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헤어질 결심

한겨레 2022. 10. 11. 18:3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세상읽기]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달 22일 오전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를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우석진 |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영화 <헤어질 결심>을 재밌게 봤다. 박찬욱 감독 특유의 상상과 현실을 오가는 연출로 인해 몇번을 보고 나서야 스토리 전개가 비로소 이해됐다. 무엇보다 필자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영화 포스터 제목 위에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 ‘짙어지는 의심 깊어지는 관심’이라는 문구였다. 극 중에서 장해준(박해일)의 짙어지는 의심과 깊어지는 관심을 받던 송서래(탕웨이)는 마침내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된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와 추경호 부총리의 밀월이 계속되고 있다. 추 부총리는 윤석열 정부 초대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내정되자 “한국은행과 수시로 소통하면서 물가와 금리 안정을 위해 애쓰겠다”고 밝힌 바 있다.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의 조합, 이른바 폴리시 믹스(policy mix)를 하겠다고 한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계속되고, 인플레이션은 지속되고, 원-달러 환율은 치솟고, 가계부채 문제는 해결 기미조차 없고, 경기는 둔화하고, 무역적자도 계속되고 있는 등 국내외적 리스크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정부와 중앙은행 중 한쪽의 독립적인 대응만으로는 이런 경제위기를 돌파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의 사령탑인 두 사람은 1960년생 동갑내기에다 2009년 금융위원회에서 금융정책국장과 부위원장으로 손발을 맞춰본 경험도 있다. 친분이 있는 두 수장은 정부와 중앙은행 사이 소통과 협력을 강조해왔고, 이를 위해 만남도 지속해왔다. 수장들뿐만 아니라 정책 조정을 위한 기재부와 한은의 실무자급 회의도 열리고 있다고 한다.

기재부와 한은이 독립적으로 정책을 정하는 것보다 두 기관이 서로 잘 협력하면 경제가 좀 더 나은 균형으로 이동해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인플레이션과 싸우기 위해 한국은행이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을 경우, 금리 인상에 취약한 차주들과 취약계층에 재정지원 정책이 필요하다. 재정정책과의 조합 없이 한은이 단독으로 금리를 인상했을 경우 소상공인·자영업자들과 서민들의 삶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우리 경제는 막대한 가계부채로 금리 인상에 취약한 구조다. 그런 면에서 한은과 기재부의 잘 조정된 협력은 지금과 같은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필요를 넘어서 필수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정부의 재정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데에 있다. 올해 초 기재부가 전망했던 초과세수 53조원은 최근 단행된 감세 정책과 경기 둔화로 온전히 걷기 어려워졌다. 유류세와 자산에 대한 과세를 낮췄을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률이 기대보다 저조해 세수가 예상보다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미 초과세수 전망에 기초해 소상공인·자영업자를 지원했고, 지방정부와 교육청에 교부세 및 교부금 정산도 진행하고 있다. 대통령실 이전 재원이 부족해 다른 부처 불용 재원을 전용하는 지경인데, 세입 부족으로 연말쯤엔 추경에 나설 가능성도 크다.

상황이 이런데 정부는 엉뚱하게도 건전재정을 강조하고 있다. 재정지출을 건전재정이라는 이름으로 삭감하고 있다. 취약계층을 두텁게 지원하겠다는 대통령의 말씀은 있었으나, 실제 제출된 내년도 예산안의 경우 자연증분을 제외하면 복지지출은 동결되었거나 삭감된 사업이 많다. 노인일자리가 줄어들었고 국공립 어린이집 예산이 삭감됐다.

세입 환경이 어렵기 때문에 정부로서는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추가 재정소요가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최근 들어 추경호 부총리는 기준금리 추가 인상에 신중론을 제기하고 있다. 가계부채 등 문제를 이유로 들고 있다. 그러면서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서 많은 고심을 하며 결정하리라 생각한다”면서 한은을 은근히 압박하고 나섰다. 또한 10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정점을 기록할 것이라는 전망 또한 전파하고 있다. 이 또한 한은의 금리 인상에 대한 압박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창용 총재의 고민은 깊어질 것이다. 이 총재는 국정감사에서 “물가상승률이 5%가 넘으면 여러 고통이 있더라도 금리 인상을 통해 물가를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1500원을 향해가는 원-달러 환율 또한 금리 인상 필요성을 더한다. 이런 결정을 하려면 이 총재는 이제는 추 부총리와 마침내 헤어질 결심을 하고 독립적인 결정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건전재정이라는 도그마에서 벗어나 민생을 위한 재정정책에 나서야 한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