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만점 자료는 ‘K컬쳐’의 원천...조상의 지혜 삶에 활용해야”[송의달 LIVE]

송의달 에디터 2022. 10. 11.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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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한국국학진흥원장 인터뷰 [송의달이 만난 사람]

경북 안동시 도산면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은 우리나라에서 민간 국학 기록·자료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학 연구 기관입니다. 국보 132호인 징비록(懲毖錄)과 보물 20건을 포함해 총 60만점 됩니다.

서울대 법대 77학번인 정종섭 한국국학진흥원장은 한학자 집안에서 성장해 한학에 관심이 많고 서예가이기도 하다. 사진 뒷편 벽의 글자도 정 원장이 직접 썼다./송의달 기자

1996년에 문을 열어 26년 만에 거둔 성과입니다. 연구 인력과 예산 규모 측면에서도 급성장한 한국국학진흥원은 작년 3월부터 정종섭(鄭宗燮·65) 전 행정자치부 장관이 이끌고 있습니다. 그는 법학 교수 시절 ‘특별검사제’와 ‘책임 총리제’ 도입, ‘청와대 국정상황실 설치’ 같은 국정개혁 과제를 제안했습니다. 기자는 이달 초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정 원장을 만났습니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국학진흥원 전경. 안동 시내까지는 승용차로 40~50분 거리이다./한국국학진흥원

◇26년 만에 최고 韓國學 연구기관

- 1년 7개월째 재임하는 소감은?

“나라를 빼앗기고 숱한 전란(戰亂)을 겪고도 민간에서 많은 자료를 보존한 것 자체가 기적이다. 이는 ‘내 목숨을 잃더라도 조상의 유품을 지키겠다’는 이 지역 특유의 깊은 정신 세계가 있기에 가능했다. 고문헌을 틈틈히 읽으면서 선조들의 웅혼하고 폭넓은 사색과 고민을 발견하며 음미하고 공감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 26년여 만에 최고의 한국학(韓國學) 연구기관이 됐는데.

“역대 원장님들이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고 모든 구성원들이 합심노력한 덕분이다. 특히 3대 원장(2001~09년)인 심우영 전 총무처 장관께서 토대를 잘 닦았고, 5대 원장(2009~14년)인 김병일 전 기획예산처 장관께서 진흥원을 중흥(中興)시켰다.”

그는 “우리 국학진흥원은 도난·멸실 위기에 놓인 민간 기록유산들을 체계적으로 조사·발굴·정리하고 잘 보존해 전통 가치관을 계승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경북도와 안동시, 안동대가 공감해 1996년 설립 허가를 받았고 우여곡절 끝에 2001년 4월 본관 건물을 준공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한국의 '유교책판'이 보관돼 있는 한국국학진흥원 내 장판각 내부 모습. 유교책판은 2015년 10월 10일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조선일보DB

- 소장 자료 가운데 가장 진귀한 것이라면?

한국의 ‘유교 책판(冊板)’을 꼽겠다. 책판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저작물을 간행하기 위해 나무판에 새긴 것인데, 305개 문중과 서원 등에서 718종 6만4226점의 유교 책판을 우리 원에 기탁(寄託)했다. 이 유교 책판들은 2015년 가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각 지역 지식인 집단들이 시기를 달리해 만든 유교 책판은 수록 내용이 문학·정치·경제·사회 등으로 다양해 문화적 가치가 엄청나다.”

한국국학진흥원 내 세계기록유산전시체험관에 전시된 '한국의 유교 책판'.이 체험관은 국학진흥원이 소장한 세계기록유산을 최적의 상태로 보관하고 관람객에게 쾌적한 전시 관람 환경을 제공한다./송의달 기자

- 다른 자료들은 어떤가?

“건물의 처마와 문 사이에 글씨를 새겨 걸어둔 표지판인 ‘편액(扁額)’을 빼놓을 수 없다. 편액은 건물의 기능과 의미, 건물주가 지향하는 가치관을 3~5자 정도로 함축해 적은 것이다. 우리 원에 있는 189개 문중·서원의 편액 550점은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지역 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국보와 보물, 국가 및 도지정 문화재만 7만여점으로 전체 소장 자료의 12%를 차지한다. 소장하는 자료의 양(量)과 질(質) 모두 뛰어나다.”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돼 있는 조선시대 편액들./송의달 기자

정 원장은 그러면서 “민간의 자료를 효과적으로 전승·보존하기 위해 민간의 발의(發議)로 설립된 우리 원은 그 성과를 다시 다양한 방법으로 대중들과 공유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책·영화·웹툰·유튜브 등으로 공유

- 성과를 대중과 어떻게 공유하는가?

