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의 메타버스 사피엔스] [14] 피난처를 준비하는 자들

김대식 카이스트 교수 2022. 10. 1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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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걸까? 미국과 캐나다를 중심으로 ‘프레퍼(prepper)’들이 등장하고 있다. 굳이 번역하자면 ‘준비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들은 무엇을 준비하자는 걸까? 바로 세상과 문명이 멸망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멸망에 대한 두려움은 언제나 있었다.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은 메소포타미아를 휩쓸어버릴 대홍수를 걱정했고, 유대교와 기독교는 구세주의 귀환과 함께 있을 최후의 심판을 예측한다. 기원후 410년 로마가 함락당하자, 로마인들은 세상이 멸망할 거라고 두려워했고, 기원후 1000년 세상이 종말을 맞을 거라고 믿었던 중세 유럽인들은 재산과 식량을 탕진하기도 했다.

탈세계화와 신냉전, 핵전쟁의 가능성과 기후변화, 그리고 점점 심해지는 사회적 갈등과 새로운 내전의 가능성. 미국 중산층 사이에서도 정부, 사회, 그리고 현대 문명 자체의 붕괴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다. 중산층만이 아니다. 실리콘밸리 억만장자들 역시 준비하기 시작했다. 뉴질랜드 시민권과 부동산을 확보하기도 하고, 남태평양 한가운데 섬을 구매해 피난처를 만들기도 한다.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냉전 시설 핵 격납고를 수영장과 인공위성 인터넷을 보유한 럭셔리 지하 벙커로 리모델링해 분양하는 회사들이 등장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의료 시설과 식량을 가진 피난처를 누군가가 지켜주어야 할 텐데, 사회가 붕괴한다면 총을 가진 그들이 가장 먼저 벙커 주인을 쫓아내거나 사살하지 않을까? 벙커 분양과 용병 채용을 동시에 하는 럭셔리 프레퍼 전문 기업은 이렇게 말한다. 용병들을 미리 채용해 많은 월급을 주고 그들을 “가족같이” 따뜻하게 대해준다면 세상이 멸망해도 주인과 가족을 여전히 지켜줄 거라고. 정말 그럴까? 세상이 멸망하는데 억대 연봉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이런 생각 역시 하게 된다. 제대로 세금을 내고 직원과 사회약자들을 “가족같이” 대해준다면, 실리콘밸리 억만장자들이 그렇게도 두려워하는 사회 분열과 붕괴 그 자체가 처음부터 없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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