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황금 띠고리'의 주인인 '낙랑인'은 중국인인가 한국인인가[이기환의 Hi-story]

기자 2022. 10. 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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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소장자료(41만여점) 가운데 유독 낙랑 관련 유물과 사진이 눈에 밟힙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사되고 촬영된 1만7000여점의 유물과 4053점에 이르는 유리 건판 사진이 그것입니다. 얼마 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일제강점기 자료 조사 사업의 공개와 활용’ 관련 학술대회를 열었는데요.

그동안 박물관 소장자료를 재검토해서 특별전(‘낙랑·2001’)도 열고, 발굴보고서(<평양 정백리 8·13호분>·2002), <평양 석암리 9호분>·2018)도 펴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발표 자료 가운데 흥미로운 대목이 보였습니다.

1916년 평양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순금제 띠고리. <평양 석암리 9호분> 보고서에는 7마리 용을 표현했다고 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큰 용 2마리, 작은 용 6마리 등 총 8마리로도 보인다. 오른쪽 부분에서 얼굴을 밑으로 굽힌 듯한 큰 용 한마리가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상대적으로 굵은 금알갱이(1.6㎜)로 표현한 척추뼈가 확연하게 보인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이한상 대전대 교수 설명

■알코올로 닦자 2000년전 글씨가

“평양 석암리 9호분 출토 노기(弩機·원거리용 화살발사장치)에서 ‘조자릉 용(趙子陵 用)’이라는 명문 묵서(묵 글씨)가 보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석암리 9호분은 유명한 국보 ‘황금제 띠고리’ 등 화려한 유물들이 쏟아진 귀틀묘(덧널무덤의 일종)입니다.

명문 발견은 극적이었습니다. 박물관 보존과학부 요원들이 2018년 <평양 석암리 9호분> 보고서를 펴낸 뒤 유물을 정리할 때인데요. 문제의 쇠뇌를 알코올로 닦는 과정에서 희미한 글씨가 보였답니다.

예서(중국 한나라 시대의 서체)로 쓰여진 ‘조자릉 용’이었습니다. 이중 ‘조(趙)’자는 기원후 148년(후한 시대)에 새겨진 ‘석문송’에서 보이는 서체랍니다. 손환일 한국서화연구소장은 “‘조자릉 용’ 명문은 한나라 시대 생활서체로 보인다”고 확인해주었습니다. 어떻든 박물관측은 “<후한서> 등 중국사서에는 ‘자릉’이라는 자를 쓰는 인물들이 여럿 보인다”고 뒷받침했습니다.

석암리 9호분 출토 순금제 띠고리를 장식한 금알갱이들의 지름은 0.3~1.6㎜에 불과하다. 띠고리 표면에는 물방울 모양의 알집이 40개가 남아 있다. 이 알집에 작은 터키석을 끼워 장식했을 것이다. 터키석은 현재 7개만 남아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이한상 대전대 교수 설명

따라서 ‘조자릉’은 중국의 혼란기에 한반도로 넘어온 망명객이거나, 한나라가 낙랑군에 파견한 관리로 파악했습니다. 그렇다면 명문 노기의 소유자 혹은 사용자는 ‘조자릉’이라는 인물일 가능성이 크겠네요.

그러나 박물관측은 ‘석암리 9호분의 주인공=조자릉’이라는 단정짓지는 않았습니다. 근거가 너무나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조자릉’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걸립니다. 기원후 1~2세기에 ‘조(趙)’와 같은 성씨를 썼다면 중국인일 가능성이 크다는 선입관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조자릉’ 명문은 평양이 중국(한나라)이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낙랑군의 치소’임을 방증하는 자료가 될까요.

순금제 띠고리는 얇은 금판을 두드려서 표면에 용 문양을 표현한 후, 푸른색의 터키석과 붉은 색의 안료로 장식하여 만들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왕(王)×’는 중국 ‘왕서방’ 이름?

