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두 휩쓴 17세기.. 동서양 왕들은 걸어다니는 '종합병동'이었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2022. 10. 1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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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76] 숙종과 루이14세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국왕의 몸은 그 자체로 늘 국정의 핵심 문제였다. 조정은 국왕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고, 이 과정에서 매우 많은 기록을 남겼다. 지난 시대 국왕들이 겪은 크고 작은 질병과 치료 상황에 대해 소상히 알 수 있는 이유다. 거의 같은 시기에 재위했던 조선의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과 프랑스의 루이 14세(1638-1715, 재위 1643-1715)를 건강 문제라는 관점에서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28회 ‘루이 14세의 건강’에서 다룬 내용 일부를 간략히 다시 소개하기로 한다).

베르사유 궁정에서는 다캥(Antoine d’Aquin)과 파공(Guy-Crescent Fagon)이라는 두 명의 궁정 수석의가 수십 년 동안 국왕을 매일 진찰하고 결과를 기록하여 ‘건강일지(Le Journal de santé)’를 남겼다. 두 사람은 국왕이 아침 8시에 기상했을 때 제일 먼저 찾아와서 몸 상태를 살피고, 병세가 발견된 때에는 적절한 치료를 했으며, 이런 사실들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 기록을 보면 루이 14세는 평생 수많은 병을 달고 산 ‘인간 종합병동’이라 할 만하다. 그런 몸으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장수에 속하는 77년을 산 것이 신기할 정도다.

루이 14세, 좌측 상부 치아들 전부 뽑아

루이는 1647년 아홉 살에 천연두(두창)에 걸렸다. 이로 인해 얼굴에 생긴 얽은 흔적은 평생 콤플렉스로 남았다. 치아도 부실하여 1685년 치근을 잘라내는 처치를 했는데, 깨끗하게 마무리되지 않아 농양이 생기고 골염이 심해졌다. 할 수 없이 좌측 상부 치아들을 전부 발치해야 했다. 마취제가 없던 시절이니 극심한 고통을 겪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이때 발치를 담당한 사람이 너무 세게 잡아당겨서 입천장 절반이 뜯겨 나가고 종양이 생겼다. 천공(穿孔) 부분을 처리하는 방법은 벌겋게 가열한 쇠막대로 지지는 수밖에 없어서, 14차례나 입안을 지졌으나 구멍이 완전히 막히지 않았다. 그 결과 비강(鼻腔)을 통해 입과 코가 연결되었다. ‘국왕이 음료수를 마시거나 목을 헹굴 때 물이 입에서 코로 올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온다’거나 ‘코에서 빨간 포도주가 흘러나왔다’고 전한다. 치아가 부실하니 소화불량이 생겼고, 이는 다시 고질적인 장염으로 발전했으며, 그 때문에 관장도 자주 해야 했다.

항문에 치루가 생겨 제거 수술도 해야 했다. 당시 의료 수준이 신통치 않으니,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끔찍한 칼질을 피할 수 없다. 의사는 메스로 두 번, 가위로 8번 생살을 잘라냈다. 다음 날 그런 상태로 어전회의를 주관했을 때 국왕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나이 들면서는 통풍과 당뇨병 증세도 심각했다. 모두 고통과 피로를 가져오는 병이다. 여기에다가 막중한 통치 부담을 안고 있으니 정신적 스트레스도 매우 컸을 터이다. “국왕께서는 나쁜 꿈에 시달리는지, 자는 도중 말하고 소리 지르고, 때로 벌떡 일어나기도 한다”는 기록을 보면 정신 건강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동의보감에 실린 인체해부도.

같은 시대 조선의 궁중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임금의 신체 상태, 약물 처방이나 투약 이후의 중상 변화 등에 대한 세밀한 기록들이 넘쳐난다. 이런 자료들에 대한 연구를 보면 숙종 또한 루이 14세와 유사하게 많은 병에 시달렸고, 그것이 왕실과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이상곤, ‘왕의 한의학’).

숙종은 평생 간 질환으로 고생했다. 15세(숙종 2년)에 처음 간염 증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감기 증상으로 오인하여 형방패독산(荊防敗毒散)을 썼는데, 며칠 후 얼굴과 눈에 갑자기 누런색이 나타나자 의관들이 황달 증세로 진단하여 처방을 바꾸었다. 황달을 치료하는 시령탕(柴苓湯)을 쓰자 며칠 안에 누런빛이 모두 사라지고 수라와 침수(寢睡)가 원래 상태로 돌아와 완치되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문제가 끝난 게 아니다. 숙종은 이후에도 간 질환 증상들을 평생 달고 살았다. 작은 일에도 흥분 잘하고 ‘애간장’을 태우며 걸핏하면 노여움이 폭발했다. 한의학에서는 이런 증상 또한 간 질환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본다고 한다. “임금의 노여움이 폭발하여 번뇌가 심해져 입에는 꾸짖는 말이 끊이지 않고, 밤이면 잠들지 못했다”는 기록이나, “마음이 답답하여 숨쉬기가 곤란하고 밤새도록 번뇌가 심하여 수습할 수가 없다”는 국왕 자신의 고백이 그런 점을 말해 준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국왕은 분노조절장애 상태라 할 만하다. 신하들은 벌벌 떨며 숨을 죽일 정도로 공포에 떨었고, 임금도 스스로 인정하기를 “성질이 너그럽고 느슨하지 못하여 일이 있으면 내던져 두지를 못하고 출납하는 문서를 꼭 두세 번씩 훑어보고… 그러자니 오후에야 비로소 밥을 먹게 되고 밤중에도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숙종 29년).

