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멘터리] 양조위 '받아들인다는 것에 대하여'

이주형 기자 2022. 10. 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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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46

#1 안(INT.) KNN씨어터- 낮(DAY)

10월 6일 목요일 오후 4시. 전세계 역대 흥행 1위 “아바타”의 프로듀서 존 랜도의 기자회견장인 KNN씨어터는 오전만큼 붐비지 않았다. 존은 열정적으로 질문에 답했지만 기자들은 왠지 그만큼 흥이 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본다. 왕가위 영화의 편집을 떠올려보면 좋겠다) 

#2 안. KNN씨어터- 낮

오전 11시. 짙은 베이지색 바지에 카키색 카모폴라쥬 티셔츠(긴 소매인지 짧은 소매인지는 확인불가)를 받쳐 입고 검정색 가죽 재킷을 걸친 양조위가 기자회견장에 들어섰다. 옷차림도 가을, 계절도 가을, 인생에서도 가을. 영화제라는 특성도 있었겠지만 극장을 가득 채운 기자들 사이에서 가벼운 환호가 터졌다. 허문영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직접 양조위 기자회견의 사회자로 나섰다. 저요! 저요! 50분 정도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질문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았고 질문자를 선정하는 허문영 집행위원장은 진땀을 흘렸다.

  사람이 어쩌면 저런 눈빛을 타고 날 수 있을까. 빛나는 눈빛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우수가 깃든 깊은 눈빛. 유일하게 양조위로부터 직접 마지막 질문자로 선정되면서 양조위와 눈을 마주친 기자에게 당신 오늘 계탄 거라고 한마디 건넸다. 

#3 밖(EXT.) 1963년 홍콩의 좁은 골목길. 우메바야시 시게루의 ‘유메지의 테마’가 깔린다. “화양연화”의 한 장면 - 밤(NIGHT)

영화는 이미지로 매.혹.하는 미디어이고 왕가위의 영화가 바로 그렇다. 90년대와 2000년대의 감성을 깊이 건드린 그 여진은 지금도 남아있다. ‘짤’과 ‘밈’으로 왕가위 영화를 알던 2,30대가 재개봉한 왕가위 영화를 보러 간다. 왕가위의 영화에는 장국영, 장만옥, 장쯔이 같은 스타들이 즐비하지만 그의 페르소나 한 명을 꼽으라면 역시 양조위다. “중경삼림”의 경찰 663, “해피투게더”의 아휘, “화양연화”와 “2046”의 주모운. 왕가위가 없으면 양조위도 없지만 양조위가 없으면 왕가위도 없었을 것이다.
  
#4 불상. 홍콩 구룡채성 지구 안의 한 아파트. “아비정전”의 한 장면- 불상 

그런 양조위도 왕가위와의 첫 만남은 악몽이었다. 왕가위 감독의 회고다.
 
“양조위의 “아비정전” 촬영 첫날은 아파트에서 진행됐습니다. 사과를 한입 베어 물고 장만옥에게 인사하는 장면이었는데 클로즈업 컷은 쉬웠지만 롱 숏은 오케이 컷이 날 때까지 32회나 찍어야 했어요. 양조위로선 한 장면을 그렇게 많이 찍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을 겁니다. 그는 완전히 충격 받아서 촬영이 끝나자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뜨더군요. 유가령이 나중에 전해주길 당시 남자친구였던 그가 화를 많이 냈답니다. 자기를 혹독하게 다뤘고 원하는 게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고. 그 일로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던지 그가 그날 밤에 잠도 못 잤다나!(웃음) 그래서 양조위를 초대해서 그날 러시 필름을 보여주며 각각의 테이크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납득시켰죠.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화에서는 연기하는 방식을 바꿔야 돼. 영화는 TV랑 달라. 얼굴만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가 담겨. 그러니까 몸 전체가 연기를 해야 해." (‘왕가위: 영화에 매혹되는 순간', 씨네21북스. 499쪽)

이때가 양조위의 나이 28세 때다. 약관의 나이에 연기를 시작한 양조위는 40년 동안 20편이 넘는 드라마와 7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2000년에는 “화양연화”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도 받았다.  

#5 밖. 10월5일 부산-밤 

양조위가 27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아시아영화인상을 받았다. 

#6 안. 10월6일 KNN씨어터-낮

허문영 집행위원장은 기자회견에 앞서 양조위를 이렇게 소개했다. “40년의 세월 동안 어떤 동시대 배우와 비할 바 없이 다양한 스펙트럼의 영화에 출연했고, 세계 영화사에 남을 작품이 많습니다. 이런 폭과 깊이를 가진 배우는 양조위가 유일하다 싶을 만큼 굉장한 폭과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 "화양연화"의 한 장면 (제공: NK컨텐츠)

#7 밖. 1970년대 홍콩-낮

양조위는 15살에 최종 학력을 마쳤다. 이후 삼촌 가게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하지만 하버드에 연기과라는 게 있고 거기서 연기를 전공했다고 한들 양조위보다 잘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데 인생도 성적순이 아니다. 성적과 수치에 머무르면 결국 거기에 머무르게 된다 물론 그런 것에 연연해야 할 때도 있겠지만 나이가 먹어서도 그러면 인간적으로 곤란하게 느껴진다.  

#8 실내. KNN씨어터 기자회견장- 낮 

“제작이나 연출을 할 계획은 없습니다.” 배우로서 경험이 무르익었으니 감독이나 제작자를 할 생각은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양조위는 간단하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제 연기 인생에서 전반 20년이  배우는 단계였다면 후반 20년은 배운 것을 발휘하는 단계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그 단계까지 넘어서 스트레스를 많이 안 받고 연기자라는 직업을 즐기면서 할 수 있는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옛날에는 소화할 수 없었지만 이제 나이가 듦으로써 도전할 수 있는 역할이 있습니다.”

양조위는 포마드로 빗어넘긴 머리와 수트가 잘 어울리는 배우다. 반항하는 청춘의 이미지는 없지만 고전적인 스타일링에도 댄디하고 젊은 느낌이 났다. 사실 지난해 마블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서 양조위가 늙은 아버지 역할로, 그것도 빌런으로 나온 모습에 조금은 실망했었다. 아니, 조금은 서글펐다 라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는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양조위 본인은 이번 기자회견에서 아버지 역할을 하게 돼서 굉장히 반가웠다고 말했다. 40년 연기 생활 끝에 욕.심.과. 도.전.을. 구.분.해.내.는. 능력을 가지게 된 그가 텐 링즈를 가진 그보다 돋보였다.

#9 안팎. 대한민국-낮과 밤

칠십이 훌쩍 넘어서도 훌륭하게 공직을 해내시는 분들을 본다. 심지어 자신이 이미 해봤던 자리도 준다면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 거기 말고도 오라는 데가 적지 않을 텐데. 

#10 밖.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낮

“화양연화”는 앙코르와트에서 끝이 난다. 양조위는 장만옥과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앙코르와트 사원 기둥의 구멍에 조용히 털어놓고 흙으로 덮는다. 화양연화는 끝났다. 끝나지 않았다면 화양연화도 아니다.

(※ 아래로 조금 스크롤링하면 '씨네멘터리'를 구독하실 수 있고 지난 에피소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주형 기자joole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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