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의 언어탐방] 파스타: 다양성이 중요하다, 음식도 삶도

한겨레 2022. 10. 11.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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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의 언어탐방]우리는 파스타 하면 국수 또는 면(麵)을 떠올린다. 그러나 파스타를 국수로 환원할 수 없다. 국수는 파스타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국수를 정의할 때, '가늘고 길게 뽑아낸 식품'이란 모양 설명이 반드시 들어간다. 하지만 영어 누들에 해당하는 이탈리아어 단어는 딱히 없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김용석 | 철학자

생물학자 존 타일러 보너는 생명의 진화에서 “크기가 중요하다”(Size matters)고 역설해왔다. 모든 생명체는 진화 과정에서 크기에 따라 내·외부 구조와 형태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일종의 ‘크기 결정론적’ 입장인데, 이런 주장은 사실 모양도 중요하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크기와 모양의 상호작용으로 이 세상에는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경탄할 만한 무수히 많은 모양”(찰스 다윈)의 생명체들이 존재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물리의 세계에서도 모양이 중요하다(Shape matters). 항공기 개발 초기에는 추락 사고가 잦았다. 원인은 다양했는데, 엔진 결함도 날개 이상도 없으며, 연료가 새는 것도 아닌데 추락하는 사고가 있었다. 항공기술자들이 찾아낸 원인은 의외의 곳에 있었다. 바로 창문 모양이었다. 초기 항공기에는 사각형 창문을 설치했는데, 뾰족한 각이 있는 창문 모서리에 공기 압력이 집중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서리에는 압력 스트레스가 쌓여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다 창문이 부서졌다. 그 뒤로 비행기 창문의 직사각형 모서리는 둥글게 곡선으로 제작됐다.

모양은 중요하다. 비행기의 예를 든 건 안전과 연관된 이야기가 독자의 주의를 끌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전과는 관계없지만, 위와 같은 물리적 원리로 물체의 모양을 만들기도 한다. 과자 봉지의 윗부분을 뾰족한 톱니바퀴처럼 제작하는 것은 그 원리를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뾰족한 각 쪽으로 힘을 가해 봉지를 쉽게 뜯을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오히려 ‘모양의 물리학’에 관한 특수한 예들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수많은 물체에는 모양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잘 굴러가는 물체는 원형으로 해야 한다. 모든 바퀴가 그렇다. 발명 초기의 연필은 긴 원통형이었지만, 잘 굴러서 책상 아래로 떨어지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육각형으로 모양 변경의 역사를 거쳤다. 이런 예들도 광활한 ‘모양의 세계’에서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작은 생활 소품에서 대형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모양은 중요하다. 모든 디자인은 모양과 씨름한 결과다.

음식과 식탁의 세계로 가면 모양의 물리적, 미학적, 심리적, 종교적 요소들이 총동원됨을 알 수 있다. 각양각색의 식기들과 숟가락, 젓가락, 포크, 나이프, 그리고 찻잔, 술잔 등 음료를 따라 마시는 도구들의 다양한 모양들은 다 이유가 있다.

파스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빙 돌아왔다. 파스타야말로 모양의 다양성과 밀접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파스타 하면 국수 또는 면(麵)을 떠올린다. 파스타를 ‘이탈리아식 국수’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나 파스타를 국수로 환원할 수 없는데, 국수는 파스타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국수를 정의할 때, 그 식재료로 무슨 곡물 가루를 쓰든 ‘가늘고 길게 뽑아낸 식품’이란 모양 설명이 반드시 들어간다. 이는 국수에 해당하는 영어로서 국제어가 되다시피 한 누들(noodle)을 정의할 때, 그 유사한 표현(long strips or strings)이 반드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영어 누들에 해당하는 이탈리아어 단어는 딱히 없다.

파스타의 세계에도 물론 다양한 국수들이 있다. 스파게티, 페투치네, 링귀네, 비골리, 카날리니, 부카티니, 카펠리니 등. 이들을 ‘파스타 룽가’, 곧 긴 파스타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 ‘파스타 코르타’, 곧 짧은 파스타도 펜네, 파르팔레, 리가토니, 리촐리, 스텔리네, 콘킬리에, 로텔레, 오레키에테 등 많다. 둥지나 실타래 모양으로 뽑아낸 파스타도 있다. 또한 ‘파스타 리피에나’, 곧 우리의 만두처럼 ‘소를 넣은 파스타’도 다양하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제법 친근한 것으로는 라비올리가 있다. 이렇게 파스타는 모양이 저마다 다르고 실제로 개별 파스타의 이름은 그들의 모양에서 온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끈 모양의 스파게티, 펜 모양의 펜네가 그렇다.

지금까지 나열한 것들 가운데에는 파스타의 원조 격 음식이 두가지 빠져 있다. 마케로니와 라자냐다. 마케로니는 그 발음이 변형되면서 ‘마카로니’라는 국제어가 됐는데, 고대로부터 이탈리아 파스타를 상징하는 음식이었다(국수의 일종인 스파게티가 파스타를 대표하는 말로 쓰이기 시작한 건 현대에 이르러서다). 마케로니는 ‘길고 짧고 두껍고 가늘다’라는 모양의 수식어를 무색하게 만드는데, 각 지방마다 동일한 이름으로 ‘무수히’ 다양한 모양의 파스타를 요리하기 때문이다. 마케로니에 쓰는 소스 역시 대단한 다양성을 자랑한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즐겼다는 라자냐도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길고 짧다는 표현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음식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 볼품없는 넓적한 사각형이 오히려 소스의 다양성을 허용하면서 요리 미학의 한자리를 차지한 공로를 인정한다.

모양의 다양성은 소스의 다양성과 상호작용한다. 파스타의 모양에 따라 소스와의 궁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당연히 최적의 궁합은 파스타의 맛을 결정한다. 화학의 세계에서도 모양은 중요하다.

모양의 다양성이 맛을 결정한다는 것은 동일한 음식 재료를 어떻게 달리 준비하는지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우리 일상 음식을 예로 보자. 언젠가 학생들과 손짜장집에서 식사를 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까지 학생들은 저마다 왜 수타면이 기계면보다 맛있을까 논쟁했다. 조리사가 직접 면을 치는 장면을 볼 수 있는 음식점이었는데, 한 학생은 조리사의 땀이 짭짤함을 더해줘서 그렇다는 농담을 했다. 손맛이란 막연한 추정도 있었다. 급기야 내 생각을 물었는데, 나는 짜장면 먹고 나서 답하겠다고 했다. 천천히 식사하며 손짜장의 면발을 살펴봤다. 기계면은 동일한 두께와 길이 그리고 표면을 지니지만 수타면은 국수의 가락이 저마다 모두 다르다. 굵어졌다 가늘어지고, 흠집 난 듯한 표면들이 각기 다르다. 당연히 짜장 소스가 곳곳에 잘 스며든다. 면과 소스를 잘 섞어 먹기에 좋다. 역시 모양의 다양성이 맛을 키운다.

다양성은 중요하다. 생물학적으로는 생명체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고, 정치·사회적으로는 자유의 폭을 넓히는 데 촉진제 역할을 한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이 못지않게 중요한 점이 있다. 다양성은 재미를 준다. 삶의 다양성은 ‘재미있다’는 데에 있다. 하늘은 높고 몸과 맘을 살찌울 절호의 계절, 이 가을에 다양성의 마력으로 재미 넘치는 파스타 요리를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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