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이우에 울려퍼진 서늘한 휘파람..30초 뒤 공포가 됐다 [현장]

임인택 2022. 10. 1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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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우크라 침공][임인택 기자 우크라 현지 보도]
지하철 방공호로 대피한 시민, 딸 꼭 안으며 "해줄 것은 이것뿐"
10일(현지시각) 아침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 때문으로 추정되는 폭발로 시민 한 사람이 숨져 쓰러져 있고 주변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다. 키이우/로이터 연합뉴스

10일(현지시각) 아침 8시20분. 우크라이나 대통령궁과 정부 기관이 운집한 수도 키이우 중심가에 서늘한 휘파람 소리가 일었다. 표현할 수 없는 공포로 온몸이 후들거렸다. 음침한 휘파람이 <한겨레> 취재진이 머물던 숙소 위를 지난 지 30초도 되지 않아 굉음이 들려왔다. 5분 뒤 구급 차량들이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새롭게 한주를 시작하던 키이우의 월요일 오전은 엉망이 됐다.

9월 이후 동남부 전선에서 거듭된 우크라이나군의 승리 소식에 희미하게 미소 짓던 키이우 시민들의 낯빛은 금세 창백해졌다. 출근길을 멈춘 시민 300여명이 지하 방공호로 쓰이는 흐레시차티크역으로 몰려들었다. 이 역은 방공호로 쓰일 수 있게 깊게 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분을 내려가야 바닥에 닿을 수 있다. 40분 거리를 달려 통학시키다가 아이와 급히 대피해온 공무원 바심(35)은 “주변의 많은 죽음을 목도하고 있다”며 “러시아는 테러리스트이고 모든 아이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분노했다. 9살 외동딸 질라타가 러시아 침공 이후 힘들어할 때마다 무엇을 해주는지 묻자 딸을 꼭 안으며 “이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날 공격이 이뤄지기 전날인 9일까지만 해도 키이우 맥도널드 앞엔 긴 줄이 늘어섰었다. 유럽 여느 관광지와 비슷하게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을 만큼 일상이 회복된 상황이었지만, 다시 공포가 시민들을 옥죄게 됐다.

러시아 본토와 크림반도를 잇는 ‘크림대교’ 폭발 사건이 벌어진 지 이틀 만에 러시아가 수도 키이우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전역의 주요 도시 10여곳에 미사일 공격을 가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이 폭파 사건이 우크라이나 특수기관이 벌인 ‘테러 공격’이라는 잠정 결론을 내린 뒤 하루 만에 이뤄진 대대적 공격이었다. 키이우뿐 아니라 제2도시 하르키우, 중부 드니프로, 서부의 르비우, 남부 미콜라이우 등 10개 주요 도시 등 12개 지역에 미사일이 떨어졌다.

10일 오전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이 이뤄진 뒤 놀란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키이우 중심부에 있는 지하철역인 흐레시차티크역 지하로 대피했다. 부모들이 놀란 아이들을 달래고 있다. 키이우/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이 공격으로 우크라이나 전체에서 최소 11명이 숨지고 64명이 다쳤다. 주요 기반시설이 공격받아 전력·인터넷·난방 등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등 우크라이나 전역이 큰 혼란에 빠졌다. 키이우 도심에선 희생된 이의 주검이 방치된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키릴로 티모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차장은 ‘텔레그램’에 러시아 공격이 12개 지역의 에너지 시설들을 겨냥했다며 “이는 에너지 공급 안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인정했다.

<뉴욕 타임스> 등 외신들은 이날 공습에 대해 러시아가 2월 말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민간 시설과 중요 사회기반시설을 표적 삼아 시행한 광범위한 공격이라고 평가했다. 외신들은 러시아가 동남부 전선에서 수세에 놓이고, 크림대교까지 공격을 받았지만, 우크라이나 영내를 깊숙이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음을 과시했다고 평했다. 푸틴 대통령 역시 이 공격이 자신의 지시 아래 이뤄졌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공격 직후 러시아의 “장거리 미사일이 (우크라이나의) 에너지·군사·통신 시설을 타격했다”며 “러시아 영토에 대한 추가적인 테러 공격이 이뤄질 경우 더 가혹한 대응을 하겠다”고 경고했다.

분노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굴하지 않겠다며 맞섰다. 공습 이후 키이우 시내 중심가에 나와 찍은 동영상에서 “그들(러시아)은 공포와 혼란을 원하고 우리 에너지 시스템을 파괴하기를 원한다”면서도 “그들은 가망이 없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는 이어 반격에 나섰다. 크림대교 폭파 사건을 조사 중인 러시아조사위원회는 이날 성명에서 우크라이나의 포격이 러시아 영내인 벨고로트 및 쿠르스크, 그리고 점령지인 도네츠크에 가해졌다고 밝혔다. 이 공격으로 도네츠크에서 3명이 숨지고, 전력이 차단됐다.

이날 공격이 이뤄지기 전날인 9일 알렉산드르 바스트리킨 러시아조사위원회 위원장은 푸틴 대통령과 만나 크림대교 폭파 사건의 초기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이번 사건이 “우크라이나 특수기관에 의해 준비된 테러행위”라는 잠정 결론을 제시했다. 크렘린(러시아 대통령궁)이 누리집에 공개한 발언록을 보면, 바스트리킨 위원장은 러시아 조사팀이 현장에 도착해 “폭발물 전문가, 범죄 전문가들과 현장에 대한 자세한 조사를 수행한 뒤 ‘근거가 잘 갖춰진’ 잠정 결론에 이르렀다”며 “러시아연방에 매우 중요한 대형 민간 사회간접자본을 파괴하려는 목적을 가진 우크라이나 특수기관에 의해 준비된 테러행위”라고 말했다. 보고를 받은 푸틴 대통령은 “당신이 지금 보고했듯 여기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러시아연방의 민간 사회간접자본을 파괴하기 위해 계획된 테러행위”라며 “우크라이나 특수기관은 그 입안자이고 수행자, 조정자들”이라고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이 전쟁의 구체적인 전황에 대해선 직접적인 언급을 자제해왔다. 하지만 이번엔 직접 이 사건을 ‘우크라이나의 테러 공격’이라고 규정한 뒤 하루 만에 대대적인 보복에 나섰다. 10일 안전보장회의를 열어 이번 사태에 대한 추가 보복 조처를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눈길을 끄는 인물은 8일 우크라이나 ‘특별군사작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세르게이 수로비킨 항공우주군 총사령관(대장)이다. 그는 시리아 원정군 사령관 시절 민간인과 전투원을 구별하지 않은 무차별 폭격을 지시했던 잔인한 인물이라고 영국 <가디언>이 지적했다. 러시아는 2015년 9월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2016년 반정부군이 끈질긴 저항을 벌이던 북부의 제2도시 알레포를 포위한 뒤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적잖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알레포의 비극이 되풀이될 수도 있다.

키이우/임인택 기자, 정의길 조해영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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