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백의 사연史淵] 우리에게 동아시아는?

기자 2022. 10. 1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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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지금은 일본의
전쟁과 식민지 책임 묻는
방향성 잃지 않으면서
협력 가능한 수준에 맞는
다자간 의제를 실행하며
공동경험 축적해 갈 때다
그래야 동아시아 주체의
경험 자산인 두 기구가
협력 공간으로 바뀐다
그러면 남북을 짓누르는
북·중·러와 한·미·일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선순환으로도 이어진다
평화·안정 향한 선순환은
남북 적대관계 청산하는
촉진제로 작용할 것이다

사람은 조금이라도 아는 곳을 상상한다. 그곳의 자연적 실재를 몰라도, 당장 자신이 갈 수 없어도 관계없다. 상상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그곳에 관해 특정한 이미지가 형성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이미지는 더욱 정교해지고 다양해지며 사람들의 내면 속에 공간의 특징으로 자리를 잡아 실재와 관계없이 그곳에 대해 말을 한다. 유럽인이 말하는 오리엔탈(동양)이 그랬다.

신주백 역사학자·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 동아에서 동북아·동아시아로

근대 들어 유럽의 국가들이 자신의 동쪽에 있는 동양에 직접 발을 들여놓았다. 유럽인은 자신의 직접 경험을 바탕으로 동양에 문화적 특징을 입히기 시작했다. 그들이 보기에 동양 사회는 농업 생산에 필요한 대규모 관개시설을 만들고 관리하기 위해 거대한 관료제와 전제군주제가 필요했다. 독점적 전제정치는 동양의 사회경제적 발전을 가로막고 정체시켰다. 마르크스는 이를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고 포장했다. 그래서 유럽인은 정체되고 미개한 동양을 문명한 자신이 개화해야 한다고 사명의식을 드러내며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했다.

일본은 유럽이 포장한 동양의 특징에서 자신을 예외적 존재로 간주하고 자기만의 동양을 만들어 갔다. ‘동양 평화의 화근’인 대한제국을 ‘내지(內地)’에 편입해 규슈나 시코쿠 수준으로 문명화하겠다며 한국 병합을 정당화했다. 대동아를 건설하여 세계 평화의 확립에 기여하겠다고 선언하며 침략전쟁을 정당화했다. 일본에 동양은 자신을 중심으로 수직적인 질서를 구축할 대상에 불과했다. 평화는 이를 정당화하는 미사여구였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동양 대신에 동북아나 동아시아라는 번역어가 유통되었다. 세계를 경영해야 하는 미국이 필요에 따라 아시아를 세분한 결과였다. 동남아시아라는 말은 1943년 영국군이 동남아사령부를 설치하며 공식적인 공간 개념으로 처음 등장했다. 미국은 이를 차용해 동북아와 구분했다. 미국식 지역 구분은 1967년의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1985년의 남아시아지역협력연합(SAARC)의 결성처럼 각 지역 당사자들이 수용하면서 오늘날까지 유통되고 있다.

그런데 한·중·일 3국은 달랐다.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 익숙한 중국인에게는 자국과 세계만 있었다. 동양도 동북아도 없었다. 일본은 이 지역을 북동아(北東亞)라 말해 왔다. 지금도 일본 외무성에는 한국과 ‘북조선’을 담당하는 북동아 제1, 2과가 있다. 이에 비해 한국 사회는 동양이란 말을 즐겨 사용했다. ‘East Asia’를 동양으로 번역해 사용할 정도였다. 대학의 사학과는 세 가지 전공 분야의 하나로 ‘동양사’를 두고 있다. 일본적 오리엔탈리즘에서 생겨난 중국 중심의 동양 관념이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지리적 범주만으로 보면 한국에서 말하는 동양은 한·중·일 3국을 가리키는 동북아나 동아시아와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1969년 닉슨 독트린 이후 이곳에 데탕트 분위기가 확산될 때부터 동양이란 말 대신 동북아라는 지역 개념이 빈번하게 등장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동시에 그 이전까지 거의 사용하지 않던 동아시아라는 번역어도 동북아 못지않게 갑자기 자주 등장했다. 이즈음부터 인문학은 동양을, 사회과학은 동아시아 또는 동북아라는 말을 선호했다. 그러다보니 동양이란 말은 이 지역의 근현대 역사와 문화를 설명하는 데 동원되지 않았다. 성찰은 차치하고 당대를 설명할 힘조차 없었다. 대신에 동아시아와 동북아가 이 지역의 당대를 설명하는 말로 동원되었다. 하지만 냉전질서가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어 ‘지역’을 상상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할 여지가 없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수직적 양자관계만이 질서를 대변했다.

■ 주체의 새 자산, 대안적 동아시아의 확장

한국 사회는 1987년 6·10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정치적 민주화를 사회적 민주화로 확장해 갔다. 밖으로 일본의 역사책임을 묻는 시민운동도 본격화했다. 국제정세도 급변하여 1990년 동·서독이 통일되고 1991년 사회주의 소련이 몰락하면서 세계적인 차원에서 냉전질서가 무너졌다. 냉전의 최전선 대한민국에서조차 이념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롭게 상상하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갔다.

