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단이 왜 '위기 행동'인가요?

강연주 기자 2022. 10. 11. 21:3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부 산하 건강가정진흥원 상담 지침 분류 '위험·부작용' 부각
"낙태죄 폐지 후 사회적 인식 변화 반영 않고 기혼자 고려 없어"

정부 산하기관의 임신·출산 관련 상담 가이드라인에서 ‘임신중단’을 태아 유기 등과 같은 ‘위기 행동’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지 3년6개월이 지났는데도 공공기관의 인식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11일 여성가족부 산하 특수법인 한국건강가정진흥원(진흥원)에서 제출받은 ‘임신중단 상담’ 통계를 보면, 진흥원은 2019년 9~12월 26건, 2020년 299건, 2021년 180건의 임신중단 상담을 했다. 같은 기간 진흥원에 접수된 ‘출산 상담’과 비슷한 수치다. 출산 상담은 2020년 288건, 2021년 276건 진행됐다.

접수된 임신중단 상담 사례의 절반 이상은 청소년이었다. 2020년에는 전체 임신중단 상담 299건 중 196건이, 2021년에는 180건 중 117건이 청소년 상담이었다.

문제는 진흥원의 상담 가이드라인이 과거 ‘낙태죄’로 취급되던 때의 임신중단에 대한 인식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용혜인 의원이 진흥원에서 제출받은 ‘임신출산갈등상담 가이드라인’ 내용을 보면, 진흥원은 내담자가 임신 사실을 인지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위기 행동의 일환으로 ‘낙태(임신중단)’를 명시했다. 임신중단은 자살, 태아유기, 노숙, 도난 등과 같은 부정적 행동의 한 사례로 표시됐다.

이를 두고 ‘임신중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반영하지 못한 내용’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대표는 “여성단체들은 이전부터 임신중단을 위기임신의 사례로 다뤄서는 안 된다는 지적을 해왔다. 이 가이드라인은 지금도 (인식 차원에서) 별반 변화가 없음을 방증한다”며 “심지어 이 가이드라인은 비혼과 이혼을 특정해서 ‘위기상황’ 범주로 분류하고 있는데, 기혼에서도 임신중단이 필요할 수 있는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가이드라인에는 ‘임신중단의 의미, 위험성, 부작용, 방식, 후유증에 대한 정보 제공’ 및 ‘미성년 청소년의 경우 보호자의 동의를 받아서 진행되어야 함을 안내’ 등 내용도 있다. 여성계는 임신중단에 대한 정보 제공보다 부작용 및 보호자 동의에 대한 설명이 과도하게 앞설 경우 개인의 자기결정권을 해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청소년의 임신중단에 부모가 개입해서는 안 되며, 부모의 개입을 요청하는 것은 당사자의 건강 보장을 위한 경우에 국한돼야 한다고 권고한다.

용혜인 의원은 “상담 시 중립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명시해놓고도 정작 임신중단에 관해 제공하는 상담 정보는 위험성과 부작용, 후유증 등 부정적인 내용이 상당해 내담자에게 불안감만 심어줄 우려가 있다”며 “임신중단이 죄가 아닌 것이 지금의 법 체계임을 인지해 여성가족부가 상담과 교육 체계를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연주 기자 play@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