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남수의 視線] 독재시대와 ‘디지털 검찰시대’

천남수 2022. 10. 9.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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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환된 36년 전 ‘국회 국방위 회식사건’
▲ 검찰과 군에서 유행한 술문화인 폭탄주.

1986년 3월 21일 서울의 한 요정에는 금배지와 별들로 가득 찼다. 제129회 임시국회 개회를 마친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과 박희도 육군참모총장 등 육군 수뇌부의 회식 자리였다. 회식이 시작할 무렵에는 군장성들은 모두 참석했지만, 몇몇 국회의원들은 지역구 행사 등으로 참석이 늦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역시 뒤늦게 참석한 야당 원내총무(지금의 원내대표) 김동영 의원은 미리 와있던 장성들을 향해 “힘 있는 거물은 안 오고 똥별들만 먼저 모였구먼”이라며 농담을 던졌다. 농담이었지만, 군장성들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폭탄주가 몇 차례 돌면서 참석자들은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박희도 참모총장은 정동호 참모차장에게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여당 원내총무인 이세기 의원을 불러오라고 지시한다. 정 차장의 수소문 끝에 이세기 원내총무가 가장 늦게 회식 장소에 도착했다. 이 원내총무가 들어서자 술에 취해있던 정동호 차장은 이세기 의원을 향해 “이세끼 총무, 이렇게 늦게 오고 그래, 그러니까 야당에서 우릴 똥별이라고 하지 않나”고 했다. 이세기 의원의 이름을 이용해서 ‘세끼’라고 농담조로 말한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이어 하지만 정 차장은 술을 못 마시겠다는 이 원내총무에게 강제로 술을 강권하는 등 소란스러운 상황이 연출됐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민정당 남재희 의원은 “손님을 초대해 놓고 이따위 짓들이냐”며 벽으로 술잔을 던졌다. 그런데 하필 깨진 술잔 파편이 이대희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의 왼쪽 눈 위를 스쳤고, 그의 얼굴에서는 피가 흘렀다. 이에 이 격분한 이 참모부장은 남재희 의원의 얼굴을 향해 발길질을 했고, 남 의원은 혼절하고 말았다. 군인이 국회의원에게 폭행을 가한 것이다. 회식장은 순식간에 국회의원과 장성들 간에 싸움터가 됐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술에 취해서 벌어진 상황인만큼 서로 사과하면서 그날 회식은 마무리된다.

 

▲ 이른바 ‘국방위 회식사건’을 소개한 1993년 4월 22일자 동아일보

군인이 국회의원을 폭행할 수 있었던 무소불위의 군부
불법구금과 고문으로 자백 강요했던 암울한 시대


그런데 이날 사건에 대해 야당은 군인이 국회의원을 폭행했다며 문제삼고 나왔다. 군인이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을 폭행하고, ‘이세끼(이세기 의원)’라고 한 것은 국회를 무시한 행태라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국방부 장관과 참모총장은 국회에 출석해 사과하고, ‘이세끼’라고 문제의 발언을 한 정동호 육군참모차장은 전역 조치 됐다. 남재희 의원에게 발길질을 한 이대희 인사참모부장은 전방 사단장으로 좌천됐다. 나중에 정동호 차장은 민정당과 민자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됐고, 이대희 부장도 전역 후 병무청장을 지냈다.

36년 전, 이른바 ‘국회 국방위 회식사건’이다. 당시 사건은 하나회라는 군의 사조직을 통해 집권한 전두환 정권 치하에서 군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국방위 회식사건이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국민들은 여전히 하나회가 군부의 절대적 영향력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도 폭행할 정도로 무도한 권력의 실세임을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돌이켜보면, 군부가 권력의 중심이었던 시절에는 불법체포와 구금, 고문이 성행했다. 인권유린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때 그 시절이다.

오늘 국방위 회식사건을 소환한 것은 요즘 들어 부쩍 개인의 인권이 보장된 민주사회에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군부는 물론 경찰과 정보기관 등 권력기관에 의해 자행되는 인권유린은 별로 없다. 정치군인도 없다. 불법구금과 고문, 조작으로 상징되는 독재정권의 전형은 이 땅에서 사라진지 오래됐다. 이는 수십 년에 걸친 민주화 투쟁의 산물이자 깨어있는 국민의 역량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세월은 흘렀다.

 

▲ 최첨단 디지털의 힘과 사법권이 힘이 결합되면, 민주사회에도 독재시대 못지 않는 인권유린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사생활과 개인정보가 첨단 장비에 의해 공개되는 시대
디지털과 검찰의 힘이 결합하면, 독재보다 위험해


법을 집행하는 시스템도 바뀌었다. 개인은 얼마든지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권리를 찾았다. 반면 놀라운 정보통신 발전은 개인의 일상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세세하게 노출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곳곳에 설치된 CCTV는 언제라도 우리의 일상을 엿볼 수 있게 됐다. 금융거래를 추적하면, 경제상황뿐만 아니라 개인의 관계도 샅샅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핸드폰, 노트북을 포렌식 하면 은밀한 사생활의 영역까지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최첨단 디지털 시대가 됐다.

인권은 과거처럼 불법구금이나 고문 등 불법이 자행되지는 않았다고 해서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법을 통한 사법권의 집행이라고 해서 반드시 인권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법에 의해 개인의 신상을 털려고 하면, 얼마든지 상상 이상으로 털 수 있다는 사실이 문제다. 예전에는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해 사건을 조작할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법 절차만 거치면 이전 시대에는 알 수 없는 모든 것을 샅샅이 찾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검찰의 수사력에 ‘최첨단 디지털의 힘’이 더해지면 가공할만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이는 국가권력에 의해 얼마든지 개인의 인권이 침해될 수도 있다는 반증이다.

▲ 2017년 첫날 서울 보신각 앞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새해맞이를 했다.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8년 전 일을 수사한다면서, 아들 노트북까지 가져갔어요” 얼마 전 지인의 하소연을 전해 들으면서 특정 사건에 대한 수사가 한 개인의 일상 모두를 드러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과거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물론 압수수색은 검찰의 요청으로 법원이 발급해야 가능한 일이지만, 압수수색의 범위가 특정되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 남용될 소지는 늘 있다. 남용된 사법권은 그것이 법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인권이 침해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 사법권 남용은 독재시대의 불법 행태와 다르지 않은 이유다.

36년 전 국회 국방위 회식사건을 회고하면서, 우리는 오늘날 진짜 권력은 누구에게 있을까를 묻게 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1조 2항은 분명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의 권력은 하나회 중심의 정치군인으로부터 나왔지만, 오늘날의 권력은 디지털 첨단장비와 검찰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닐까. 당연히 독재시대나, ‘디지털 검찰시대’나 국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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