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 '피스메이커'의 호소.."평화 없이는 아무것도 못 이룬다"
[전홍기혜 기자(onscar@pressian.com)]
"김정은을 만남으로써 나는 지난 28년에 거쳐 김씨 3대를 모두 만난 남측 인사가 된 셈이다. 김일성은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로 1990년 예방과 1992년 오찬 회동 등으로 두번 만났다. 김정일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특사와 대표로서 여러 시간에 거쳐 세번 만났고, 2005년에는 6.15 5주년 행사를 마친 뒤 그가 초대한 오찬에서 한번 더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김정은과는 2018년 4월 판문점과 9월 평양에서 잠시나마 환담을 나누었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이야기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동서냉전 시기인 1950-70년대엔 군인으로, 1980년대엔 외교관으로 일하던 임 전 장관은 동서냉전이 끝난 1990년대 노태우 정부에서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로 일하게 되면서 '피스메이커'(통일 일꾼)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이런 이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를 '삼고초려'하게 했다.
임 전 장관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현실화한 공이 가장 큰 인사다. 그는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 특사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남북정상회담을 실현시켰다. 남북 분단 이래로 첫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김대중 전 대통령과 임동원 전 장관은 그래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여겨진다.
임 전 장관은 뜻밖에 "이북 출신의 군인, 외교관으로 40년 넘게 근무하면서 정치에는 무관심했다"며 "유명한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던 데다 평소 탐탁지 않게 여겼던 인물"이라고 회고했다. 끈질긴 요청 끝에 두 사람이 결합하게 된 것에 대해 임 전 장관은 "'하나님의 섭리'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며 "15년간 김 전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게 된 것은 내 일생의 가장 큰 영광이요,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의 헨리 키신저'라고 불리는 임동원 전 장관이 최근 펴낸 자서전 <다시, 평화>(임동원 지금, 폴리티쿠스 펴냄)에서 밝힌 이야기다. 평생을 '피스 키퍼'이자 '피스 메이커'로 헌신해온 임 전 장관은 올해 구순을 맞아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월남, 분단 등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의 굴곡이 고스란히 새겨진 자신의 인생 역정을 기록했다.
자서전에는 전작 <피스메이커>에 담지 못한 노태우 정부의 남북고위급회담과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6.15 선언 등 그가 관여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와 뒷이야기 등이 추가됐다. 일례로 임 전 장관은 직접 만나본 김정은 위원장에 대해 "나는 이 첫만남에서 그가 감성적인 자기 부친과 달리, 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평했다.
임 전 장관은 문재인 정부에서 남북관게 개선을 가속화하여 북미관계를 견인하려던 목표가 북미 관계의 파탄으로 남북관계도 다시 경색 국면에 접어든 것에 대해 크게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는 "한반도 문제에 깊이 개입한 초강대국 미국이 대북관계 개선에 나서지 않는 한 남북관계 개선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엄혹한 현실에 다시 직면하게 됐다"며 "미국의 결단이 문제 해결의 열쇠"라고 말했다.
현재 한반도에는 그의 자서전 제목처럼 '다시, 평화'가 간절히 요구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에 비해 북한과 중국에 대해 강경한 입장인 윤석열 정부에 대해 북한은 "윤석열이란 인간 자체가 싫다"(김여정 노동당 부부장)고 응수했다. 북한은 한미연합훈련이 시작되자 지난 9월 25일부터 10월 6일까지 총 6회의 중거리 및 단거리 탄도 미사일을 발사하며 군사 행동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미러, 미중간 갈등이 커진 상황은 한반도의 긴장을 더욱 극대화시키고 있다.
평생을 한반도 평화를 위해 헌신해온 임 전 장관의 말은 문제를 어디에서부터 풀어야할지 난감한 현 상황에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이제 더는 미루지 말고, 남-북, 한-미, 북-미가 이미 합의한 바 있고 중국도 동의한 '4차 평화회담'을 개최하여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을 시작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한반도의 4대 핵심과제를 포괄적.단계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평화 공존과 공동 번영의 '남북연합'을 형성하여 '사실상의 통일 상황'부터 이룩하고, 평화와 번영의 통일국가를 지향해 나가야 한다. 평화가 전부는 아니지만 평화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전홍기혜 기자(onscar@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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