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건웅의 풍수유람] 23. 화무십일홍 권불십년

손건웅 2022. 10. 11.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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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 권력의 무상함을 말할 때 쓰는 말이다.

어느 시대가 그렇지 않았겠냐만, 자유당 정권이 무너질 때도 이 말이 딱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下野)를 권했다는 학생대표였던 유일라(兪一羅)씨의 증언을 발췌한다.

우리는 (경무대) 후원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이승만 박사가 애견 ‘해피’를 안고 곽영주 경호실장과 함께 나타났다. 분위기는 차분히 가라 앉은 상태였고 모두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곽실장이 위압적인 시선으로 노려봤다. 나는 얼른 그의 시선을 외면하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질문했다.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박사는 “내 후계자로 생각한 것은 사실이야. 그러나 민주 법치국가에서 부정으로 당선됐으면 안되지” 우리 대표 중 연장자인 김기일씨가 물었다. “이정재·유지광·임화수 등 정치깡패가 있다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이박사는 놀라며 “법치국가에서 정치깡패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있다면 단호히 처벌해야지”

나는 이어서 “각하께서 하야하시는 길만이 나라를 구하는 일입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박사는 “하야”라는 말을 못들었는지 “어떻게 하라고”라며 되물었다. 잠시 후 곽 실장이 이박사의 귀에 대고 “step down”이라고 했다. 이에 이박사는 놀라는 표정으로 “하야라니, 그러면 날더러 물러나라는 얘기냐, 국민이 원해?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야지” 우리가 경무대를 나온 것은 10시 쯤이었다. 그리고 10시 10분쯤 라디오에서는 이박사의 하야성명이 흘러나왔다.

이기붕(1896~1960.4월)과 박마리아(1906~1960년) 부부 묘소. 파주 용미리 소재.

비석에는 국회의장 만송(萬松) 이기붕 선생 묘, 부인 박마리아 여사 부좌라고 쓰여 있다. 원래는 망우리에 안장했다가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추석이 지났는데, 벌초조차 하지 않은 모습이 인간사의 무상함을 전해준다.

몰락한 양반가의 독자로 태어난 이기붕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아래서 성장했다. 중·고등학교를 어렵게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중퇴한다.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오와주의 데이버 대학을 졸업했다. 귀국 후에는 미국 유학시절 알게된 박마리아와 결혼한다. 이런저런 사업이 모두 실패하고,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국일관에서 10년간 고용인으로 일했다.

1945년, 이승만이 귀국하자 이기붕은 돈암장을 출입하는 비서가 되었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박마리아가 프란체스카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자 이기붕의 위상도 변하기 시작했다. 정부 수립 이후에는 대통령 비서실장, 서울시장,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다.

1951년, 자유당이 창당되면서 이범석의 족청계가 숙청된 후 그는 2인자로 부상한다.

195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3차례 민의원 의장에 당선되면서, 이승만 장기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하니, 그가 살던 집은 ‘서대문 경무대’라 불릴 정도였다.

1956년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장면(張勉)에게 낙선한다. 1958년 총선에서는 지역구(서대문)에서 당선이 불안하자 이정재가 다져놓은 이천(利川)지역구를 가로채어 당선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이승만은 제 4대 대통령에 이기붕은 제 5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자유당이 벌인 대대적인 선거부정은 정권의 몰락을 초래했다.

하단 우로부터 이강희(어려서 사망), 이강석(24세), 이강욱(20세) 묘소.

1960년 4월 28일 아침 5시 40분, 경무대 제 36호 관사에서 5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기붕의 아들인 강석은 부모님과 동생에게 한 발씩, 그리고 자신의 배와 머리에 총을 쏘아 죽었다. 권력의 2인자였던 이기붕 가족은 그렇게 떠났다.

하단 중앙에 자리한 이강석 묘. 이승만의 양자이자 이기붕의 장남.

비석 뒷면의 “불타는 정의감이 있었기에 부모님 모시고 동생 데리고 기꺼이 웃으며 자진해서 간 것을 우리는 아노라”라는 글귀가 맹랑하다. 당대에 “귀하신 몸”으로 “가짜 이강석 사건”까지 초래한 그의 행적은 잊었단 말인가.

묘소 뒤에서 바라보면 삼각산이 뚜렷이 보이고 뭇산이 중중하니, 나름 명당이라는 분도 있다. 사진에 표시한 붉은 선의 맥로가 하나도 아닌 여러 개가 묘역을 지나서 위로 올라간다. 겹겹의 대흉지에 해당한다.

곽영주(郭永周, 1924~1961년 12월)

8·15 광복 이후 고향 선배인 이정재의 도움으로 수도경찰학교에 입교했다. 이승만의 눈에 띄어 경호원으로 특채된다. 1950년 경무대 경위에서 1957년 경무관으로 초고속 승진을 한다. 총경에서 경무관까지 걸리는 시간이 7년인 것에 비하면 곽영주의 승진은 파격중의 파격이었다.

