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권의 손길] 필요한 대로만 보이고 들리는 세상

기자 2022. 10. 10.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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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고 듣는 게 중요한 것은
정치를 사실의 토대서 작동시키고
다른 진영과 공통분모 만들기 때문
그러나 그 사실의 기반 훼손한 분은
어이없게도 기억에 없다고 한다

1992년 4월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닷새에 걸친 유혈 폭동이 일어났다. 당시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던 로드니 킹 재판이 불러온 결과였다.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1991년 3월3일 밤, 아프리카계 미국인 로드니 킹은 경찰의 과속 단속을 피해 달아나다 추격전 끝에 체포됐다. 문제는 다음에 일어났다. 체포에 나선 백인 경찰들이 집단으로 킹을 가혹하게 구타했던 것이다. 자택 근처에서 벌어진 이 사건을 목격한 조지 홀리데이는 이 현장을 놓치지 않고 비디오테이프에 담았다. 그리고 경찰이 사건을 은폐하자 LA 현지 방송국에 테이프를 보냈다. 결국 4명의 백인 경찰관이 재판에 넘겨졌고 정의가 실현되는 듯 보였다.

그런데 재판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경찰의 변호인단이 LA는 여론 때문에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없다며 재판 장소변경을 요구했다. 그 탓에 재판이 주로 백인들이 거주하는 LA의 외곽 지역에서 열리게 됐다. 배심원단도 문제였다. 12명 중 10명이 백인이었고, 소수인종은 히스패닉과 아시아인 각각 1명이 선정됐다.

백인 위주로 배심원단을 꾸리는 데 성공한 경찰의 변호인단은 과감하게 킹이 일방적으로 구타당하는 장면을 법정에 증거로 제출했다. 실제 킹은 이 구타로 인해 두개골이 깨지고 뇌 손상까지 입은 상태였다. 그런데 변호인단은 일방적으로 맞기만 하는 킹의 모습을 보여주며 킹이 위협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낀 경찰이 강력히 제압할 수밖에 없었다며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동료 경찰까지 증인으로 나서 구타한 경찰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백인 위주의 배심원단은 정당방위라는 경찰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했다.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이 판결을 보고, “어떻게 이 비디오가, 구타당하고 있는 몸이 경찰을 위태롭게 한다는 증거로 쓰이게 되었을까?”라고 질문한다. 버틀러는 ‘본다는 것’이 이제 더는 객관성을 확보하는 행위가 아니라고 본다. ‘카메라’가 보이는 광경을 그대로 담는 객관성의 도구라는 생각은 이제 신화일 뿐이다. 버틀러에 따르면 배심원단이 구타 현장을 보는 시선은 백인들이 ‘검은 몸’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편견에 이미 물들어 있었다. 요컨대 우리가 사건을 바라보는 법이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모두가 객관성을 담보한다고 여기는 수단이 의심받을 때 사회의 질서 역시 흔들린다는 데 있다. 로드니 킹 사건의 판결이 폭동으로 이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객관성(사실)을 확보하는 공통의 수단이 사라진 세상에 남는 것은 의견뿐이며 의견만 존재하는 세상에선 자신의 믿음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지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함께 보고 듣는다’는 행위에 위기가 찾아왔다. 대통령이 해외에서 내뱉은 비속어가 섞인 발언,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가 논란이 됐다. 다 함께 보고 들었는데, 다르게 듣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공교롭게 그 시점이 대통령실이 13시간 만에 해명을 내면서부터다.

‘바이든’은 ‘날리면’이 되고, ‘날리면’은 ‘발리면’으로까지 진화했다. 여러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 듣는 이들의 비율은 최근 대통령의 지지율과 비슷하다(예를 들어 넥스트위크리서치 조사결과 바이든 61.2%, 날리면 26.9%). 심지어 대통령과 가까울수록 ‘이 XX들’이란 말이 들리지 않거나 ‘이 사람들’로 달리 들린다고 한다. 자신이 믿는 대로, 아니 필요한 대로 들린다는 것이다.

정치에서 함께 보고 듣는 게 중요한 이유는 이 행위야말로 정치를 ‘사실’의 토대에서 작동하게 하는 근본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모든 부패한 권력은 거짓말 위에 지어진다. 사실은 그 자체로 권력을 투명하게 하여 권력이 부패하지 않도록 견제하는 힘을 갖는다. 보고 듣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거짓말은 힘을 잃고 사실이 힘을 얻는다.

더하여 사실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이들이 공통적인 것을 만드는 토대가 된다. 있는 사실에 대한 수용이 공통분모를 만들고 다른 해석과 비판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건설적 대안이 논의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사실이 믿음과 의견의 영역이 될 때 우리는 그 어떤 공통분모도 없이 소모적이고 때로는 위험한 의견의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런데 사실을 만드는 기반, 함께 보고 듣는 행위의 객관성을 훼손한 장본인은 자신이 정확히 어떻게 말했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아니, 기억이 없다고 한다.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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