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얗게 칠했더니 '시원'하게 날아올라

이정호 기자 2022. 10. 9. 22:0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A320 여객기가 착륙을 위해 지상으로 접근하고 있다. 최근 여객기 제조사들은 햇빛 반사율 등을 감안해 동체에 기본적으로 흰색 칠을 한다. 항공사들도 흰색을 드러내는 도장을 하는 일이 많다. 최근 과학계에선 페인트 중량을 줄이면서도 햇빛 반사율은 100% 가깝게 끌어올린 새로운 흰색 페인트를 개발했다. 위키피디아
‘햇빛 97.9% 반사’ 흰색 페인트
미 퍼듀대 연구진 개발 ‘이목’
도포 두께는 0.15㎜로 확 줄여
기존 개발 페인트 3분의 1 수준

동영상 공유 웹사이트에 등장한 한 남성, 한낮 햇빛이 작열하는 오후 4시에 자신이 사는 단독주택 안에서 천장의 온도를 잰다. 결과는 27도, 이때 바깥 기온은 24도다. 지붕으로 쏟아진 태양의 열기가 집 안을 데운 것이다.

온도를 잰 이 남성은 이내 지붕 위로 올라가 대걸레를 닮은 큰 붓을 들어 흰색 페인트를 흠뻑 묻힌다. 그리고 지붕 위에 꼼꼼히 페인트를 칠한다. 어두운 적갈색이던 지붕은 금세 눈이 내린 듯 새하얀 페인트로 덮인다.

이틀 뒤 비슷한 시각, 이 남성이 사는 주택 주변의 기온은 26도다. 이틀 전보다 기온이 2도 오르며 더워졌다. 당연히 집 안 온도도 따라 올라가야 하지만, 측정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집 안에서 잰 천장 온도는 23도로, 이틀 전보다 4도나 뚝 떨어져 있었다. 더 더운 날에, 집 안은 에어컨을 켠 것처럼 오히려 시원해진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빛과 열을 80~90% 반사하도록 제조된 시판용 흰색 페인트의 힘이었다. 과학계에서 최근 이 반사율을 100% 가까이 끌어올린 새로운 흰색 페인트를 개발했다. 특히 얇게 칠해도 반사 성능을 잘 발휘하도록 고안된 것이 특징이다. 비행기나 우주선처럼 중량을 최대한 줄여야 하는 물체에 널리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온난화가 한계치에 이르렀을 때 인류가 햇빛 반사 용도로 사용할 최후의 카드가 될 거라는 기대도 나온다.

■ 햇빛 97.9% 되쏘는 페인트 등장

미국 퍼듀대 연구진은 최근 햇빛을 97.9% 반사하는 흰색 페인트를 개발했다고 국제 학술지 ‘셀 리포츠 피지컬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이 페인트의 핵심 성분은 ‘질화붕소’로, 윤활제에 들어가는 성분이다. 연구진은 질화붕소를 크기가 아주 작은 나노물질로 만들어 페인트의 원료로 사용했다.

사실 연구진은 이번에 개발한 페인트와 비슷한 수준인 98.1%의 햇빛 반사율을 보이는 페인트를 이미 지난해 개발했다. 당시 페인트는 화장품에 들어가는 ‘황산바륨’을 사용했는데, 온도 저하 효과는 4.5도 이상이었다.

이미 좋은 성능의 페인트를 만들었으면서도 연구진이 또다시 페인트를 개발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지난해 만든 반사율 98.1%짜리 페인트는 꽤 두툼하게 발라야 제 성능을 발휘하는 한계가 있었다. 연구진은 대학 공식 자료를 통해 “최소 0.4㎜ 두께로 페인트를 칠해야 했다”고 밝혔다.

미국 퍼듀대 연구진이 개발한 빛 반사용 흰색 페인트의 두께 비교. 비슷한 빛 반사 성능을 내기 위해서 지난해 개발한 페인트(빨간색 네모)는 0.4㎜, 최근 개발한 페인트(노란색 네모)는 이보다 크게 얇은 0.15㎜를 바르면 된다. 퍼듀대 제공

■ 새 기술 통해 두께·중량 급감

건물 지붕이나 외벽에 이 정도 두께로 페인트를 칠한다고 해서 별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움직임이 있거나 가벼워야만 하는 물체에서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난해 이 기술이 발표된 뒤 의류나 신발 제조업체 등에서 더 얇게 칠하고도 비슷한 성능을 내는 페인트를 개발할 수 없느냐는 문의가 잇따랐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그래서 내놓은 답이 이번 새 페인트라는 것이다. 햇빛 반사율(97.9%)이 기존 페인트(98.1%)와 비교했을 때 별로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도포할 두께는 0.15㎜로 확 줄였다. 기존 페인트 두께의 3분의 1 수준이다. 질화붕소를 원료로 한 새 페인트의 햇빛 반사 능력이 이전 페인트보다 좋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질화붕소 입자에는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구멍이 많다. 이 구멍이 페인트 밀도를 크게 낮추면서 결과적으로 중량이 80%나 떨어졌다. 기존에 개발한 페인트 중량은 1㎤당 0.134g이었지만, 새 페인트는 이를 0.029g으로 크게 줄였다.

비행기 동체에 바르면 냉각 효과
더운 여름 활주로 대기 중일 때
에어컨 가동하지 않아도 될 듯
‘빛·고온 노출’ 우주선에도 활용

■ 비행기에 바르면 에어컨 없이 냉방

연구진은 새 페인트가 우선적으로 우주선이나 비행기에 활용될 것으로 내다봤다. 우주선은 대기권에 재진입할 때나 태양을 향할 때 밝은 빛과 높은 온도에 노출된다. 지금까지는 빛과 열을 견디는 내구성에 기술 개발의 초점을 맞췄지만, 앞으로는 반사라는 새 개념을 고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연구진에 속한 조지 치우 퍼듀대 기계공학과 교수는 대학 공식 자료를 통해 “더운 여름에 활주로에서 대기 중인 비행기의 객실 온도를 낮추려고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페인트를 비행기 동체에 바르면 저절로 냉각이 된다는 뜻이다.

연구진은 향후 이 페인트가 ‘지구공학’에도 이용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지구온난화 완화를 위해 이산화탄소 감축 같은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기후변화를 저지할 수 없을 때 비상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다. 시우린 루안 퍼듀대 기계공학과 교수는 “이 페인트는 열 대부분을 깊은 우주로 방출해 지구를 냉각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