시계를 1909년 9월로 돌려봅니다. 당시 통감부 고건축 담당 촉탁이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1868~1935)가 대동강 변의 고분을 발굴했는데요. 그 결과 고분의 무덤방에서 2점의 청동거울과 각종 무기, 토기, 오수전이 쏟아져 나왔습니다.(석암리 벽돌분)

그해 11월 이마니시 류(今西龍·1875~1932) 등이 이끄는 발굴단도 똑같은 형식의 무덤을 조사했습니다.(석암리 을분) 이곳에서는 ‘왕(王)×’명 칠기 부품과 청동거울 등이 확인됐습니다. 두 발굴단은 고분 2곳 모두를 ‘고구려 고분’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2년 뒤(1911년) 이마니시 류가 입장을 바꿉니다. 자신이 발굴한 석암리 을분에서 나온 칠기 부품의 ‘왕(王)×’ 명문을 중국인인 ‘낙랑 왕씨’와 관련시킨 겁니다. ‘낙랑 왕씨’는 <후한서> ‘왕경전’에 등장하는 ‘낙랑 남한인=왕경’ 가문을 가리키는데요.

평양 석암리 9호분은 1916년 조선총독부가 1차로 조사한 고분 10기 중 하나였다.석암리 9호분에서는 모두 100건 365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으로 파악됐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후한서>는 “왕경의 8세조인 왕중(王仲)이 재북왕 흥거의 반란(기원전 177년)을 피해 동쪽 바다를 건너 낙랑 산중으로 피했다”고 했습니다. 이마니시는 <후한서>의 낙랑인 왕경이 바로 석암리 을분에 등장하는 ‘王×’이라고 본 겁니다.

1년 뒤인 1913년 발굴된 낙랑토성에서는 ‘낙랑예관(樂浪禮官)’과 ‘낙랑태수장(樂浪太守長)’을 새긴 명문 기와와 봉니(문서류를 밀봉할 때 쓴 점토)가 잇다라 발견됩니다. 이어 평남 용강군 어을동에서 토성과 함께 ‘점제현 신사비’가 발견됩니다. 명문에 등장하는 ‘점제’가 낙랑군에 속한 25개 현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 부각되었습니다.

석암리 9호분에서 확인된 청동용기와 금동 항아리. 향을 피우는 박산로, 음식 조리용 취사기와 식기, 술을 담은 그릇 등이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눈코입에 항문까지 막았던 장례용품

일본학계는 ‘낙랑’이라는 단어에 ‘혹’ 했습니다. 낙랑이라면 한나라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하고 세운 한사군 중 하나가 아닌가, 313년까지 무려 421년이나 한반도 서북쪽을 지배해왔던…. 뭐 이렇게 생각한겁니다. 그런 탓이겠죠.

조선총독부가 1916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벌인 고적조사사업에 ‘평양 일대의 낙랑 고분 조사’을 0순위로 꼽았습니다.

“…단군의 건국설화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후세에 견강부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반도 역사상 비교적 연대가 명백한 것은 한치군의 시기가 처음이다…그래서 한치군 유적부터….”(‘고적조사개요’)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명문칠기. 전한의 마지막 군주인 유영의 연호(기원후 6~8년)인 ‘거섭 3년’ 명문이 새겨져 있다. 거섭 3년은 기원후 8년이다. 전한시대 수공업을 담당한 관청(서공)에서 제작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중 석암리 9호분은 1916년 조선총독부가 1차로 조사한 10기 중 1기였답니다. 이 조사가 시쳇말로 대박발굴이었습니다.

우선 무덤 주인공이 묻힌 나무관(목관) 안에서는 각종 장신구가 실제 착용한 그 모습, 그 위치대로 노출됐습니다.