숙종, 소변·대변 장애로도 고생

숙종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또 다른 병으로는 두창을 들 수 있다. 숙종 9년, 임금이 이 병에 걸리자 내의원에서 치료를 맡았는데, 별 효험이 없자 두창 전문의인 유상(柳瑺, ‘증보산림경제’를 쓴 유중림의 아버지)을 궁궐에 불렀다. 처음 탕약을 써서 병세가 완화되는 듯했으나 얼굴에 생긴 곪은 종기 때문에 증상이 다시 심해지자 처방을 바꾸어 사성회천탕(四聖回天湯)이라는 약을 썼다. 곧 열이 내리고 얼굴에서 딱지가 떨어졌다. 유상은 공로를 인정받아 동지중추부사로 두 계급 승진의 영예를 안았다. 숙종의 첫 부인인 인경왕후 김씨도 두창으로 세상을 떠났고, 왕세자와 연령군(延齡君, 숙종의 여섯째 아들)도 이 병으로 고생했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明聖王后) 또한 아들의 두창을 치료하려다가 병을 얻어 죽는 비운을 맞았다. 두창은 조선 후기에 많은 사람을 끔찍이 괴롭혔다. 오늘날 우리는 일본 용어인 천연두(天然痘)라는 말을 흔히 쓰지만, 과거에는 마마, 손님, 포창(疱瘡), 두창(痘瘡)이라 부른 외에 백세창(百世瘡)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치르는 병이라는 의미다.

숙종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기해기사계첩’ - 조선 숙종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행사 장면을 상세히 그려낸 화첩 ‘기해기사계첩’.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숙종은 눈병으로도 고생했다. 한의학에서는 이 또한 간 질환과 관련이 있다고 풀이한다. 간의 질환에서 비롯한 화증이 ‘불의 통로’인 눈의 신경을 위축시킨다는 것이다. 숙종 43년에는 글을 보기 어려워 장지(壯紙)에 큰 글씨로 간략하게 쓰도록 시켜서 읽었다. 심지어 숙종 44년에는 혼례식을 올린 후 인사 온 왕세자 부부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크게 탄식했다.

나이 50대 중반에 이르자 온갖 병세가 더욱 악화했다. 특히 오줌이 방울방울 떨어지며 대변이 잘 나오지 않는 병세가 나타났다. 자손들과 어의들이 병 치료를 위해 수많은 약재를 구하여 바쳤다. 그렇지만 숙종 45년 10월에 아들 연령군이 사망한 후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고, 급기야 이듬해에 복수가 차오르는 간경화 말기 증세가 나타났다. “성상의 환부는 복부가 갈수록 더욱 팽창하여 배꼽이 불룩하게 튀어나오고, 하루에 드는 미음이나 죽의 등속이 몇 홉도 안 되었으며, 호흡이 고르지 못하고 정신이 때때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후 한 달 만에 숙종은 세상을 떠났다.

늙고 병에 걸려 고생하다 죽는 데에는 왕이나 일반 서민이나 큰 차이가 없다. 어쩌면 구중궁궐에 갇혀 지내느라 운동 부족 상태가 되는 데다가 워낙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테니 국왕의 여건이 더 안 좋을 수도 있다. 국왕 한 사람에게 국사(國事)의 많은 일들이 집중될 수밖에 없으니, 무엇보다 국왕이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중차대한 일일 수밖에 없다.

[루이 14세 가문의 비극]

세자·손자·증손자 잇따라 병으로 요절… 증손자 1명 살아남아

루이 14세가 말년에 이르렀을 때 후손들의 계속된 죽음 때문에 베르사유 궁 전체가 암울한 분위기에 휩싸이곤 했다. 1711년, 루이 14세의 세자가 두창에 걸린 지 4일 만에 죽었다. 다음 해인 1712년에는 증손자인 부르고뉴 공과 부인이 일주일 간격으로 죽었다. 독살설도 제기되었으나, 증세로 보건대 당시 프랑스에 널리 퍼졌던 홍역에 감염된 것으로 보인다. 2년 뒤인 1714년, 왕의 손자인 베리 공작이 사냥 도중 사고를 당한 후 열흘 만에 사망했다. 당시 의사들은 환자의 피를 뽑아 체액의 균형을 맞추는 사혈법에 주로 의존했는데, 병에 걸려 허약해진 어린아이들에게 소독 상태가 의심스러운 바늘로 찌르는 것이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있다. 루이 14세 자신이 1715년에 죽었을 때 살아남은 자손은 증손자인 앙주 공작뿐이었다. 그가 다섯 살의 나이에 루이 15세로 즉위했다.

조선의 궁중에서도 두창이 큰 피해를 낳았다. 숙종 자신이 두창에 걸렸을 뿐 아니라 여러 사람이 이 병으로 사망했다. 숙종 6년에 첫 부인 인경왕후가 두창에 걸리자 숙종과 왕대비 명성왕후가 창경궁으로 옮기고 인경왕후는 경덕궁에 남았으나 이레 만에 사망했다. 명성왕후의 죽음 또한 이 사태와 관련이 있다. 숙종이 병에 걸리자 무당을 불러 점을 쳤는데 명성왕후에게 든 삼재(三災) 때문이라는 점괘를 받았다. 삿갓을 쓰고 소복 차림으로 물벼락을 맞으라는 무당의 말을 믿고 엄동설한에 실제 그렇게 했다가 병을 얻어 12월 5일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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