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 사는 사람들의 그림
우리 문화권(한국·중국·일본)의 그림, 즉 동양화는 감상자에게 환영(Illusion)을 전달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그림이란 지금 부재(不在)하는 시공간의 재현이 그 본질임에도 동양화는 정교한 투시 원근법으로 착시적 공간을 설계하거나 명암으로 색채와 입체감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구태여 동서양의 그림을 구분하자면 무채색 평면과 천연색 입체로 단정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혹자는 동양화의 평면성이 모더니즘 회화가 추구한 평면성과 상통하는 것임으로 동양 회화의 탁월성을 주장하지만, 이는 역사적 맥락 없이 편린으로 드러난 현상을 근거 삼는 것이어서 무가치하다.
동양화가 평면성을 추구하게 된 데는 ‘상형문자’의 전통이 크게 작용했다. 대부분의 한자가 ‘상형(象形:사물의 형상을 본뜸)’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고대부터 그림과 글씨의 뿌리가 같다는 ‘서화동원설(書畫同源設)’이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사용 도구도 글씨 쓰기와 그림 그리기는 구분되지 않고, 춘추전국시대에 개발된 붓과 먹은 250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큰 변화 없이 사용되고 있다. 때문에 문자를 독점했던 동양의 귀족들은 글자 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함께 즐겼고, 붓글씨에 능숙했던 문인들은 글씨 쓰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제시(題詩:그림의 주제와 관련된 시)와 제발(題跋:그림의 감상평)은 화면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가 되었다.
당나라 말기에 들어 문인들은 고요하고 담백한 시적 정감을 표현하기 위해 수묵 산수를 그리기 시작했고, 송나라 문인들은 산수화뿐 아니라 대나무와 난초, 매화와 고목 등의 그림에 심상을 투영하는 것을 즐겼다. 문인들이 산수와 나무, 풀을 선택한 이유는 붓글씨를 통해 익숙해진 붓과 먹을 활용하는 데 비교적 쉬운 소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린 나무와 풀에는 모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데, 대나무는 세속적인 욕망을 초탈하는 것과 올곧은 선비의 절개를,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에 피어 맑은 향기를 뿜는 난초는 겸허함과 선비정신을, 소나무를 비롯한 상록수는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직함을 투영했다.
송나라 초기에는 상당히 많은 문인화가들이 활동하는데, 이들은 형상을 객관적으로 재현하기보다 대상에 투영된 생각을 더욱 가치 있게 여겼다. 이것을 ‘사의’(寫意:생각을 그려낸다)라고 하고, 훌륭한 그림은 ‘뜻을 얻었다’는 의미로 ‘득의작(得意作)’이라 불렀다. 이같은 접근 방식 때문에 문인화가들은 주제와 관련된 특정 부분의 묘사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넓은 부분을 공백으로 남기는데 이것이 ‘여백’이다. 동양화에 있어 여백은 그 자체가 회화적 구성 요소로서 감상자의 상상을 이끌어내며 그림의 주제에 집중하게 하는 조형적 기능을 담당한다. 무엇보다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여백은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는 주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문인화가들은 여백 이외에도 붓질과 먹물의 느낌, 즉 ‘필촉(筆觸)’으로 개성을 드러냈다. 송나라 후기로 접어들면서 화가와 감상자의 관심은 그림의 형상보다는 붓질과 먹물의 느낌을 더욱 주목하게 된다. 그래서 약간 마른 상태의 먹물을 묻혀 가볍게 붓질하여 숯이나 연필로 그린 듯한 효과를 내는 ‘건필(乾筆)’과 붓에 먹물을 듬뿍 묻혀 번짐효과를 내는 ‘습필(濕筆)’에 따라 창작자의 화파(school)가 결정되곤 했는데, 회화를 주도했던 문인들은 먹의 번짐으로 감정 표현을 극대화하기보다는 마른 상태의 붓질로 기교는 없으나 고졸한 분위기를 추구했다.
하여, 동양 그림의 발전은 곧 문인화로 귀결되었으며 송나라 말기까지 이어진 문인화의 고졸한 아취는 이후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었다.
