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를 황금물결로..공포와 공존하는 예술"

이선아 2022. 10. 10.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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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이 사랑하는 작가'
홍순명, 사비나미술관 개인전
화려한 황금빛 파도·운무 같지만
부산 해운대 홍수 재해석한 작품
공포·아름다움 느껴져 '아이러니'
이걸 과연 아름답다고 해야 하나
대작을 전문으로 만드는 작가
캔버스 100~120여개 합친 작품
설치 전까진 전체 모습 볼 수 없어
어머니 앨범속 흑백사진도 작품
"세대간 갈등도 마치 재난 같죠"
홍순명 작가가 사비나미술관에서 선보인 재난 풍경 연작. 사비나미술관 제공


폭 50~60㎝의 캔버스들이 마치 모자이크처럼 서로 이어져 있다. 그렇게 연결된 108개의 캔버스가 가로 10m, 세로 3m의 거대한 캔버스를 만들어낸다. 그 위에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새하얀 구름과 같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청명한 가을 하늘을 그린 듯한 이 작품은 사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보도사진의 일부다. 2001년 미국에서 3000명 가까운 희생자를 낸 9·11 테러 사고다. 여객기가 110층 높이의 초고층 쌍둥이 빌딩과 충돌하면서 생긴 붉은 불꽃과 하얀 연기. 홍순명 작가(63·사진)는 이 비극적인 사건을 담은 사진 중에서도 빌딩 윗부분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중심과 주변을 전복시키는 ‘사이드스케이프(Sidescape)’ 작업을 20년째 진행 중이다. 사이드스케이프는 ‘주변(side)’과 ‘풍경(landscape)’을 합쳐서 만든 단어다. 중심에서 비켜나 있는 주변부를 조명해 주류와 비주류, 다수와 소수 등 이분법적 위계를 해체한다.

 캔버스 100여 개가 만들어낸 대작

홍 작가의 사이드스케이프 작업이 이번에는 ‘재난’이라는 주제로 돌아왔다. 서울 진관동 사비나미술관에서 열고 있는 개인전 ‘비스듬히 떨어지는 풍경-재난, 가족’에서다. 홍 작가는 세계 각국에서 재난 상황을 찍은 보도사진의 한 부분을 캔버스에 옮겼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독특하다. 작가 자신조차 미술관에 작품을 걸기 전까지는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한다. 경기 파주에 있는 작업실에서 그가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캔버스의 폭은 50~60㎝ 정도. 이렇게 작은 캔버스 100여 개에 그림을 그린 뒤 합치면 폭 10~20m의 대작이 된다. 그가 소규모 갤러리보다는 거대한 전시공간을 갖춘 미술관에서 주로 작품을 선보이는 이유다. 그의 작품은 미술관에서 캔버스가 걸릴 때 비로소 완성된다.

“가장 좋은 예술은 현실의 삶을 투영하는 동시에 형이상학적인 영혼이 담긴 것이라고 생각해요. 거대한 재난 풍경을 100여 개의 조각으로 쪼개면 전체 풍경에 담긴 이야기는 제거되고 색, 질감, 붓터치 등 순수한 회화적 감각만 남죠. 캔버스 한 조각이 50~60㎝인 것도 제가 붓의 속도, 질감, 물감의 묽기 등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그림 앞 ‘숭고미’

‘흔한 믿음, 익숙한 오해’ (2021)

거대한 그의 그림에는 죽음의 공포와 아름다움이 공존한다.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는 화려한 황금빛의 파도는 부산 해운대에서 일어난 홍수를 재해석한 그림(큰 사진)이고, 강렬한 붉은색의 거대한 회화는 2년 전 호주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을 재현했다. 홍 작가는 이를 ‘숭고의 체험’이라고 했다.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과 재난의 고통이 함께 존재하는 오묘한 그림. 그는 “관람객이 작품의 소재를 알고 난 후 ‘이걸 아름답다고 해야 하나’라고 고민하는 순간이 바로 제가 의도한 것”이라고 했다.

미술관 4층에 걸려 있는 여러 개의 얼음 조각도 재난의 사이드스케이프다. 빙산과 빙하는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문제를 논할 때 가장 많이 쓰이지만, 홍 작가는 거대한 빙산이 아니라 그 빙산이 녹거나 쪼개지면서 나오는 작은 얼음덩어리에 주목했다. “자그마한 얼음덩어리를 보다 보면 재난이 서서히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이번 전시에는 그의 가족을 소재로 한 회화 연작도 전시된다. 재난을 주제로 한 전시에서 가족을 다룬 이유를 묻자 “제게는 가족이 재난이라서요”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의 답변이 돌아왔다. ‘남자가 어떻게 밥벌이로 그림을 그리냐’는 가치관을 지닌 1932년생인 어머니와 40여 년째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는 1959년생인 아들 사이의 세대갈등을 그만의 독창적인 회화기법으로 풀어냈다. 어머니의 앨범에서 발견한 빛바랜 흑백 사진과 홍 작가가 찍은 컬러 사진을 한 캔버스에 합쳐서 그려넣는다(작은 사진). 두 개의 이미지가 합쳐지면서 만들어지는 이음새는 마치 흉터처럼 두 시공간을 하나로 묶는다. 전시는 11월 20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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