

한성실 씨가 바닥에 가지런히 모아둔 물건들을 가리켰다. 유리 빠진 액자와 깨진 머그잔, 받침대가 부러진 크리스털 상패 같은 것들이었다. 있는 줄도 몰랐고, 없어도 그만인 것들을 굳이 클로즈업까지 해가며 찍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이런 걸 왜 찍어요?”

“증거 사진을 올려야 보상이 나와요.”

한성실 씨가 한쪽 팔이 흉측하게 꺾인 조형물을 찍으며 대답했다. 소매가 말려 올라간 그의 팔목에 가느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보상 규정이 어떻게 되는데요?”

한성실 씨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자기도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며, 오늘 중으로 회사에서 연락이 갈 거라고 했다.

“그냥 냅두세요.”

멀찍이서 조형물의 전신 샷을 찍던 한성실 씨가 네? 하고 되물었다.

“어차피 다 버릴 것들이에요.”

그가 셔터를 누르다 말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 한성실 씨가 거실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마른빨래를 개고 있다. 허벅지 위에 양말 한 쌍을 포개놓고 양말목에 머리를 공들여 끼워 넣는다. 두 번 접으면 끝날 팬티는 네 번이나 꺾어 접는다. 티셔츠도, 수건도, 뭐든 네 번을 접어야 끝이 난다. 손바닥만 해진 빨래들이 바닥 한쪽에 느릿느릿 쌓인다. 이래서는 영영 끝나지 않을 일이다.

조금 전 사고도 있고 해서 오늘은 빨리 들어가시라고 했지만, 융통성 없는 한성실 씨는 부득부득 세탁기를 돌리고 바닥 청소를 끝냈다. 시계를 보니 벌써 두 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한성실 씨의 업무가 삼십 분 전에 끝났다는 얘기다.

“대충 개키셔도 돼요.”

배려를 가장한 채근이었지만 한성실 씨는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매뉴얼대로 해야 해서요.”

도대체 그 개떡 같은 매뉴얼이 뭐냐고 물으려는데, 노트북 화면에 푸쉬 알림이 깜박거렸다. 미리보기 창엔 ‘제재 조치 전 경고 안내’라는 불길한 문구가 떠올라 있었다. 서둘러 알림 메시지를 확인했다.

판매자님에 대한 서비스 규정 위반 사항이 신고·접수됐음을 알립니다.

당사는 서비스 규정 제3조 제7항에 따라 판매자와 구매자의 직접 결제를 규제하고 있습니다.

판매자님께서는 마켓 게시판에 개인 연락처를 게재해 직접 결제를 유도한바, 이는 규정 위반으로 제재 대상입니다.

기간 내 소명 자료를 제출하지 않을 시, 내부 규정에 따라 한 달간 이용 중단 조치가 적용됩니다.

감사합니다.

빈속이 울렁거렸다. 누군가 악의를 갖고 신고한 걸까, 아니면 회사의 방침이 바뀐 걸까. 어느 쪽이든 억울한 건 마찬가지였다. 프로필 화면에 휴대폰 번호를 적어둔 건 사실이지만, 그건 시스템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업계 관행에 불과했다. 회사 또한 묵인해온 일이었다.

회사는 이용자의 개별 거래를 막기 위해 자체 제작한 채팅창만 이용하도록 했다. 하지만 시스템에 허점이 많아 종종 난처한 일들이 벌어졌다. 메시지 도착 알림이 울리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답변을 기다리다 지친 구매자들은 고객센터로 몰려가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회사는 시스템을 개선하기보단 응답률이 저조한 판매자들에게 경고장을 날렸다. 경고가 누적되면 영업 정지를 당했다. 아무리 프리랜서라지만 온종일 채팅창만 들여다보고 있을 만큼 프리하진 않았다. 개인 연락처를 공개하는 판매자가 하나둘 늘면서 질서 밖의 질서가 만들어졌다. 규정 위반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서로 못 본 척 눈을 감았다. 경쟁 관계이기 전에 불완전한 공간을 공유하는 불안정 노동자들이었다.

“김미래 씨.”

퇴실 준비를 마친 한성실 씨가 현관에 서서 내 이름을 불렀다. 할 말이 있는지 들고 있던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슬그머니 바닥에 내려놓았다.

“서비스가 한 번밖에 안 남았는데, 아직 서재 정리를 못 끝내서요. 상의 좀 드리려고.”

“네.”

“그래서 말인데, 다음번엔 서비스 시간이 좀 더 길어질 것 같아요.”

“얼마나요?”

“…두 시간 안에는 끝내보려고요.”

한성실 씨가 콧잔등에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리며 내 표정을 살폈다. 나는 머릿속으로 몇 자리의 숫자를 곱하고 나눠보다가 내 능력 밖의 일이라는 걸 깨닫고 핸드폰 계산기 앱을 켰다. 삼만 구천구백을 삼 점 오로 나누니 소수점 없는 정수로 딱 떨어졌다.

“시급 만 천 사백 원이네요. 추가 수당은 계좌로 입금할게요.”

한성실 씨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저었다.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개별 거래는 금지돼 있어서요.”

“그럼 추가 근무 수당이 따로 나오나요?”

한성실 씨가 눈을 끔벅거리며 대답했다.

“방 청소는 기본서비스라….”

“뭐가 없는 거네요.”

멍하니 서서 아랫입술만 잘근거리던 한성실 씨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저, 부탁 하나만 드릴게요.”

당연히 회사엔 비밀로 해 달라는 부탁일 테고, 나는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 손등에 괸 턱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그러세요, 라고 답했다.

“음식물 쓰레기봉투 좀 사다 놔주세요.”

맥락 없는 부탁에 당황한 나머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성실 씨가 전에 없던 환한 미소를 지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양손에 쓰레기봉투를 덜렁덜렁 흔들며 집을 나서는 모습이 어쩐지 얄궂어 보였다.

번잡스러운 것들이 사라지자 잊고 있던 공복감이 밀려왔다. 습관처럼 휴대폰 배달 앱을 켜다가, 문득 쓰레기봉투도 총알 배송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배달 앱이 운영하는 온라인 쇼핑몰에 들어가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검색했다. 순식간에 열세 개의 상품이 화면에 떠올랐다. 그중 한 개는 김장 봉투였고, 두 개는 친환경 비닐, 나머지 열 개는 효용을 알 수 없는 일반 비닐이었다. 이집 저집 안 쓰는 집이 없는 사회적 필수품을 간편 배송으로 살 수 없다니. 새삼 그 부조화에 놀랐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세상을 멈춰 세우는 것들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슬리퍼를 신은 마라토너와 나란히 스타트라인에 선 기분이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배달료가 공짜인 밥집에서 카레덮밥을 주문했다. 배달 앱 화면에 도착 예정 시간을 알리는 타이머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노트북에 워드 파일을 띄워 놓고 고심 끝에 짧은 문장 하나를 적어 넣었다.

오늘 회사로부터 징계를 통보받은 김미래 디자이너입니다.

그리곤 이어질 문장을 썼다 지웠다 하며 얼마간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여간해선 채워지지 않을 여백을 노려보는데 다급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얼핏 시계를 보니 배달 예정 시간이 오 분가량 지나 있었다. 재빨리 달려 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그새 사람은 사라지고 랩으로 둘둘 만 덮밥 그릇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저 멀리 복도 끝에서 마라토너의 희미한 뜀박질 소리가 들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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