곽영주는 이승만의 백을 믿고 대통령 경호임무를 넘어서는 월권을 자행한다. 은혜를 갚는다며, 이정재가 어떤 문제를 일으켜도 그의 편을 들어줬다. 경찰에 이정재의 비위를 신고하면 신고한 사람이 잡혀가는 일도 발생했다. 곽영주는 군 장교의 진급심사에도 간여하기 시작했다. 해당 장교의 능력과 소양보다는 가족관계나 개인정보를 이용하여 태클을 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사회주의자였던 형님 박상희의 이력과 남로당 가입 경력의 박정희가 걸려들었다. 김정열 국방장관과 백선엽의 주선으로 박정희는 가까스로 진급을 하였으나, 그의 이혼경력과 여자관계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1960년 4·19 혁명이 발생하자 그는 경찰을 동원하여 무력 진압을 했으니, 서대문 총격사건과 이기붕 자택 발포사건은 그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이승만이 물러나자 장면 정권의 재판에서 단기형에 처해졌다. 그것이 끝이 아니였다. 1961년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다시 체포되어 혁명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와 같은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나중에는 석방된 사람도 있는데, 곽영주는 끝내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를 두고 곽영주와 박정희 사이의 구원(舊怨)을 떠올리는 호사가도 있었다.

곽영주 묘소. 이천시 율현동 소재. 현풍곽씨 문중 묘역의 뒤에 자리한다.

비석 뒷면의 글귀를 옮긴다. “경무대 경찰서장을 역임하고 경무관에 승진하여 대한민국 리승만 초대 대통령의 경호실장을 명 받으시어 그 직무를 다하였다.”

하단에는 곽영주, 중간에는 1947년에 별세한 형님, 상단에는 1972년에 별세한 부모 묘가 자리한다.

그림의 표시처럼 붉은 선의 맥로는 곽영주와 형님 묘소를 경유하여 부모님 묘 상석 앞에 12회절을 주혈을 맺고, 부모 묘소는 여기(餘氣)에 자리한 11회절 명당이다.

곽영주와 그의 형님 묘소는 맥로가 지나가는 면배의 배(背)에 해당하는 흉지에 모셨다.

이정재(李丁載,1917~1961.10월)

동대문에서 광목장사를 하던 이정재는 김두한의 부하로 주먹 세계에 입문한다.

1953년 동대문 상인연합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취임한다. 이정재는 상인들에게 공갈·협박을 해서 푼돈을 갈취하는 양아치가 아니였다. 오히려 상인들의 애로사항을 경청하는 해결사였다. 그는 헐값에 거두어들인 부지를 상인들에게 고가에 판매하여 폭리를 취했으니, 엘리트(?) 주먹다운 지능적 수법이었다. 조직을 체계적으로 유지·관리하기 위해 이기붕과 인연을 맺고 자유당 당원이 되기도 했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 당시 국회 방청객 난동, 1955년 자유당 창당동지회 방해, 1956년 대통령 선거 당시 야당집회 방해, 1957년에는 장충단 공원 정치테러 사건. 위와 같은 정치 테러의 배후에는 이정재가 있었다. 그의 야심은 본인이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었다. 당시 290여 곳이 넘는 이천의 자연부락을 일일이 다니며 주민들의 애경사를 챙겼다. 학교에는 재정지원은 물론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눈 앞에 다가온 1958년 총선, 이천에서 이정재의 대항마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복병이 나타났다. 이기붕은 자신의 지역구에서 당선이 불확실하자 이천으로 지역구를 갈아탄다. 이기붕과 알력을 빚자 박마리아에게 미운 털이 박혔다. 이 때를 기점으로 이정재의 인생도 내리막을 걷게된다. 동대문 상인연합회 회장직도 약삭빠른 임화수가 차지한다.

4·19 혁명 이후, 장면 정권에서는 가벼운 형량으로 복역했으나 석달 후에 일어난 5·16 군사정부는 달랐다. 혁명재판부에서 폭력행위 및 범죄단체 수괴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는다. “나는 깡패입니다”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조리돌림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1961년 10월,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하니 그의 나이 44세였다.

이정재 묘소. 이천시 안평리 소재.

그의 묘소를 다시 찾은 것은 10년이 넘었다. 묘소의 초입새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맸다. 80이 넘은 동네 토박이 어른을 만나 찾을 수 있었다. 묘소에는 이따금 덩치 큰 참배객이 온다고 한다.

붉은 선으로 표시한 맥로가 전면에서 진입하여 맺은 11회절 명당에 자리한다.

“이러면 후대가 넉넉한 삶을 살았을텐데요.” 팔순 어른의 대답이다. “숨을 죽이고 살았으니 편한 삶은 아니었을 거요.”

덧없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 중에서도 가장 덧없는 것이 권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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