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형의 닥터 사이언스] DNA와 치아가 알려준 고대 전쟁의 비밀

박건형 논설위원 2022. 10. 11. 03: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 의해 수정되어 본문과 댓글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2500년전 고대 그리스와 카르타고 전쟁서 활약한 용병의 존재
‘위대한 그리스’ 그린 역사가들이 지웠지만, 과학적 분석으로 밝혀
돈과 계약으로 산 평화는 영원할 수 없다는 중요한 교훈 일깨워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심금을 울리는 돌 조각이었다.”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1880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위스 호수 도시 루체른에서 본 ‘빈사(瀕死)의 사자상’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이 조각은 1792년 프랑스 혁명에서 루이16세를 마지막까지 지키다 전사한 스위스 용병(傭兵) 786명을 기리기 위해 1824년 만들었다. 심장을 찔린 채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백합 문양이 새겨진 방패를 지키고 있는 거대한 사자의 압도적인 모습에는 스위스의 슬픈 과거가 비춰진다. 당시 전사한 스위스 용병의 유서에는 “신의를 버리고 도망친다면 후손이 용병으로 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가난한 스위스인들이 돈을 가장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 바로 용병이었다.

그림=이철원

2500년 전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이런 용병들이 전쟁 판도를 바꾸며 활약했다는 증거를 과학자들이 찾아냈다. 역사의 진실을 말해준 것은 유전자(DNA)와 치아 에나멜이었다. 미국·독일·오스트리아 국제 공동 연구진은 지난주 미국립과학원회보(PNAS) 논문에서 “기원전 두 차례에 걸쳐 고대 그리스 히메라에서 벌어진 그리스와 카르타고의 전투에서 용병이 광범위하게 활약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해상 통상으로 번영한 카르타고는 바다로 진출하려는 그리스인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 현재의 시칠리아에 있던 히메라는 카르타고의 영역 바로 옆에 있는 이 지역 유일의 그리스 도시였다. 기원전 480년 카르타고가 히메라를 침략했다. 이 전투에서 병력 5만의 그리스는 카르타고군 30만에 대승을 거뒀고 카르타고 지휘관 하밀카르도 숨졌다.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디오도루스 시쿨루스는 ‘위대한 그리스인의 승리’로 기록했다. 하지만 연구진이 최근 히메라 서쪽 집단 무덤에서 발굴된 이 시기 시신들을 DNA 분석한 결과는 전혀 달랐다. 군인의 흔적으로 볼 수 있는 몸에 박힌 창과 같은 폭력적 외상의 성인 남성 시신만을 조사하자 그중 3분의 2는 당시 현지인과 관련이 없는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인이 아닌 오늘날 우크라이나, 라트비아, 불가리아인의 조상이었다. 이번 연구진은 작년에도 당시 전사한 히메라인 시신의 치아 분석을 통해 용병의 존재를 주장한 바 있다. 치아의 에나멜층은 사람이 10대 중반까지 살아온 기후 환경과 식생활에 따라 각기 조성이 다르다. 거꾸로 특정인의 치아 에나멜에서 스트론튬과 산소 동위원소를 분석하면 그 사람이 자란 환경과 식습관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스에서 나고 자란 사람과 먼 곳에서 나고 자란 용병의 치아 에나멜층은 완전히 다르다. 당시 연구에서는 이번 연구와 마찬가지로 히메라군 시신 가운데 3분의 1 정도만 그리스인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 용병의 존재와 활약은 왜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았을까. 방패와 창으로 무장하고 밀집 대열을 이뤄 전진하는 중무장 보병 이른바 ‘호플리테스(hoplites)’는 페르시아와의 마라톤 전투,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까지 이어진 고대 그리스식 역사 서술의 핵심이다. 특히 호플리테스를 구성한 그리스 시민들은 직접 무장을 준비해 스스로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고귀한 존재로 그려졌다. 돈을 받고 대신 싸워주는 용병의 존재는 이런 영웅담의 순수성을 망치는 요소로 인식되면서 지워졌다는 것이다. 기원전 409년 카르타고가 히메라를 재침공했다. 하밀카르의 손자 한니발 마고는 그리스인을 학살하고 인근 도시를 모두 파괴했다. 히메라를 지키던 용맹한 용병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연구진은 또 다른 집단 무덤에서 2차 전쟁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전사의 시신만을 골라냈다. DNA와 치아 분석 결과 2차 전쟁에서 그리스인이 아닌 용병은 4분의 1로 줄었다. 실제로 역사학자들은 카르타고군이 과거의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 2차 히메라 전쟁에서 대규모 용병을 동원했다고 본다. 누가 더 용병을 많이 썼느냐에 따라 전쟁 판도가 갈렸다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에서 왕을 지키던 스위스 용병단은 혁명이 끝난 뒤 곧바로 프랑스 공화정과 계약을 맺는다. 이후 황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도 참전한다. 유럽 각국이 충실한 스위스 용병을 앞다퉈 고용하자 스위스 용병끼리 싸우는 동족상잔까지도 일어났다. 2500년 전의 그리스 땅에서 발굴된 시신들이, 스위스 용병들의 역사가 일깨워준다. 돈으로 맺어진 계약, 또 그렇게 만들어진 평화 어느 쪽도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