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칼럼] 문체부의 박력 있는 ‘윤석열차’ 해명 자료

김영희 2022. 10. 10.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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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칼럼]2017년 블랙리스트 재판의 증언대에 섰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사업 담당 부장은 “기쁨이자 자랑”이었던 자신의 자리가 “고통이자 슬픔의 자리”로 변했다며, “모든 공정하지 못한 지시는 막아주는 대한민국”이 되길 소망했다. 그런 슬픔을 떠올리게 하는 일은 정부 스스로 삼가야 한다.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5일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임오경 의원이 준비한 자료화면을 보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김영희 | 논설위원실장

한 고등학생이 정권을 풍자해 그린 ‘윤석열차’와 관련해 지난 4일 문화체육관광부가 두차례 낸 언론보도 설명자료는 꽤 오랜 세월 정부 부처들의 자료를 봐온 기자로서도 생경했다. 대개 ‘○○○ 보도 관련 설명드립니다’라는 제목이 붙는 것과 달리, 크고 굵은 폰트로 4줄, 3줄씩 박스를 꽉 채운 제목의 ‘박력’은 보는 이를 압도했다. 좀 길지만 그대로 옮긴다. “전국학생만화공모전에서 행사 취지에 어긋나게 정치적 주제를 다룬 작품을 선정·전시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엄중히 경고하며, 신속히 관련 조치를 하겠습니다.” “문체부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전국학생만화공모전에서 승인사항을 위반했음을 확인했고, 이에 따른 엄격한 책임을 묻겠습니다.”

‘현존하는 위협’이 있는 사안도 아닌데 밤 9시가 넘어 추가자료를 낸 건 어떤가. 국감 하루 전날 야당 의원들 질타가 있을 것이 불 보듯 뻔한 대응을 하다니 공무원들의 평소 생리와도 거리가 멀다. 가장 생소한 건 연락처였다. 문체부를 포함한 모든 부처 설명자료엔 거의 예외없이 책임자에 과장, 담당자에 사무관이나 주무관 번호가 적힌다. 이번엔 국장과 과장이 책임자와 담당자였다. 몇몇 전현직 관료들에게 물으니 이례적이라며 “중요한 사안이라 그랬나”라는 반응도 있지만, 이 일이 그 정도 사안인가 싶다. 형식을 좀체 바꾸지 않는 공직사회다 보니 자료를 두고 이런저런 뒷말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문화체육관광부 누리집 갈무리
문화체육관광부 누리집 갈무리

알려졌다시피 ‘윤석열차’라는 이름은 지난 1월18일 이준석 당시 국민의힘 대표가 지방 도시를 도는 대선 유세열차를 예고하며 “간다, 윤석열차”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린 데서 연유했다. 1년이 지나지 않아 열차 이름의 ‘원작자’는 당에서 쫓겨난 신세가 되고, 한 고등학생이 열차 안에서 찍힌 후보의 구둣발 사진을 떠올리며 그렸다는 ‘윤석열차’는 표현의 자유 억압 논란의 한 가운데에 섰다. 11일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는 문화단체의 ‘예술검열’ 규탄 회견과 시국선언이 예고됐다.

‘윤석열차’에 평가나 호불호는 엇갈릴 수 있다. 그런데 ‘검열’ 논란까지 이어진 건 전적으로 집권세력의 과잉대응 탓이라 할 수밖에 없다. 해당 영국 작가가 반박하며 국제 망신이 된 국민의힘 유상범, 조수진 의원의 ‘표절 주장’은 카툰 장르에 대한 몰이해도 그렇거니와 국민들에게 김건희 여사 논문 문제만 상기시킬 텐데 대체 무슨 생각인지 궁금했다. ‘윤석열차’에 대한 의견을 묻자 “풍자와 혐오의 경계는 늘 모호하다”라고 한 한동훈 법무부 장관 답변은 원론적으로 맞지만, 명백한 권력 풍자에 굳이 소수자에 대한 혐오 표현 문제를 상기시키는 게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과잉충성이 빚은 한바탕 ‘소동극’일 수 있다. 하지만 문화계와 소속 공무원들에게 어떤 ‘시그널’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체부 대응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료에 사무관이 빠진 것이 아랫사람을 생각해서인지 내부반발을 우려해서인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문체부가 박근혜 정권에서 블랙리스트와 국정농단의 주요 무대였기에 심상하게 보이진 않는다. 청와대 지시로 1만명 가까운 명단을 작성해 각종 지원 사업에서 배제했던 블랙리스트는 문화예술인뿐 아니라 ‘문화 지원’이라는 자신의 일에 긍지를 가졌던 공무원들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명단을 만들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 산하기관에 통보하는 일은 지시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5급 사무관, 6·7급 주무관들 몫이었다. 2016년 9월 국감 당시 장차관과 실국장들이 케이스포츠재단과 미르재단 의혹에 침묵하자 야당 의원들이 호통을 쳐, 늦은 시간 실무자들이 대신 불려 나왔던 일도 있다. 국회 상임위장에 6, 7급 공무원이 증언대에 나온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문재인 정권은 블랙리스트 사건을 단죄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표현의 자유’ 침해에 분명한 쐐기를 박지 못했다. 때때로 권력 풍자에 옹졸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국정농단 특검팀이었던 윤석열 대통령이 “그런 문제에 대통령이 언급할 건 아니다”라며 ‘윤석열차’ 대응을 부처에 떠넘기듯 하는 게 합리화될 순 없다.

케이(K) 콘텐츠의 성공은 화려하지만 일부 상업 분야를 제외한 대부분 분야는 국가의 지원과 관심 없이 지속될 수 없다. 영국 예술위의 초대 수장을 맡은 경제학자 존 케인스가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며 내세운 ‘팔길이 원칙’은 김대중 정부부터 우리 문화행정의 원칙이 됐다. 정부 지원사업에서 적잖이 나타나는 ‘도덕적 해이’는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카툰의 생명은 권력과 사회 풍자다. 주최기관이 후원 명칭을 요청할 때 ‘정치적 의도나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작품’이 결격사항이라고 스스로 써놓고 공모요강 등에 빠뜨렸으니 엄중 경고하겠다는 것은 트집잡기나 속 좁은 대응으로밖에 안 비친다. 무엇보다 문화계에 이를 의식하라는 경고처럼 읽힐 수 있기에 문체부는 좀 더 신중해야 했다.

2017년 블랙리스트 재판의 증언대에 섰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실무 부장은 “기쁨이자 자랑”이었던 자신의 자리가 “고통이자 슬픔의 자리”로 변했다며 “모든 공정하지 못한 지시는 막아주는 대한민국”이 되길 소망했다. 그런 슬픔을 떠올리게 하는 일은 정부 스스로 삼가야 한다. 문체부가 이번 논란에서 교훈을 찾길 간절히 바란다.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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