1218년, 호라즘 왕국(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은 몽고군의 공격을 받고 함락된다. 칭기즈칸은 성내의 모든 주민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모두가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너희들이 무슨 죄를 저질렀냐고 따져 묻는다면 나는 이와같이 말해준다. 너희들이 죄가 없는데 어찌하여 하느님이 나를 보내 너희들을 죽이게 하겠느냐?”
칭기즈칸의 당위성은 이와 같았고, 터무니없는 궤변으로 정신 무장한 몽고군은 노인과 부녀자 어린아이 가릴 것 없이 단 한사람도 남기지 않고 학살했다. 칭기즈칸 이전의 몽고족은 크고 작은 부락이 어지러운 실타래처럼 엉켜있어 서로 여자를 약탈하거나 목초지를 빼앗기 위한 살육이 끊이지 않았다. 때문에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부족원들이 강인하고 경계심 많은 전사로 훈련되어야 했다. 칭기즈칸은 공정하고 엄격하였으며 마음이 넓고 기백이 넘쳐 불투명한 상황에서도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 그를 중심으로 대동단결한 몽고족은 인류역사상 유래가 없는 지상최강의 군대가 된다.
호라즘 정벌은 칭기즈칸과 그의 군대에게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그들은 호라즘 왕국뿐 아니라 요나라, 서하, 금나라, 송나라 군대의 허술함을 간파했고, 무엇보다 침략전쟁 이후의 막대한 물질적 풍요는 그들을 더욱 호전적으로 거듭나게 했다. 급기야 칭기즈칸은 세계 정복을 꿈꾸게 되는데, 호라즘 학살에 앞서 연설했던 그의 터무니없는 논리는 무자비한 약탈과 살육을 정당화했다.
몽고족이 대대적으로 송나라 정벌을 개시한 것은 1253년이었고, 유라시아 전역을 정복한 몽고제국에서 황제가 직접 관할하는 원나라가 성립되고 7년이 지난 1278년에 전쟁은 끝이 났다. 문인들의 낙원이었던 송나라는 건국 320년 만에 멸망했고, 중국 역사상 최초로 한족 전체가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식민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원나라의 지배층은 송나라 유민들을 최하위 계층인 4등급으로 업신여겼고, 직업적 위계를 10등급으로 나누는 데에도 문인들은 10등급 중 9위에 해당되었다. 8위는 창녀와 기생들이었고 10위는 부랑자나 거지였다. 몽고인들에게 한족 출신의 문인은 생산적인 노동은 하지 않고 쓸데없는 짓거리만 일삼는 사회적 버러지나 다름없었다.
지배 집단으로 혹은 미술 문화의 절대적 지휘자로 오랜 세월 권세와 부를 만끽하며 유유자적했던 문인들이 하루아침에 혐오와 박해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졸지에 천민보다 못한 대접을 받게 된 문인들의 충격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고, 버림받은 문인들은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들 중 일부가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중에도 없었던 소일거리에 관심을 갖게 된다. 가항(街巷)의 잡배들이나 좋아할 유행가를 쓰거나 자유연애 같은 얄팍한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연극 대본이 그것인데, 이것을 ‘원곡(元曲)’이라 한다.
‘원곡’은 더욱 발전하여 신세 한탄이나 사랑 타령을 넘어 역대 제왕과 장상을 조롱하고 성현의 덕을 비웃는 풍자문학으로 심화된다. 온갖 부귀를 탐하면서도 청담의 가면을 쓰고 국난와중에도 일신의 안위를 걱정하며 선비의 고고함으로 위장했던 문인들의 실체를 그들 스스로 직면했던 것이었다. 이런 용기 있는 문인들은 ‘원곡’뿐 아니라 그림에서도 나타나는데 그중 대표적인 이가 ‘예찬(倪瓚,1301-1374)’이다.
