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전망대에서 오두산까지' 임진강 97km 평화를 노래하다

박경만 2022. 10. 10.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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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2022 통일걷기' 경기도 DMZ 일원 동행취재
연천 동이리적벽 단풍 붉게 물들고
기러기떼 한반도 찾아와 월동 준비
전망대 군인 설명 '반공'으로 회귀
참가자들 "평화 생태 중요성 느껴"
‘2022 통일걷기’(경기권) 참가자들이 지난 4일 경기도 연천 임진강변을 걷고 있다.

“임진강은 삼국시대부터 한국전쟁까지 한반도의 분쟁과 갈등이 총망라된 관방 유적지로, 역사적으로 한강보다도 더 중요한 요충지입니다. 특히 비무장지대 인근 임진강은 멸종위기종 두루미의 잠자리로 사용되는 등 생물다양성이 매우 높은 지역이기도 합니다.”

김승호 디엠제트생태연구소장이 지난 4일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경기 연천군 동이리 적벽 앞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디엠제트생태연구소는 경기도 비무장지대(DMZ) 일원을 따라 걷는 ‘2022 통일걷기’를 주관하고 있다. 임진강과 한탄강이 합류하는 도감포 북쪽에 1.5㎞에 걸쳐 형성된 40m 높이의 주상절리 수직 절벽에는 담쟁이와 돌단풍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늘에는 시베리아에서 여름을 난 기러기들이 브이(V)자형 편대를 이뤄 남하했다. 김 소장은 “엄청난 분단비용을 들여 만든 디엠제트 생태계는 세계적으로도 중요한 자원으로, 우리가 함부로 훼손해선 안 된다. 디엠제트는 통일과 평화를 향한 미래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올해 통일걷기 행사는 지난 3~6일 연천군 중면 횡산리 태풍전망대에서 임진강을 따라 하류 쪽 파주시 탄현면 오두산전망대까지 총 97㎞ 구간에서 펼쳐졌다. 재외동포, 청소년, 직장인, 주부 등 전국 각지에서 모인 15살부터 71살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남녀 46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미군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 등으로 긴장이 고조된 분단 현장을 직접 걸으며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를 기원했다.

‘2022 통일걷기’(경기권) 참가자들이 지난 6일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장산전망대에 올라 임진강 초평도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한국에 머물고 있는 국외 입양인 한유진씨가 지난 5일 경기 연천군 임진강변을 걷고 있다.

출생 직후 미국에 입양돼 버지니아주립대를 졸업한 뒤 3년째 한국에 머물고 있는 한유진(32·미국명 크리스틴 한)씨는 “분단으로 인해 가족과 강제로 떨어져 살아가는 이산가족과 외국 입양인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남북 분단 현장을 직접 보고 싶었다. 한국의 역사와 자연을 배우고 나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했다. 인도에서 온 재외동포 최현주씨는 “조국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한 사람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겠다”고 했다.

중1·고1 자녀와 함께 참여한 김대곤·손정은씨는 “전쟁을 겪은 부모 세대와 반공교육을 받은 우리 세대와 달리 아무것도 겪지 않는 아이들 세대는 북한을 남의 나라라고 생각하기 쉽다. 아이들에게 북의 존재를 보여주고 알려주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싶었다”고 했다.

파주에서 38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다 퇴직한 전종호씨는 “교단을 내려온 뒤 휴전선 155마일을 걷겠다던 꿈을 실현하고 있다. 내겐 히말라야 트레킹보다 값진 기회다. 나머지 길도 기회가 되면 걷고 싶다”고 했다. ‘임진강 시인’이기도 한 그는 연천 고랑포구에서 한 편의 시를 남겼다. “(전략) 말 없는 적벽 앞에 강물은 유구하나/ 이어지지 않는 것은 사람의 일뿐이니/ 모든 것은 한방의 전쟁으로 끝났다/ 전쟁을 불사한다는 가벼운 입이여/ 말의 참담한 실상을 여기 와서 보라. (후략)”

‘2022 통일걷기’(경기권) 참가자들이 지난 5일 경기도 연천 호로고루에 올라 기뻐하고 있다.
김승호(오른쪽) 디엠제트(DMZ)생태연구소장이 지난 4일 경기 연천군 동이리 적벽 앞에서 임진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걷기 구간에는 민간인출입통제구역(민통선) 이북 지역이 많이 포함돼 통과하는 데 어려움도 많았다. 일부 구간은 사전에 군 협의를 거쳤는데도 출입 인원과 절차 등을 둘러싸고 관할 군부대와 실랑이를 벌이는가 하면,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하천 물이 불어나 탐방 시간이나 노선이 여러차례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로 ‘씨알순례길’을 이끄는 김영덕씨는 “그동안 전국을 돌며 생명, 평화, 통일을 위한 순례와 명상을 진행해왔다. 디엠제트 순례를 마지막 사명이라 생각하고 강화에서 고성까지 디엠제트 순례길을 개척할 생각”이라고 했다.

보수정권이 들어선 탓인지 전망대에서 북한 쪽 지형을 설명하는 군인들이 북한 주민들의 헐벗고 굶주린 실상을 강조하는 등 과거회귀적 태도를 보여 참가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한 참석자는 “전망대 입구에는 남북 정상회담 사진을 걸어놓고 시민들을 상대로는 적대적 대북관으로 일관해 시대착오적이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관광객들이 지난 6일 경기도 파주시 도라전망대에서 북한 개성시를 바라보고 있다.

통일부 지원으로 열린 ‘2022 통일걷기’는 강원 고성군~파주 임진각 동서횡단 노선과 경기·강원 단기 노선 3구간으로 나눠 진행됐다. 3일 태풍전망대~군남댐 구간을 참가자들과 함께 걸은 통일부 김광길 교류협력정책관과 김인호 남북접경협력과장은 “디엠제트의 역사, 문화, 생태 등 다양한 가치에 대해 폭넓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고 낙후된 접경지역 발전에도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글·사진 박경만 기자 ma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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