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씨들', 왕자도 오빠도 필요없다..'진짜' 여성 스릴러

한겨레 2022. 10. 8.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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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의 TV 새로고침]황진미의 TV 새로고침ㅣtvN '작은 아씨들'
<작은 아씨들>의 한 장면. 티브이엔 제공

<작은 아씨들>(tvN·티브이엔)은 ‘미친 드라마’로 불린다. 연기, 연출, 미술, 음향 등이 뛰어난 작품이라는 점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다. 혹자는 스타일이 과잉된 ‘때깔 좋은’ 드라마가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동의할 수 없다. <작은 아씨들>은 그저 웰메이드 드라마가 아니다. 기존의 드라마와 궤를 달리하는 혁신적인 드라마다.

드라마는 두 가지 면에서 특이점을 지닌다. 첫째는 전개 방식이다. 드라마 덕후들도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전개에 혀를 내두른다. 일단 전개가 여느 드라마의 3배속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이땐 할리우드 액션이 좀 섞였었지”라는 복선과 동시에 폭발이 일어난다. 복선을 음미할 짬을 5초도 주지 않는다. “오늘이 선거 당일이라 해도 알렸을 거야.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을 뽑았는지 알려야 하니까. 아버지가 아니라 당신이 살인자라는 걸 알릴 걸 그랬나”라는 대사가 나오면 곧바로 선거 당일에 살인자임을 밝히는 화면이 펼쳐진다.

속도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건 관객과의 암묵적인 규약을 깨뜨리는 작법이다. 가령 어떤 인물에 한껏 주목하게 만든 다음, 가차 없이 죽인다. 흡사 ‘비풍초똥팔삼’ 순서대로 패를 버리는 식이다. 화영 언니(추자연)가 죽고, 신 이사(오정세)가 죽고, 고모할머니(김미숙)가 죽고, 원상우(이민우)가 죽고, 급기야 박재상(엄기준)이 죽는다. 이건 좀 반칙이 아닌가 싶지만, 달리는 기차처럼 미련이 없다. 중간에 굵직한 사건들이 마구 끼어든다. 처음엔 저축은행 사건을 다루다가, 중간엔 복지재단과 사학을 파는가 싶더니, 한두 회 만에 재개발 철거사건이 중요해진다. 과연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다시 쓰는” 방대한 스케일의 적을 상대하다 보니 사건들이 난립하고 겹쳐 있다. 하지만 이해 못할 것은 없다. ‘이슈를 이슈로 덮는’ 대한민국 사회의 속도감과 복잡성에 기시감이 느껴진다.

구력이 짧은 시청자들은 너무 산만하지 않으냐고 불만을 터뜨린다. 하지만 드라마의 플롯은 매우 탄탄하다. 12회 중 10회를 달려오는 동안 어디 하나 구멍이 없다. 이런 불만은 익숙하다. 영화 <비밀은 없다>(2016)가 개봉했을 때, 플롯이 산만하다느니 장르에 익숙지 않은 작법이라느니, 너무 서사를 꼬았다는 등의 불평이 있었다. 하지만 <비밀은 없다>는 곱씹어볼수록 수작이다. 주류적 서사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소수자적인 진실을 파헤친 신선한 영화이다.

티브이엔 제공

둘째는 여성 스릴러로서의 완결성이다. 돈 앞에서 간절한 욕망을 드러내는 무모한 경리, 거대한 권력 앞에서 굽히지 않는 용감한 기자, 어른보다 강한 내공으로 현실을 직시하는 청소년 캐릭터가 모두 여자다. 그뿐이 아니다. 드라마가 오프닝부터 대놓고 밝히는 최종 빌런도 여자다. 원상아(엄지원)는 야심가 남편의 사랑을 받는 허영스러운 아내를 연기하지만, 부부의 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어 있다. 이들이 실은 쇼윈도 부부이고 남편은 폭력적이라는 것도 표피적인 설정일 뿐이다. 진실은 ‘대통령이 되지 않은 이상 너는 나를 사랑할 자격이 없다’며 아내가 가스라이팅하며 머슴처럼 부리다 버리는 관계였다. 나를 너무도 사랑하는 남편에게 평소에는 경멸을 퍼붓다가 단 5분간만 애무를 허락하며 살인을 지시하는 원상아의 얼굴은 얼마나 치명적인가. 이처럼 다면적인 여성 캐릭터와 인물 간의 심층적인 관계가 있기에 특별한 스릴러가 완성된다.

영화 <차이나타운>이 나왔을 때, 완벽하게 성차를 미러링한 범죄물에 놀라면서도, 왜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스릴러가 고작 남성 조폭의 세계를 똑같이 그려놓고 주인공만 여성으로 바꾸는 조야한 방식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후 등장한 영화 <미옥>(2017) <악녀>(2017) 등도 숙고된 여성 장르물로 보긴 힘들었는데, 드라마 <마더>(티브이엔·2018), 영화 <마녀>(2018) 등을 통해 여성 주연의 범죄스릴러물이 차츰 발전하였다. <작은 아씨들>은 여성 장르물의 정점이다. 단지 성차를 뒤집는 방식이 아니라, 장르에 성차를 침윤시켜 독창적인 장르를 완성하였다.

대체 <작은 아씨들>의 장르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난무한다. 확실한 것은 주인공부터 악당까지 주요 배역이 모두 여성이며, 이들이 모두 자신의 욕망과 원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여자들끼리 경쟁하고 싸우고 협상하는 동안 박재상, 최도일(위하준), 하종호(강훈) 등 남자들은 여자를 사랑해서 돕는다. 소녀들에겐 그런 남자조차 필요 없다. 그들은 서로를 믿고 사랑하며, 그들만의 세상을 향해 전진한다. 여자들에게 아버지도 오빠도 왕자도 필요 없음을 이보다 직설적으로 말할 수 있으랴. ‘미친 드라마’ 속 ‘미친 여자들’을 보라! 당신이 아는 여자는 없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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