‘예찬’은 장쑤(강소江蘇)성 우시(무석無錫) 태생의 한족 문인이었다. 그는 불편한 손님이 돌아가면 정원의 오동나무와 돌을 물로 씻어낼 정도로 결벽증이 심했다. 집안이 대대로 부유하여 서재에는 수많은 책과 그림이 넘쳐났다. 그는 오로지 독서와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며 세상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1335년 즈음, 곳곳에서 폭정에 반발하는 민란으로 세상이 어지러운 때에 그는 불현듯 모든 재산을 친지들에게 나누어주고 집을 나선다. 그는 홀로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태호(太湖)와 강남수향(江南水鄕:태호와 상해 사이의 운하도시)을 떠돌며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그는 산수와 대나무를 즐겨 그렸는데 스스로 이와 같이 평했다.
“나의 그림은 세상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붓(일필逸筆)을 놀려 닮음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 즐기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대나무를 그리고 다시 평을 덧붙인다.
“나의 대나무 그림은 오직 자유하려는 내 마음의 의지(일기逸氣)를 그리고자 할 따름이니, 어찌 닮음과 아니 닮음으로 재단하려 드는가. 나의 대나무를 갈대라 하여도 나는 일절 괘념하지 않는다.”
예찬은 자연의 형상을 단지 빌리기만 할 뿐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 의지’를 표현하려 했고, 지극히 단조롭고 메마른 ‘필촉’에서 느낄 수 있는 청담과 고졸은 말뿐이었던 이전 문인화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하여, ‘사의(寫意:정확한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화가의 뜻을 그리는 것)’로서의 문인화는 ‘예찬’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날것의 결정체으로 완성될 수 있었으니, 그것은 붓끝의 기교로 도달할 수 없는 오직 화가가 견뎌낸 시대의 풍상과 순수하고 진정한 삶의 자세로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였다.
이후 예찬의 필촉과 여백은 그만의 개성이 되었고 후대의 많은 화가들이 흉내 내거나 닮으려 했지만 그들은 매번 이같은 탄식으로 절망할 뿐이었다.
“지나쳤도다! 또 지나쳤도다!”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은 나를 집중하고 있었으나, 나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었다. 투시에 어긋나는 앞뒤 서까래와 건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동떨어진 만월문의 각도, 초묵(焦墨:거칠고 짙고 마른 먹칠)으로 아무렇게나 그린 맞배집과 늙고 뒤틀린 소나무와 잎이 성근 잣나무는 아이들의 시각적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했다.
“세한도가 왜 우리 문화를 대표하는 그림인지 모르겠어요…”
나는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추사체의 위대한 가치와 예술적 아름다움, 14m나 되는 제발에 적힌 스승과 제자 간의 의리와 청나라 문인들의 우정, 안동 김씨들의 모함으로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유배된 죄인의 거처 둘레에 가시가 날카로운 탱자나무 울타리를 높게 치고 가둠)를 당한 추사 선생의 억울함, 일본 학자 ‘후지츠카 치카시’가 흠모한 이야기, 일본에 있던 세한도를 국내로 다시 모셔와서 많은 지사들의 피땀으로 보존했던 이야기는 이미 역사시간이나 다큐멘타리로 대충이라도 알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붓은 커녕 연필 잡이도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서예의 아름다움은 저세상 이야기이고, 제주도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휴양지일 뿐 구태여 서귀포 추사유배지에 가본 들 탱자나무 가시덤불 장벽의 막막함은 찾을 길 없고, 중국과 일본의 문인들에게 지극한 존경을 받은 이야기로는 문화로 세계를 정복하고 있는 이 시대의 아이들을 감동케 할 수는 없었다. 하는 수없이 나는 겨우 이렇게 말했다.
“세한도는 웬만하면 따라 그릴 수는 있겠으나 어느 누구도 다시 그릴 수는 없다.”
빈센트 반 고흐나 예찬이 그랬던 것처럼 그림이 어둡고 막막했던 삶과 시대를 참고 견뎌낸 증거일 때 큰 울림으로 불현듯 다가오는 것이니, 그런 그림의 감상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인생과 시대의 우여곡절에 맞물려 뼈 속 깊이 되새김 되는 것이라. 하여, 그림은 형태를 벗어나 숭고함에 다다른다.
글·그림 노길상 이우학교 미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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