칼 손잡이와 칼집 일부를 옥으로 장식한 ‘철제장검’(일명 옥구검)과 ‘금장식철제모자환두소도’(금장식 고리 자루가 달린 작은 어미칼 및 자식칼 세트)가 확인되었구요. 주인공의 가슴, 눈, 코, 입, 귀, 항문, 손 등에 삽입했거나 놓았던 장례용 옥(玉) 세트가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화려하기 이를데 없는 순금제 띠고리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나무관의 바깥, 즉 덧널(나무곽)의 안쪽에서도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향을 피우는 박산로, 음식 조리용 취사기와 식기, 술을 담은 그릇 등 각종 청동 및 금속 용기 8점이 나왔구요. 옻칠한 소반(작은 밥상) 등 다양한 칠기 29점이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출토 유물은 총 100건 365점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조선총독부가 1916년 5개년 계획으로 시작된 조선고적사업의 1차 대상은 평양 일대의 낙랑 고분 발굴이었다. 조선총독부는 “단군 건국 설화는 믿을 수 없어서 대상에서 빼고 한반도 사상 연대가 확실한 역사는 한치군(한사군) 시대가 처음”이라면서 “따라서 이 시기를 1차연도 조사에 넣는다”고 못박았다.|국립중앙박물관의 <평양 석암리 9호분>(2018) 보고서에서

■순금제 띠고리에 숨어있던 용 한마리

그중 군계일학의 유물은 바로 ‘순금제 띠고리’(국보)였습니다. 얇은 금판을 두드려서 표면에 용 문양을 표현한 후, 푸른색의 터키석과 붉은 색의 안료로 장식하여 만든 허리띠 장신구였습니다.

분석결과 금의 순도는 순금(24K)에 가까운 22.8~23.8K였는데요. 금판 한 장을 말발굽 형태로 제작했습니다. 테두리 부분을 높이 5㎜ 정도로 접어서 입체감 있게 만들었죠. 바탕 금판의 두께는 약 0.3~0.7㎜, 표면을 장식한 금선의 두께는 0.2~1.1㎜ 정도입니다. 각각의 용은 금선과 금 알갱이로 눈, 코, 뿔, 그리고 발가락 등을 표현해서 붙였습니다. 각 용의 뼈대는 금선과 굵은 금알갱이를 띠처럼 이어붙여 도드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용의 표현에 쓰인 금알갱이의 지름은 0.3~1.6㎜에 불과합니다.

1909년 평양 석암리 을분을 발굴한 일본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이곳에서 출토된 ‘왕(王)×’명 칠기를 중국인 망명객인 ‘낙랑 왕씨’ 가문과 연결지었다. 이마니시 류는 <후한서> ‘왕경전’을 인용하여 “기원전 177년 중국에서 일어난 난을 피해 한반도로 넘어온 왕씨 가문의 후예인 왕경이 석암리 을묘에 등장하는 ‘王×’이라고 본 것이다. 이때부터 평양 일대는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의 치소로 각광을 받게 된다. 조선총독부가 평양 일대의 발굴에 혈안이 된 계기가 됐다.|정인성 영남대 교수 설명

그렇게 표현한 용이 몇마리일까요. 국립중앙박물관이 펴낸 <평양 석암리 9호분 보고서>(2018)는 “얇은 금판을 작은 정으로 두들겨서 큰 용 한마리와 작은 용 6마리 등 모두 용 7마리를 배치했다”고 설명했는데요.

그러나 금공품 연구자인 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이의를 제기하더라구요. “얼굴을 밑으로 급격하게 트는 바람에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오른쪽 부분에 큰 용 한마리가 더 표현되어 있다”는 겁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교수가 지목한 오른쪽을 보니 과연 굵은 크기의 알갱이로 뼈대를 표현한 큰 용 한마리가 더 있네요. 머리는 보

1913년 낙랑토성에서 ‘낙랑예관(樂浪禮官)’을 비롯한 와당과 ‘낙랑태수장(樂浪太守長)’ 봉니(문서류를 밀봉할 때 쓴 점토) 등이 발견된다. 또 1914년 평남 용강 성현리에서는 이른바 ‘점제현 신사비’가 발견된다. 일본학계는 명문 중 ‘점제’가 낙랑군의 25개현에 속해있다고 해서 열광한다.

