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렉스 아니면 무지출..'중간' 없어진 소비 세상
한쪽에선 여전히 명품 '오픈런'
'소비 양극화'로 경기침체 우려
소비 양극화 현상이 점차 심화하고 있다. 고물가에 따른 불황이 깊어지면서다. 일부는 '무지출 챌린지'로 씀씀이 줄이기에 골몰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명품 등 고가품을 거침없이 소비하고 있다. 아예 비싸거나 아예 저렴해야 소비자의 선택을 받으면서 시장에서 이른바 '중간'이 사라지는 셈이다. 이 같은 소비 양극화는 고인플레 속에서 경기 침체를 더욱 부추길 것으로 우려된다.
점심값도 아끼자
11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108.93(2020=100)으로 전년 동기 대비 5.6% 상승했다. 8월부터 상승세가 소폭 꺾이는 추세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소비자 물가는 올해 초부터 무섭게 치솟았다. 3월 4.1%, 4월 4.8%에서 5월에는 5.4%로 급등했다. 특히 지난 6월(6.0%)과 7월(6.3%)은 6%대로 올라 외환위기였던 1998년 11월(6.8%)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이처럼 극심한 고물가에 한 푼이라도 지출을 줄이려는 움직임이 거세다. 일부 소비자들은 돈을 한 푼도 쓰지 않는 날을 SNS에 인증하는 '무지출 챌린지'를 벌이고 있다. 점심값을 아끼기 위해 도시락을 싸는 직장인도 늘었다. 위메프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7월까지 도시락 관련 상품 판매는 전년 동기 대비 80% 이상 증가했다. 마트에서는 이른바 치킨런도 벌어졌다. 프랜차이즈 치킨 가격이 연일 오르자 6000~1만원의 대형마트 치킨에 사람들이 몰렸다.
사라졌던 대형마트의 초저가 경쟁도 부활했다. 홈플러스는 최근 '최저가 보상제'를 도입했다. 홈플러스는 대형마트 3사의 상품 가격을 비교해 비싸게 구매하면 그 차액을 돌려주겠다고 선언했다. 앞서 이마트도 쿠팡과 롯데마트 등 경쟁사의 상품을 대상으로 최저가격 보상제를 도입했다. 과거 2008년 금융 위기 때나 있었던 대형마트의 '100원 단위' 경쟁이 되살아난 셈이다.
명품은 '플렉스'
반면 한편에선 명품 등 고가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명품 카테코리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28.1% 증가했다. 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 구찌, 디올 프라다 등 명품 업체들은 올해 초부터 1~3차례에 걸쳐 제품 가격을 올렸다. 국내 물가인상률의 최대 4배 수준에 달하는 인상이었다. 그럼에도 명품 매출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고가의 주류도 인기다. 와인과 위스키가 이제 '보통' 주류로 자리 잡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여파가 컸다. 젊은 층 사이에서 홈(home)술 등 트렌트가 불면서 위스키, 와인 수요는 계속 증가세다. 실제로 올해 상반기 위스키의 수입금액은 1억2365만달러(1621억원)으로 나타났다. 전년 대비 62.9% 증가했다. 와인 수입금액도 같은 기간 6.2% 오른 2억9749만달러(3901억원)로 집계됐다.
고물가지만 '하나를 사도 제대로 사겠다'는 인식의 영향이 컸다. 다른 지출을 아껴 자신이 원하는 상품은 아낌없이 '플렉스'하는 셈이다. 젊은 층 사이의 '나심비'(나의 심리적 만족을 위한 비용) 트렌드가 대표적이다. 특히 고가품의 주 구매층인 고소득층은 불황에도 소비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백화점의 VIP 수요가 견고한 것이 그 예다. 고소득층 사이의 보복 소비 열풍도 여전하다.
'평균' 없는 사회
이 같은 현상은 앞으로 더 심화할 가능성이 크다. 소비 양극화는 인플레이션의 대표적인 폐해다. 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전 세계는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다. 각국이 고금리 정책을 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만 고금리는 기업과 소비자의 채무 부담을 키우는 대표적 요인이다. 이는 다시 지출 감소로 이어진다. 악순환인 셈이다. 인플레이션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소득 양극화가 커지고 있는 것도 우려를 키우고 있다. 소득 양극화는 소비 양극화의 대표적 원인으로 꼽힌다. 자산이 많은 이들은 인플레이션에도 큰 타격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자산이 증가한다. 하지만 중산층 이하 사람들에게 인플레이션은 치명적이다. 소득 증가보다도 물가 인상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부동산, 주식 등 자산 불평등 구조도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유통 업계에서는 소비 양극화에 '중간'이 사라졌다는 말도 나온다. 아예 비싸거나 아예 저렴해야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 이처럼 중간 없는 시장은 경기 침체를 야기할 수 있다. 소비 양극화는 기본적으로 소비의 감소를 동반한다. 지갑을 잘 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소비 형태가 명품 아니면 최저가 상품 위주로 바뀌고 있다. 중간 가격대 제품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추세"라며 "백화점은 명품과 사치품 위주로 상품 구성을 바꾸고 있고, 대형마트와 편의점은 이른바 저가 공세를 펼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소득 불균형, 1인 가구 증가와 맞물려 소비 양극화는 앞으로 더 심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한전진 (noretreat@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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