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마땅히 백성의 바람을 따라야"..400년 전 한 경제관료의 외침 [역사 속 경제이야기]

이도형 2022. 10. 8.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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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경제이야기①
경제는 결국 사람의 심리를 통해 결정된다. 사람이 경제를 만들고, 사람이 경제를 무너뜨린다. 그렇기 때문에 비약적으로 성장한 지금의 경제라 할지라도, 반복되는 과거 역사 속 사람의 행보를 되짚어보면 한층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역사 속 경제이야기>는 역사를 뒤흔든 경제사건과 그 사건의 주인공을 통해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경제 현상’의 통찰을 얻는 시리즈다.
 
사진=연합뉴스
지금으로부터 373년 전인 1649년, 막 즉위한 서른 살의 임금에게 한 노(老)대신이 구구절절한 글을 올렸다.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자는 것이었다. 젊은 왕의 아버지가 임금일 때도, 그 앞의 왕도 시행했지만 각종 부작용으로 실패한 법이었다. 하지만 노대신은 “이 법은 백성을 편안케 하는 법”이라면서 이번에야 말로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차례 사직상소를 냈던 일흔 살의 대신은 자신이 필요하다며 반려한 왕의 앞에서 “신은 오직 전하만을 믿습니다”고 말했다. 대동법을 시행하지 않으면 자신을 쓰지 말라는 의미였다. 

왕의 이름은 조선왕조 17대 국왕 효종, 노대신은 김육이다.  

김육은 왜 이렇게 대동법을 원했을까. 대동법은 세법이다.

조선왕조 시대, 왕조는 백성에게 ‘조(祖)’, ‘용(庸)’ ‘조(調)’의 형태로 세금을 걷어갔다. 조(祖)는 토지에서 나오는 세금, 즉 ‘토지세’다. ‘용(庸)’이란 국가가 원하는 각종 용역(군대, 성벽쌓기 등)에 동원되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조(調)’인데 이는 국가와 왕실이 필요로하는 각종 물품을 조달하는 세금이었다. 이를 공납(貢納)이라고 불렀는데 각 가정마다 부과됐다. 토지에서 나오는 세금은 자연히 부자일수록 많이 부과됐을 것이고, 용역에 동원되거나 물품을 바치는 것은 ‘사람’에게 걷는 만큼 상대적으로 부자들에게 유리한 세금이었다. 거칠게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직접세와 간접세간 관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무릇 국가기강의 척도는 조세정책의 형평을 통해 드러난다. 조선 초기, 기강이 날이 서있을 때에는 전체 조세에서 토지세 비중이 높았다. 하지만 국가의 기강이 흐트러지고, 권세가들의 힘이 강해지면 부자들은 세금을 덜 내게 된다. 자연히 없이 사는 자들의 부담이 강해진다. 조선에서는 그것이 전체 세금 중 공납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뜻이 있고, 개혁적인 사람일 수록 이 제도의 개선을 원했다. 중종때 조광조가 처음 공납제도의 개선을 주장한 뒤 이이, 유성룡을 거쳐 이원익의 주장으로 처음 시행되었던 대동법이 바로 이 개선책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대동법이란 그동안 ‘사람’을 기준으로 걷었던 공납을 ‘토지’ 기준으로 바꾸는 것이다. 광해군 시절 경기도에, 이후 인조시절 강원도에 실시된다. 

하지만 광해군과 인조 모두 법안을 곡창지대인 삼남(충청·호남·영남)까지 확대 실시하는 것에는 망설였다. 당시 조세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공납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편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컸다. 대동법 시행을 건의했던 이원익마저 인조에게 “먼 외방의 민정이 날이 갈수록 더욱 어긋나고 있다”며 폐지를 권했다. 당시 여러 차례 발생한 흉년으로 쌀값이 불안정했던 것도 대동법 확대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빈약한 유통망을 가지고 있는 조선왕조에서 일괄로 걷은 대규모의 쌀을 운송하는 것에 대한 부담도 문제였다. 대동법은 토지 크기대로 일정한 규모의 쌀을 걷어 서울 중앙으로 올려 보냈다. 과거보다 더 많은 창고와 쌀의 운송력이 필요했다. 도로사정이 안 좋은 당시 조선 사정으로서는 대규모 물품 운송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배로 움직이는 경우엔 난파라는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었고, 조운로도 개선해야했다. 이런 단점으로 조정 내에서는 기존 공납 물품 예산안(공안)을 재검토해 줄이는 게 답이라는 반론이 꾸준히 나왔다.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하는 실무 책임자로 내정된 조석윤은 “오히려 공안을 먼저 바로잡는 일이 시행하기 쉽다”며 자신의 임명을 거절했다. 

경기도 여주에 위치한 '북벌 군주'로 알려진 효종대왕과 인선왕후 장씨가 묻힌 영릉(寧陵). 위쪽 언덕에 효종의 능이 아래쪽 언덕엔 인선왕후 능이 위치한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양식이다. 연합뉴스
이런 단점에도 김육은 대동법 시행을 밀어붙였다. 효종 2년(1651년) 가장 공납의 피해가 컸던 충청도 지역에 대동법이 실시됐고, 김육이 사망하던 해인 효종 9년(1658년)에 전라도 해안지역에 대동법이 실시된다. 김육은 죽기 직전 대동법 시행을 위해 내려가는 전라감사 서필원을 불러 논의했고, 자신이 죽은 뒤 영의정 정태화, 조정에서 큰 힘을 쥐고 있던 송시열 등에게 대동법의 이후 추진을 맡겼다. 죽기 직전까지 대동법을 향해 진력한 것이다. 그 때문인지 장남 김좌명은 그 후 자진해 중앙관직을 버리고 전라도로 내려가 대동법 시행을 감독하겠다고 청원한다. 결국 김육의 바람대로 대동법은 전국으로 확대 실시된다. 한계가 있긴 했으나 그동안 난립해있던 세금항목을 일원화 하고, 누진세적 경향을 띄었다는 점에서 진전된 제도로 평가받는다. 아울러 일반 백성들의 부담도 일부분 경감되었다. 

김육은 왜 이렇게 강하고 끈질기게 대동법을 원했을까. 김육은 대동법을 추진하자며 올린 수많은 상소에서 한결같이 ‘이 법은 가지지 않은 자들을 위한 법’이라고 말한다. 효종 8년(1657년), 전라도에 대동법을 확대시행하자는 건의문에서 그는  “백성이 소망하는 바는 하늘도 반드시 따라주는데, 어떻게 백성의 뜻에 순응하는 일을 먼저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에겐 못 가진 자에게 세금을 줄여주는 대동법이 국가가 반드시 해야 할 필수적인 사업이었다. 앞에서 말한 1649년 효종과의 만남에서 김육은 대동법을 반대하는 신하들을 앞에 두고 이렇게 말한다. “이 법의 시행을 부호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국가에서 영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 마땅히 소민들의 바람을 따라야 합니다. 어찌 부호들을 꺼려서 백성들에게 편리한 법을 시행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국가는 마땅히 백성들의 바람을 따라야 합니다’. 400여 년 전 조선왕조의 재정개혁을 이끈 한 경제 관료는 개혁의 정당성을 ‘국가의 필요성’에서 찾았다. 왕조시대 이후 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공화국으로 바뀐 대한민국이지만, 이 필요성은 줄어들지 않는다. 국가라는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가장 큰 원칙은 결국 ‘가진 자’들 보다는 ‘가지지 못한 자’들을 위해야 한다는 걸 우리는 김육의 집념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의 경제 관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작용할 원칙이기도 하다. 

이도형 기자 scop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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