이지 않지만 뼈대가 확연한 몸통과 발톱이 드러나 있습니다. 숨어있는 한마리가 더 있었던 겁니다.

띠고리 표면에는 물방울 모양의 알집이 40개가 남아 있습니다. 이 알집에 작은 터키석을 끼워 장식했을 겁니다. 그러나 터키석 대부분은 없어져서 현재 7개만 남아있습니다.

또하나의 핵심 유물은 이른바 ‘거섭(居攝) 3년명’ 칠반(칠기로 만든 쟁반)이었습니다. ‘거섭’은 전한의 마지막 군주인 유영(기원후 5~25)의 연호(기원후 6~8년 사용)였습니다. 명문에 따르면 이 칠반은 ‘촉군(蜀郡)의 서공(西工)’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촉군’은 지금의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이구요. ‘서공’은 촉군에 설치된 한나라 관영수공업을 담당했던 관청입니다.

대동강 남쪽을 낙랑군의 치소로 비정한 일제는 낙랑고분을 파악하고, 발굴조사에도 총력을 기울인다. 1920년대까지 1386기의 낙랑고분을 파악하고, 1944년까지 93기의 발굴조사를 실시한다.|국립중앙박물관의 <평양 석암리 9호분>(2018) 보고서에서

■기부금까지 받아 낙랑고분에 집착

이렇게 첫해, 첫번째로 조사된 석암리 9호분의 발굴성과가 전해지자 어떻게 되었을까요.

일제는 1913년 조사된 낙랑토성까지 포함해서 평양의 대동강 남안을 한사군, 즉 낙랑의 치소로 확정했습니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한 일대에 낙랑 광풍이 불어닥쳤습니다. 가뜩이나 한국 역사의 타율성과 정체성을 강조하려 했던 일제는 ‘옳다구나’ 싶었겠죠. 1916년부터 중국(한나라)의 지배를 받은 낙랑의 옛땅을 광범위하게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일제가 패망 직전인 1944년까지 이른바 발굴조사로 파헤친 낙랑 고분은 무려 93기에 이릅니다. 그 사이 고비도 있었습니다.

기원전후부터 기원후 1세기 사이에 평양을 비롯한 한반도 서북부의 묘제에 큰 변화가 생긴다. 하나의 무덤 구덩이 속에 사각형 형태의 덧널(나무곽)을 만든 뒤 그 내부에 다시 두 개 이상의 나무관을 두는 무덤이었다. 이것을 ‘귀틀묘’라 일컫는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의 여파에 따른 예산 절감 차원에서 조선총독부의 조직이 줄어들게 된 겁니다.

그러나 총독부를 대신한 것이 바로 조선고적연구회라는 외곽 단체입니다. 연구회는 1931년 일본의 미쓰비시(三菱) 합자회사 사장인 이와사키 고야타(岩崎小彌太·1879~1945)의 찬조금(6000원)으로 시작되었는데요.

이후 해마다 민간기업과 도쿄(東京) 제실박물관 등의 자금 지원을 받아 평양의 낙랑고분과 경주의 신라고분 조사에 집착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조선고적연구회의 회칙 제11조가 주목되는데요. 한반도에서 출토된 유물은 법령에 따라 국가(조선총독부)로 귀속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중 일부는 평의원회의 결의에 따라 처분할 수 있도록 규정해놓거든요. 가뜩이나 무자비한 도굴로 파헤쳐진 낙랑고분 유물들이 이제는 합법적으로 반출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겁니다.

