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세이] 방치된 질병들

국제신문 2022. 10. 11. 03: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소외열대질환(Neglected Tropical Diseases)이라고 불리는 질병들이 있다. 주로 열대 기후의 저개발국가에서 발생하는 감염병으로 특정 지역에 국한해 나타난다. 발생 규모는 크지 않지만 편견과 낙인, 사회적 오명, 질병으로 인한 빈곤의 악순환으로 사람들의 관심 밖에 밀려나 있는 질병이다. 세계보건기구에서는 20개의 질병을 소외열대질환으로 지정하고 있다. 의사들도 거의 들어보지 못한 희귀한 질병들이 그 목록에 있다.

소외열대질환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저개발국가 내에서도 더 빈곤한 지역, 그중 더 취약한 여성과 어린이에게 불균형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으므로, 말 그대로 ‘방치된(Neglected)’ 질병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소외열대질환으로 인해 건강에 위협을 받거나, 사회적 또는 경제적 간접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10억 명 이상에 이른다.

세계보건기구에서 지정한 20개의 소외열대질환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각각의 질병의 특성이 매우 독특하고 다양하다. 따라서 퇴치를 위한 전략도 각기 달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이 20개의 질병은 작은 관심과 노력으로도 퇴치할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소외열대질환이라는 명칭도 그러한 공통점에서 나온 것이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었을 때 세계보건기구는 백신을 개발하는데 최소한 18개월 이상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시 많은 과학자들은 이것이 매우 낙관적인 예측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12개월 만에 백신이 개발되었고 대규모 접종이 시작되었다. 인류는 공통의 위협에 맞서 한 단계 더 과학기술의 진전을 이룬 것이다.

지금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접종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코로나19 백신을 접종받았고 개량 백신의 접종도 시작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코로나19 백신을 한 번이라도 접종한 사람이 20%도 안 되는 나라가 아프리카 대륙에만 수십 개가 있다.

거의 모든 질병이 취약한 집단에 더 큰 영향을 미치지만, 감염병은 더 극적으로 이러한 특성을 보여준다. 진단검사, 치료제, 백신 개발로 전 세계적으로 감염병의 총 발생은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마지막까지 고통받는 곳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 값을 지불할 수 없어 우선순위에서 밀린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긴 꼬리로 남겨져 있다. 과학기술 발전의 혜택을 모두가 똑같이 동시에 누릴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긴 꼬리를 얼마나 빨리 끊어낼 수 있는가는 우리의 관심과 노력으로 결정될 수 있다.

소외열대질환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으로 최근 10년간 소외열대질환은 크게 감소하는 성과를 보였다. 새로운 진단법이나 치료제를 개발한 것이 아니라 이미 개발된 것들을 적절하게 활용한 것만으로 이룬 성과이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것이 필요한 곳에 쓰이기보다는 그 값을 지불할 수 있는 곳에만 쓰이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중 일부라도 소외된 곳에 쓰여야 하고, 그 사람들을 방치해 두지 말아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점점 소외되거나 방치될 수 있는 감염병이 있는데, 바로 결핵이다. 우리나라에서 코로나19 이전부터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내고 있는 감염병은 결핵이었다. 최근 10년간 결핵 발생은 절반이 넘게 감소했다. 이러한 감소는 분명 자랑할 만한 성과이다. 하지만 그 이면을 보면, 취약한 집단의 감소 폭이 훨씬 적다. 결국 긴 꼬리는 가장 취약한 곳에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남는다. 전체적인 결핵의 감소라는 성과에만 취해있다 보면 그 격차는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취약한 집단에 관심을 두고 더 많은 자원을 배분해야만 그 차이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긴 꼬리를 남겨두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긴 꼬리를 남겨두지 말아야 하는 것은 언젠가 그 질병이 나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어야 한다. 작은 관심만으로도 과학기술의 혜택을 모두가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어야 할 것이다.

손현진 동아대 의과대학 예방의학 교수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