“자료를 국역(國譯)해 교양서 등으로 발간·보급하고 영화·웹툰·유튜브 같은 콘텐츠로도 만들고 있다. 2025년까지 국역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생활사 집대성’ 연구사업을 진행 중이다. 미래 세대를 위한 디지털 아카이브작업과 올해부터 2030년까지 9년간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자동번역 시스템 구축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국학을 낡은 골동품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가 수천 년전 이집트 문화나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저작에서 많은 영감(靈感)을 얻는 것처럼, 한반도에서 먼저 살다간 선조들이 남긴 국학 유산에서 고귀한 정보와 지식, 가치를 찾아 현재 삶에 적용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초등학교 고학년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박물관 학교 수업 모습. 2021년 9월 12일 풍천풍서초등학교 학생들과 인솔 교사들이 듣고 있다./한국국학진흥원

- MZ세대의 관심과 참여는 어떤가?

“8년째 대학생 콘텐츠 공모전을 실시하는데 매년 100여개 팀, 40여개 대학이 응모하고 있다. 우리 원 홈페이지의 ‘스토리테마파크’에 접속하면 이들이 만든 여러 콘텐츠 자료를 볼 수 있다. 네이버TV의 ‘네가 연애를 아느냐?’라는 웹드라마와 ‘녹두전’이라는 웹툰은 대학생 콘텐츠 응모작품이 바탕이 됐다. ‘녹두전’은 2019년 KBS2의 ‘조선로코-녹두전’이라는 TV드라마로 제작방영됐다.”

한국국학진흥원 홈페이지의 스토리 테마파크(http://story.ugyo.net/)/인터넷 캡처

정 원장은 “청년들에게 전통 기록문화는 무궁무진한 보물창고이자 ‘K컬쳐’의 원천”이라며 “MZ세대가 자신의 시각으로 새로운 콘텐츠로 해석하고 창조하는 일은 매우 매력적인 작업”이라고 했습니다.

- 일자리 창출도 하는가?

“올해에만 청년 125명, 50~60대 650명, 이야기할머니 4000여명 등 4700여개의 일자리를 만들었다. 이야기 할머니는 전국 8600여개 유치원과 어린이집 등에서 한국 정서를 담은 이야기를 할머니 스토리텔러들이 전해주는 사업이다. 2019년 3.6대 1, 2020년 5.4대 1, 지난해 6.5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할 정도로 매년 참가 희망자들이 늘고 있다. 유치원과 어린이집들의 반응도 좋다.”

전남 나주시의 한 유치원에서 '이야기 할머니'가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한국국학진흥원

- 도난이나 화재 사고에 대한 대비는?

“소장 자료 대부분이 종이와 목판이기 때문에 화재(火災) 예방에 특별히 신경쓰고 있다. 중앙감시실에서 실시간 CCTV로 주요 건물을 24시간 모니터링하고 산불감시 카메라 및 불꽃감지기를 운영한다. 산불 화재시에는 원격제어되는 수관(水管)수막타워를 작동한다. 매년 두 차례 모든 직원들이 지역 소방대와 함께 재난 대응 훈련을 한다. 그래선지 지금까지 사고와 재산·인명 피해는 모두 0건이다.”

정종섭 원장은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판·검사가 아닌 학자의 길을 택해 건국대와 서울대 법대 교수로 봉직했습니다. 한국헌법학회 회장도 지냈습니다. 2014년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입각한 그는 20대(2016~20년) 국회의원도 지냈습니다.

<조선일보> 1999년 4월 14일 19면에 실린 정종섭 당시 건국대 교수의 인터뷰 기사. 당시 42세이던 그는 《헌법판례연구1》을 출간했다./조선일보DB

◇“권력의 사유화 막고 법치주의 정착시켜야”

- 당시 세태(世態)와 달리 헌법학자의 길을 걸었는데.