기원후 8년 무렵에 조성된 석암리 9호분의 묘제 역시 귀틀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귀틀묘와 견줘서도 구조가 특이하다. 무덤 구덩이 바닥에 돌을 깐 것은 물론이고, 무덤 구덩이와 덧널 사이에도 냇돌을 채워넣었다. 고조선의 돌무덤(적석총) 전통이 남아있는 무덤이라는 것이다. 게다가석암리 9호분의 주인공은 여러 명이 들어선 다른 귀틀묘와 달리 홀로 묻혀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평양 석암리 9호분>(2018) 보고서에서

■독특한 스타일의 무덤

이쯤에서 한번 따져봐야겠죠. 낙랑 발굴을 주도한 세키노 다다시는 “조선은 예부터 중국 문화의 은혜를 입었고 그 침략을 받아서 항상 복속해왔다”면서 “자연히 사대주의와 퇴영 고식주의에 빠져 국민의 원기도 없어졌다”(<조선의 건축과 예술>·1941년)고 했습니다. 전형적인 정체성과 타율성의 강조죠. 조선은 영원히 남의 나라 속국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그렇다면 어떨까요. 일제 강점기에 파헤친 이른바 낙랑고분은 100% 중국 한나라의 문화를 대변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낙랑의 치소가 존재했다는 평양 대동강 남안의 고분들을 볼까요.(오영찬 이화여대 교수)

원래 한사군이 설치된 무렵(기원전 1세기) 평양 일대의 묘제는 덧널(나무곽) 무덤이었는데요.

그런데 기원 전후부터 새로운 묘제가 등장합니다. 하나의 무덤 구덩이 속에 사각형 형태의 덧널(나무곽)을 만든 뒤 그 내부에 다시 두 개 이상의 나무관을 두는 다소 복잡한 무덤이었습니다. 이것을 ‘귀틀묘’라 합니다.

특히 ‘순금제 허리띠 장식’ 같은 국보급 유물이 쏟아진 ‘석암리 9호분’은 더욱 심상치 않습니다.

기원후 8년 무렵에 조성된 이 고분 역시 귀틀묘인데요. 다른 귀틀묘와 견줘서도 구조가 특이합니다. 무덤 구덩이 바닥에 돌을 깐 것은 물론이구요. 무덤 구덩이와 덧널 사이에도 냇돌을 채워넣었습니다.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요.

최근 석암리 9호분 출토 노기(화살발사장치)의 유물정리 과정에서 읽어낸 먹글씨. ‘조자릉(趙子陵) 용(用)’이라 쓰여있다. 이 유물의 소유자 혹은 사용자가 ‘조자릉’이라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고조선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돌무덤, 즉 적석총이 전통 묘제인 고조선의 향기를 짙게 풍기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덧널 안에 나무관을 두 개 이상 넣는 합장묘의 형태를 취하는 다른 귀틀묘와 달리 이 석암리 9호분의 주인공은 한 명 뿐입니다.

무덤 주인공의 신분이 지극히 높은 분이라는 얘기죠. 일본 학자들이 석암리 을분에서 출토된 ‘왕(王)×’ 명문을 두고 뭐라 했습니까. <후한서> ‘왕경’전의 기록대로 ‘낙랑 왕씨’, 즉 한나라에서 망명한 인물(왕중)의 8대손(왕경)로 보았죠.

