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낡은 음모론에 빠진 푸틴

정철환 유럽 특파원 2022. 10. 1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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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30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점령지 4곳을 합병하는 조약에 서명한 뒤 연설하는 모습이 모스크바 붉은광장에 설치된 전광판으로 중계되고 있다./AFP 연합뉴스

지난달 30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군 점령지 4곳 간의 합병 조약 체결식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공개 연설을 했다. 러시아 국영 매체의 실황 중계를 보다 서늘한 공포감을 느꼈다. 합병 조약을 ‘민족자결’이라고 강변하는 뻔뻔함이나, ‘훼방 놓는 이에게 핵무기를 쓰겠다’는 협박 때문이 아니다. 이날 연설은 푸틴 대통령이 가진 세계에 대한 인식(세계관)이 얼마나 뒤틀리고 잘못되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한 편의 모노드라마였다.

연설 중 일부 내용을 간추려 옮겨 본다. “서방의 목표는 세계 지배다. 그들은 항상 식민주의자였다. 전 세계에서 부와 자원을 갈취하고 지배를 영구화하는 것이 목적이다.” “서방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 확대’는 타(他)민족과 국가를 (서방 체제에) 예속화하는 것이다. 여러 국가의 지배 엘리트가 이들에게 동조, 자기 나라를 속국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더 이상 외세의 억압 속에 살지 않을 것이다. ‘하나 된’ 러시아가 서방의 세계 지배 야욕을 분쇄할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주장 아닌가. 어처구니없게도 지난 세기에 유행한 신(新)마르크스주의적 세계체제론, ‘종속 이론’에 바탕한 세계관이다. 구소련 시절 푸틴이 몸담았던 KGB가 타국 공작원에게 주입한 사상이자 1980년대 한국 운동권이 반미(反美)와 ‘주체적 조국 통일’의 논리로 열렬히 주장한 것이기도 하다. ‘서방’을 ‘미국’으로, ‘러시아’와 ‘러시아 민족’을 ‘한반도’와 ‘조선 민족’으로 바꾸면 똑같은 얘기가 된다. 몇몇 운동권 선배가 당시 유행하던 구조주의와 연결해 “최신 국제 관계 이론이니 꼭 공부하라”고 강권하곤 했다.

푸틴식의 세계관이 허황한 ‘음모론’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미 역사가 증명한 일이다. 그의 주장이 맞는다면, 서방의 세계 지배 체제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었던 인도가 신흥 강대국이 된 것은 어찌 된 일일까. 또 중국과 일본의 예속과 지배를 받던 종속국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경제국이자 서방의 대표 국가로 발돋움해 과거의 두 지배국과 경쟁하게 된 현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40여 년 전 유사한 세계관에 빠져 반미를 외치던 청년들은 지금 누구보다 열렬한 미국의 ‘팬’이 됐다. 윤석열 정부의 대미 외교를 연일 ‘참사’로 규정하는 것을 보면, 미국이야말로 한국의 동맹이자 ‘잘 보여야 할 대상’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도 내다버린 구시대의 ‘음모론’을 세계 최고 권력자 중 한 사람에게서 재발견하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 두려운 일이다. 일부 나이 든 ‘86 운동권’은 여전히 선동가에 머물러 있을 뿐이지만, 푸틴은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려 전 세계를 불태워버릴 수 있는 인물이 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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