“유신(維新) 후반기 대학생활을 하면서 ‘헌법의 정당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유신헌법에 동원된 독일 헌법학자 카를 슈미트(Carl Schmitt·1888~1985)의 결단주의 이론을 비판하던 당시에는 소장학자이던 허영(許營·1936~·현재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선생님을 좇아 헌법을 계속 공부했다. 허 교수님을 만난 것은 내 인생의 큰 행운이다.”

2004년 11월 22일자 조선일보 [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다]에서 스승 허영 교수(사진 오른쪽)와 제자인 정종섭 교수가 대화하고 있다. 정 교수는 이날 "허 영 선생님은 책을 내실 때 제자들에게 단 한 번도 심부름을 시킨 적이 없으셨지요"라고 말했다./조선일보DB

- 학자 시절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나?

“헌법학을 공부하면서 ‘대한민국을 근대 헌법국가 원리에 맞는 정상적인 국가로 어떻게 만들까’를 평생 화두로 삼고 있다. ‘정상 국가’의 의미와 작동원리, 참여하는 인간의 특질과 행동 원리 등을 밝히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 개혁 열정을 불태운 고(故) 박세일 서울대 교수와 의기투합했다.”

실제로 박세일·정종섭 교수 등 동아시아연구원(EAI) 대통령개혁연구팀이 2002년 낸 연구서 ‘대통령의 성공 조건’은 한국 대통령 제도의 구조를 파헤치고 대안을 제시한 역작으로 평가됩니다. 과거 정부에 참여했던 김정렴·노재봉·강경식·강봉균·박철언·사공일·이종찬·이홍구·김충남 등의 인터뷰를 거쳐 완성한 책입니다.

2016년 7월 6일 국회에서 열린 ‘국가혁신을 위한 연구모임’에 참석한 정종섭 당시 국회의원이 축사를 하고 있다./조선일보DB

- 장관과 국회의원으로 현실 참여도 했는데.

“율곡(栗谷)의 길과 퇴계(退溪)의 길 가운데 율곡의 길이었다. 선거 제도, 권력구조 개편 같은 정치 개혁 아젠다(agenda)를 많이 준비했으나 현실의 벽에 막혀 이루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같은 비정상적 혼란이 벌어졌고 초선 의원으로서 한계도 컸다. 현실 세계는 이론 세계와 크게 다름을 온 몸으로 확인했다.”

- 지금은 어떠신가?

“매주 3일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상근(常勤)한다. 그 중 직원들과 매주 수요일 마다 국학을 공부하는 학습 동아리와 소양 강좌에 참여하고 있다. 제자인 현역 교수들과 매월 ‘한비자’ ‘상앙’ ‘도덕 감정론’ 같은 동서양 고전을 읽는 공부 모임도 하고 있다.”

정종섭 한국국학진흥원장이 2022년 3월 출간한 '憲法學原論'(헌법학원론) 전면개정판(제13판). 이론(Theorie)과 실천(Praxis) 영역 경험을 집대성한 책이다./인터넷캡처

정 원장은 “한국의 지식인으로서 시대와 현실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으며, 지식인으로서의 길을 평생 걷겠다. 현실로부터 도피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헌법적 관점에서 우리 사회의 가장 긴요한 과제라면?

“과거부터 현재까지 모든 문제의 뿌리는 권력의 사유화(私有化)이다. 권력의 자의(恣意)적 사용을 금지해 권력을 공적(公的)인 것으로 만드는 것, 즉 법치주의(法治主義) 정착이 핵심적인 과업이라고 본다.”

'유교 책판'을 보관하고 있는 국학진흥원내 장판각에 서있는 정종섭 원장/한국국학진흥원

- 21세기에 전통 국학이 갖는 의의(意義)라면?

“선조들의 유산들에서 밝혀낸 한국 문화의 독창성과 보편적 가치는 세계 모든 나라가 공유할 수 있는 귀중한 자산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선조들이 남긴 문헌을 읽을 때마다, 그 분들 역시 지금 우리들처럼 시대와 인간, 공(公)의 문제를 붙들고 치열하게 고민하였음을 확인하고 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대학생 상대로 진행하는 '전통 문화 활용 콘텐츠 공모전' 포스터. 올해로 8번째이다./인터넷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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