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납품단가연동제, 시장경제 법리와 조화 이뤄야

2022. 10. 10. 00: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면서 '납품단가연동제'가 다시 국회에서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납품단가연동제는 원자재 가격 상승분의 납품 단가 의무적 반영과 이를 위반한 기업에 대한 제재를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이는 그동안 하도급법과 상생협력법에서 대·중소기업 간의 자율적 합의와 중소기업의 협상력 강화에 중점을 두고 시행되던 '납품단가 조정협의제'를 넘어 국가가 납품 대금을 직접 통제한다는 점에서 현행 법체계의 기본이 되는 시장경제 법리와 조화를 이루는지 논란의 소지가 있다.

무릇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대부분 국가에서의 가격 통제는 물가 안정과 같은 거시경제적 정책목표를 위해 이뤄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국가가 개별 거래관계에 직접 개입하여 통제하는 일은 드물다. 원자재 가격 상승 시 납품 단가에 대한 국가 통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납품 대금을 인상하지 못하는 것이 대기업의 '경제력 남용' 결과이거나, 일시적이지 않은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에 차질이 생기고, 중소기업 생태계에 어려움이 발생하는 제한적인 경우이어야 한다.

대·중소기업 간 힘의 논리를 떠나 후발적인 원자재 가격 상승분을 어떤 방식과 비율로 분담해야 할지는 시장 상황과 개별 거래의 특성에 따라 자율적으로 정해질 사항이다. 자율적 결정이 어려우면 일반계약의 기본 원리인 '채무자 위험부담주의'에 따를 수밖에 없다. 계약 성립 후 그 기초로 되는 사정이 변경되어 당초 계약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신의칙과 공평에 반한다면 '사정변경의 원칙'에 따라 계약을 변경하거나 소멸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 원칙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계약 성립의 기초가 된 사정이 현저히 변경되고, 당사자가 계약 성립 당시 이를 예견할 수 없었으며, 계약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당사자의 이해에 중대한 불균형을 초래하여야 한다. 판례는 계약 이행의 결과, 등가관계가 심하게 파손되는 경우에 한정하고 있다. 이는 '계약은 이행되어야 한다(pacta sund servanda)'는 '계약 준수의 원칙'이 무너질 경우 우리 사회의 수많은 계약관계에 혼란이 생기고, 법적 안정성을 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모든 경제 현상을 갑을관계의 대립적 시각으로 이해하고, 이분법적 사고에 기초하여 경제를 선악의 개념으로 예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많은 경제정책이 가시적 성과에 집착하여 너무 쉽게 급진적인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경제입법을 위해서는 늘 시장경제의 본질과 경쟁의 원리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른 경제 주체의 민감한 이해관계나 국가산업 기반 또는 글로벌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입체적인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납품단가연동제를 법률로 강제한다면 중소기업의 경영 안정에 당연히 큰 도움이 되겠지만, 다른 경제 주체나 소비자에게 원자재 가격 상승 부담이 그대로 전가될 수밖에 없다. 장기적으로는 중소기업의 '불가역적인 권리'로 인식될 가능성이 높다. 막연히 경제적 약자에 대한 시혜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사회윤리적인 요구로서 받아들일 수 있을지언정, 경쟁중립적이고 합리적인 규제로 보기 어렵다.

요컨대 납품단가연동제가 법치주의의 근간인 '과잉금지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지, 사법체계의 기본 원리인 '채무자 위험부담주의'나 '사정변경의 원칙'과도 잘 조화되는지 되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현윤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