시대의 변화를 포착하고 지역을 상상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1993년 창작과비평 그룹은 한반도 분단체제를 풀어가는 열쇠로 동아시아에 주목했다. 그들은 동아시아가 제국주의와 냉전이 밀접히 연계된 데다 역사적 상황이 풍부한 경험의 세계를 내포하고 있어 새로운 시대를 여는 단서, 곧 서구적 근대를 넘어서는 제3의 대안을 모색하기에 적절한 곳이라고 보았다. 그러면서 한반도처럼 식민, 냉전, 열전의 경험이 얽혀 있는 베트남까지를 동아시아의 범주에 포함했다. 동아시아가 대안적 공간 담론으로 새롭게 등장하며 동북아와 구별되기 시작한 것이다.

1997, 1998년 동남아에 이어 한국까지 휩쓴 외환위기는 동남아와 동북아의 국가들이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어려움을 극복한 첫 공동 경험이었다. 1998년 아세안이 한·중·일 3국을 초청하며 시작된 ASEAN+3 정상회의는 매년 열리며 2005년 동아시아정상회의(EAS)라는 상설 조직의 설치로도 이어졌다. EAS는 ‘동아시아 공동체’ 수립을 목표의 하나로 제시했다.

두 회의는 2021년 10월27일 오후와 저녁에 연이어 비대면으로 열렸듯이, ‘동아시아’의 유일한 지역협력기구다. 두 기구는 포괄적 지역협력체 정도라도 문화권론 내지는 공동의 경험을 성립의 전제로 내세우지 않아도 구성이 가능하며 지역주의를 실천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아세안의 중심성이 관철되는 한 포괄적 지역협력체가 유지될 수 있음도 보여주고 있다.

두 기구는 동남아와 동북아의 국가들이 스스로 노력해서 ‘동아시아’라는 지역 개념으로 만든 첫 작품이다. 사유(思惟)의 단위에 머무르지 않고 지역을 만드는 정책과 제도화를 실천한 결과이다. 또 강대국이 주도하지 않고 역내(域內)의 국가들이 수평적 주체로서 스스로 능력을 발휘하며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온 지역협력체다. 그래서 두 회의체는 국민국가의 한계를 넘고 외환위기를 극복하며 중화(中華)와 동아를 동시에 탈피할 수 있는 대안적 지역협력체로서의 가능성을 낮은 수준에서나마 보여주고 있다.

■ 동아시아, 분단 극복을 향한 공간

그런데 지역협력의 수준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발단은 13개국 내부에서의 주도권 경쟁이었다. 말레이시아와 중국이 영향력을 확대해 갔고, 이에 대응한 회원국은 2005년 호주, 뉴질랜드, 인도를 끌어들여 견제했다. 동아시아정상회의가 ASEAN+3+3이 됨에 따라 동아시아가 모호해져 버렸다. 이렇게 되자 2011년 미국과 러시아도 회원국으로 가입할 수 있게 되었다. 두 회의체가 협력의 장에서 세력 각축의 장으로 바뀌어 감에 따라 지역의 현안을 풀어가는 기구로서의 실질적인 역할에 한계를 드러냈다. 결국 협력의 수준을 높여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든다는 구상도 점차 퇴조하고 있다.

세력이 각축하는 배경에는 미국·일본과 중국·러시아의 전략 경쟁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것은 인도·태평양 전략 대 일대일로 및 유라시아경제동맹의 경쟁이고, 국가 단위로 좁히면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다.

미·중 전략 경쟁이 동아시아에서 직접 구체화한 계기는 2010년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영토 갈등이었다. 미국이 미·일 안보조약 제5조를 들어 동아시아 역사문제에 공식 개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영토 갈등을 비롯해 역사문제가 역내 세력 경쟁의 촉진제로 작용하다 G2 중심의 질서 재편에 짓눌려 내재적 긴장을 지속시키고 있다.

이 지역 정세를 규정하는 상수(常數)가 된 역사갈등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강화회의 때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데 원인이 있다. 미국이 자기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반공 세력을 결집하고자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해 관대하고 식민지 책임을 묻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은 일본의 전쟁 책임과 식민지 책임을 묻는 본질적 방향성을 잃지 않으면서 협력 가능한 수준에 맞는 다자 간 의제를 실행하며 공동의 경험을 축적해 갈 때다. 그래야 ‘동아시아’ 주체들의 경험 자산인 두 기구가 실재적 협력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 한반도의 분단을 짓누르고 있는 동북아 분단 구도인 북·중·러와 한·미·일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가는 선순환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평화와 안정을 향한 선순환은 남북간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촉진제로 작용할 것이다. 요즈음 국제정세 때문인지 힘에 근거한 평화를 말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지만, 한국 사회가 과거사를 극복하고 지역을 상상하며 아세안과 함께 다자 질서를 만들어가야 할 궁극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주백 역사학자·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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