그런데 설령 ‘왕×’이 ‘중국인=왕경’이라 해도 8세, 즉 200년 이상 한반도에서 대를 잇고 살아온 인물(귀화인)을 중국인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또 같은 <후한서>는 “토인(土人)인 왕조가 낙랑태수를 죽이고 스스로 ‘낙랑태수’라 칭하면서 6년간(기원후 25~30) 낙랑군을 장악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토인(土人)’은 토착세력, 즉 고조선계 재지세력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마니시 류는 1909년 석암리 을묘에서 출토된 ‘왕(王)×’ 명문의 주인공을 중국인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설령 ‘왕×’이 ‘중국인=왕경’이라 해도 200년 이상 한반도에서 대를 잇고 살아온 인물(귀화인)을 중국인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후한서>에는 “토인(土人)인 왕조가 낙랑태수를 죽이고 6년간(기원후 25~30) 낙랑군을 장악했다”는 내용도 있다. ‘토인(土人)’, 즉 고조선계 재지세력 중에 왕씨성을 가진 이들도 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왕조’는 토착세력을 대표하는 고조선계 인물일 수 있습니다. 물론 ‘왕경’처럼 먼 옛날 한반도로 넘어와 완전히 토착세력화한 인물일 수도 있겠죠. 어떤 경우든 ‘중국인’으로 단정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최근 석암리 9호분 유물(노기)의 보존처리 과정에서 확인한 ‘조자릉’ 명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조(趙)씨=중국인’으로 해석하고 만다면 어떨까요. 고조선의 향기가 나는 고분의 특성과, 왕경 및 왕조 관련 역사 기록을 무시 혹은 오독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국보인 ‘순금제 허리띠고리’는 어떨까요. 중국제(한나라제)를 굳이 대한민국 국보로 대접하는 것이 옳을까요.

그런데 이 국보 허리띠와 비슷한 출토품이 평양의 낙랑고분 7기에서 나왔다데요. 2000년 전 이 땅에서 터전을 잡고 살았던 사람들 사이에 사랑받고 유행했던 명품 허리띠였다는 겁니다. 그것이 중국제품이든, 고조선제품이든 국보의 대접을 받을만 합니다.

만약 평양의 낙랑고분이 무자비한 도굴을 당하지 않았다면 ‘띠고리=낙랑의 상징유물’이 되었을 것 같아요.

석암리 9호분 유물(노기)의 보존처리 과정에서 확인한 ‘조자릉’ 명문과 석암리 을분에서 나온 ‘왕×’ 명문이 조씨와 왕씨라 해서 모두 중국인’으로 치부한다면 너무 단세포적인 해석이다.고조선의 향기가 나는 고분의 특성과, 왕경 및 왕조 관련 역사 기록을 무시 혹은 오독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낙랑인은 중국인일까

또 기원전후 덧널무덤에서 초기 귀틀무덤으로 옮겨가는 와중에도 고조선 유물인 세형동검과 청동창, 거마구(말과 수레에 장치하는 도구) 등이 심심찮게 보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역시 ‘낙랑인=중국인’으로 도식화할 수 없는 증거가 됩니다.

그럼 낙랑과 낙랑문화를 어떻게 봐야할까요. 낙랑연구자인 오영찬 교수는 “낙랑문화는 중국과 고조선 세력의 영향력이 교차하고 융합해서 이룬 독특한 문화”로 해석합니다. 이른바 ‘낙랑인’이라는 새로운 ‘종족집단(ethnic group)’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귀틀묘와, 그 귀틀묘에서 종종 나타나는 세형동검과 돌무덤의 전통, 그리고 중국 중원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띠고리 문화 등이 착안점이라는 겁니다. 또한 <후한서> 등에 등장하는 한나라계 재지세력(왕경 가문)과, 한때 낙랑군을 점령한 고조선계 인물(왕조) 등을 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그렇게 탄생한 낙랑인은 결국 한국사의 당당한 주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이 기사를 이해 오영찬 이화여대 교수, 정인성 영남대 교수, 이한상 대전대 교수, 양성혁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등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국립중앙박물관, <평양 석암리 9호분>(일제강점기 자료조사보고 30집), 2018

오영찬, <낙랑군 연구>, 2006, 사계절

정인성,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의 낙랑유적 조사·연구 재검토-일제 강점기 고적조사의 기억1’, ‘호남고고학보 제24집’, 호남고고학회, 2006

이순자, ‘일제 강점기 고적조사사업 연구’, 숙명여대 박사논문, 2007

이성주, <제국주의 시대 고고학과 그 잔적>, ‘고문화 47’, 한국대학박물관협회, 1995

히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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