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교회·학교·병원… ‘삼각 선교’가 한국 근대 이끌었다”

광주·대구/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22. 10. 11.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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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교총, 개신교 근대 유적 탐방
대구 개신교 선교의 요람 ‘청라언덕’을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둘러보고 있다. 선교사들은 이 언덕을 중심으로 신학교와 대구제일교회, 동산병원,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등을 세웠다. /김한수 기자

지난 7일 낮 대구 중구 청라언덕은 포항에서 수학여행 온 중학생들로 붐볐다. 학생들은 해설사의 안내를 따라 이 언덕을 중심으로 배치된 대구제일교회와 선교사 사택, 외국인 선교사 묘지 등을 탐방했다. 이 동산 주변으론 동산병원과 신명학교도 있다. 계성학교도 이 언덕에서 시작했다. 가곡 ‘동무 생각’의 가사로 잘 알려진 ‘청라언덕’은 담쟁이(청라)가 선교사들의 서양식 주택을 감싼 이국적 풍경 때문에 붙은 별칭이라고 한다. 이곳은 120년 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미션 스테이션’ 즉 선교 기지였다. 선교사 주택 앞엔 ‘근대문화 골목 투어 출발점’이란 푯말이 있다. ‘3·1운동 만세길’ ‘이상화·서상돈 고택’ ‘구 교남 YMCA 회관’ ‘약령시’로 이어지는 1.6㎞ 투어의 출발점이 개신교 유적이라는 점은 우리의 근대와 개신교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20~130년 전 개신교 선교사들은 복음뿐 아니라 교육과 의료 등 근대를 이 땅에 선물했다.

개신교 연합 기관인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은 지난 5~7일 서울 새문안교회와 정동제일교회를 시작으로 전주, 광주, 대구의 개신교 근대 유적을 탐방했다. 전주와 광주의 미션 스테이션 풍경도 ‘교회·학교·병원’이 모여있다는 점에서 청라언덕과 닮은꼴이었다. 전주 화산동엔 예수대학교와 예수병원, 기전대학교, 신흥학교가 개신교 타운을 이루고 있고, 광주 양림동에는 호남신학대, 광주기독간호대학, 수피아여고 등이 선교사 주택, 선교사 묘역과 모여 있다. 총신대 역사교육과 허은철 교수는 “선교사들은 목사와 교사, 의사가 함께 활동했기에 삼각 선교, ‘삼사(三師) 사역’이라 부른다”고 말했다.

광주의 선교기지였던 양림동 전경. 앞쪽으로 호남신학대와 현지에서 각각 '웃(윗) 교회' '정원 교회' '계단 교회'란 별칭으로 불리는 교회들, 기독병원, 광주기독간호대학, 수피아여고 등이 모여있다. /김한수 기자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을 대하는 태도는 ‘네비우스 원칙’에 담겨 있다. 이 원칙은 ‘상류층보다는 노동자 전도’ ‘부녀자와 청소년 전도’ ‘한글 사용’ ‘자립하는 교회, 헌금하는 교인’ ‘한국인 스스로 전도’ ‘의사가 본보기가 될 것’ 등을 원칙으로 한국인 목사, 의사, 교육자 양성을 목표로 삼았다. 선교사들은 씨앗을 뿌리고 열매는 한국인들이 거둘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광주 양림동 우일선 선교사 주택을 찾은 탐방단. 왼쪽부터 허은철 총신대 교수, 최흥진 호남신대 총장, 류영모 한교총 대표회장, 신평식 한교총 사무총장. 우일선 선교사 주택은 광주시 기념물 15호 현재는 영성수련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김한수 기자

100여 년 전 한국은 선교지로서 열악했고, 선교 기지는 버려진 땅이었다. 전주 화산동은 성문 밖, 광주 양림동은 아기들 시신을 버리던 언덕, 대구 청라언덕 역시 무연고자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선교 기지마다 남성뿐 아니라 여성 교육기관을 세운 것도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윌리엄 정킨(1865~1908) 선교사를 기념하는 의미로 이름을 붙인 전주 기전(紀全)여학교를 비롯해 광주 수피아여학교, 대구 신명여학교를 선교사들이 설립했다. 이 기지에서 교육받은 이들은 각 지역 3·1운동과 근대화의 주역이 됐다.

선교 기지 언덕마다 설치된 선교사 묘역은 당시 선교사들이 목숨 걸고 한국을 찾았음을 보여줬다. 전주 기독교근대역사기념관 뒷동산엔 ‘군산 선교의 개척자’라는 정킨과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숨진 그의 세 아들 무덤이 함께 있다. 대구 선교사 묘역엔 100년 전 선교사들 외에도 하워드 모펏(1917~2013)의 묘지가 있다. 평양신학교 교장을 지낸 새뮤엘 모펏 선교사의 아들인 하워드 모펏은 40여 년간 대구 동산기독병원에서 근무하고 병원장까지 지낸 후 1993년 미국으로 귀국했다가 숨진 후 유언에 따라 이곳에 안장됐다. 한국 간호학계의 대모라는 서서평(엘리자베스 셰핑·1880~1934) 선교사는 광주 양림동 묘역에 잠들어있다. 그는 빈민과 한센인들을 돌보다 영양실조로 숨졌다.

전주 선교사 묘원. 가운데 묘비는 '군산 선교의 선구자'로 불리는 전킨 선교사의 묘비이며 바로 앞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 그의 세 아들의 이름을 각각 새긴 작은 돌판이 놓였다. /김한수 기자

선교사들의 헌신은 한국인들에게 이어졌다.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로서 걸인과 고아, 빈민을 돌보다 24세에 요절한 방애인(1909~1933) 선생, 헐벗은 이를 보면 자기 옷을 벗어주며 거지들을 거두어 ‘이 거두리’란 별칭을 얻은 이보한(1872~1931) 선생 등 ‘거리의 성자’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이런 헌신과 희생을 자양분으로 개신교가 뿌리 내릴 수 있었다. 최흥진 호남신대 총장은 “광주 정신의 모태는 선교사들의 희생 정신”이라고 말했다.

한교총 대표회장 류영모 목사는 “세상은 종교 없이 살 수 있지만 종교는 세상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며 “희생과 헌신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린 선교사들의 초심을 되새기기 위한 한교총 차원의 탐방 프로그램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광주·대구=김한수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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